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8화 (7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8화

78. 신혼여행

“이 천하에 몹쓸 놈. 견훤!”

왕건은 선필이 보낸 서신을 읽고 길길이 날뛰었다.

“폐, 폐하.”

그런 왕건의 모습에 최언위와 한림원 학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견훤과 거란이 진짜 왕건을 발작하게 만드는군.’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역사학도로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미래에 보여주고 싶었다.

“견훤이 그놈의 속내가 뻔히 보이지 않느냐? 신라 왕실의 은혜를 받고 그 효행으로 이름난 손씨 집안이 공개적으로 석종을 백제에 바치고 굴복하면 난리가 난다. 인근의 호족들도 ‘충효를 자랑하던 손씨마저 백제에 붙었는데 나도 뭐 죄책감 없이 견훤에게 붙어야겠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거고.”

왕건이 이를 갈며 외쳤다. 왕건의 설명을 듣다 보니 나도 견훤의 생각이 쉽게 이해가 갔다.

“그렇습니다만 손긍훈을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지금 응천군 인근 육로는 다 견훤이 잡고 있습니다.”

최언위도 될 수 있으면 손긍훈을 구하는 쪽으로 머리를 굴려보는 것 같은데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육로가 안 되면 해로로 가야지. 마침 응천군이 동해에 가까이 붙어 있으니. 해로로 배를 보내서 손긍훈의 일가와 가보인 석종만 빼내 온다면.”

왕건이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손가락으로 바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천군이 오늘날의 밀양인데 밀양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울산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고을이었다.

“우리가 동해에서 수군을 움직이려면 명주도독 김순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 속을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최언위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명주도독 김순식이 고려에 협조하며 군사를 동원하고는 있었지만 또 행보가 애매한 면이 있었다.

“김순식이라…….”

왕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더니 힐끔힐끔 내쪽을 곁눈질했다. 나한테 뭔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왕건이 스스로 머리를 감싸 쥐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이것마저 떠넘기면.”

혼자서 그렇게 고뇌하던 왕건이 최언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거나 한림원에서 손긍훈을 구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해 보도록 하라. 무슨 대강의 방책이라도 나와야 내가 어전에서 중신들에게 말을 꺼내 보지. 아무 방책 없이 무조건 구하자고 하면 중신들이며 호족들이 다 반대할 게 뻔하고.”

“응천군 인근의 호족들이 견훤에게 붙은 상태라 사실 해로로 배를 보내도 손긍훈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최언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구색은 맞춰야 하는 일이다. 아니 최소한 언양군 앞바다에 배를 보내서 우리 고려가 손긍훈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구색은 보여야지. 애초에 지금 내가 공산 전투 이후 견훤에게 연전연패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게 민심이 나를 따르기 때문이다. 견훤이 그놈이 패권을 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람들이 나를 은근히 밀어주는 건데. 구색은 맞춰야 해.”

계속 구색 타령을 하던 왕건은 또 내 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 스스로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진짜 내가 한 번만 이기면 다 역전할 수 있는데. 한 번만. 어쨌든 방도를 생각해 보도록. 시간이 급하니 내일까지 뭔가 방도를 마련해야 해.”

그러면서 왕건은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감싸 쥐고 한림원을 나섰다. 왕건의 은근한 눈치를 받은 나는 기가 막혔다.

‘저럴 거면 대놓고 명을 내리든가. 하긴 왕건에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어. 내가 자청해서 유민 문제를 떠맡았으니 또 어려운 일을 넘길 수가 없었겠지.’

따지고 보면 이번 손긍훈 구출의 건도 지난날 있었던 부석사 무차대회 때와 똑같았다.

고려 쪽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데 실패할 걸 알면서도 사람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떠맡고 출전하는 사람은 실패의 책임을 다 져야 하고 말이야. 그러니 왕건 같은 사람도 이 일을 나한테 못 넘긴 거야.’

다만 내 뇌리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손긍훈 구출 작전에 나서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제 나와 왕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그 전에 공을 많이 세워놔야 한다.’

내가 이 시대에 와서 왕건을 처음 만났을 때가 공산 전투 직후였다. 왕건과 고려가 제일 힘들 때였다. 그 이후로도 계속 고려가 전투에서 패하면서 힘든 시기가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고려가 힘든 상황이라서 대호족들이 정윤 왕무를 심하게 괴롭히지 않은 거다. 밖에 견훤이란 강적이 있으니 적당히 괴롭힌 거지.’

유긍달 등이 적당히 괴롭힌 건데도 나와 왕무가 그 고난을 헤쳐 나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앞으로 왕건의 일이 풀리기 시작하고 견훤의 세력이 약해지면 그 대호족들이 본격적으로 나올 거다. 그 전에 열심히 뛰어서 공을 세워 놔야 해. 왕건에게도 빚을 지워놓고.’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손긍훈 구출작전도 자청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다.

‘이 몸은 김순식의 장남 김장명과도 어느 정도 안면을 터놨으니. 김순식에게 한 번 정도 아쉬운 소리를 해도 될 법하고.’

이런 생각에 아마 왕건은 내 얼굴을 바라본 것 같았다. 나도 나설 마음이 있었는데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유부녀가 됐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나 혼자서 하겠다고 나서면 되는데 이제는 남편 왕무가 있으니. 발해 유민을 떠맡는 일이야 내 은광의 돈을 쓰는 일이라 내가 결정했지만. 손긍훈 구출 작전은 왕무의 도움이 절실하다.’

손긍훈을 구해 오려면 어쨌든 상륙해서 전투를 펼치긴 해야 하는데 군경험이 없는 내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왕건에게 대뜸 일을 맡겠다고 자청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니까 이게 거추장스럽네.’

* * *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주원에 돌아와 왕무를 기다렸다.

‘오늘 또 안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백제와 거란의 사신교환 사건으로 비상이 걸려서 한동안 바쁜 거 같은데. 안 오면 내가 왕무가 일하는 군영에 가봐야 하나?’

그런데 다행히도 오늘은 왕무가 늦게나마 나주원에 들어왔다.

“왔느냐?”

나와 같이 왕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주왕후가 마중을 나왔다. 나도 나주왕후 곁에서 왕무를 맞이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왕무와 함께 우선 처소에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뭔가…….”

왕무가 왠지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윤 전하.”

“무슨 일이 있소?”

왕무는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인도 치렀으니 기념으로 한번 명주 쪽으로 여행이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어려울 수도 있는 손긍훈 구출 작전에 나서자고 어떻게 왕무를 설득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왕무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나왔다.

‘이 시대는 신혼여행이란 개념이 없는 시대인데.’

말을 꺼내놓고 나도 순간 당황했다.

“우리 혼인과 여행? 아니 아니. 국선의 말이 맞소. 그래그래 여행을 가는 게 순리지. 명주의 일출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왕무는 내 말을 듣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그리 말했다.

‘이 시대에도 신혼여행이 있었나? 왕무가 의외로 수긍을 하네. 하긴 내가 사학석사라도 이 시대의 풍속을 모두 알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응천군의 손긍훈이 곤경에 빠져 구원을 청한 일을 들으셨습니까?”

“조정에 이야기가 돌고 있어서 나도 들었습니다. 확실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쪽에서 최선을 다해 군사를 내어 구출을 해야 하는데.”

왕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판단을 보면 왕건과 몹시 닮은 거 같기도 해. 뭔가 언행이나 사고과정은 다르지만 결론을 내는 건 닮았다고……아니야. 이건 내 망상.’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윤 전하와 제가 한번 나서서 손긍훈의 일을 맡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에게 작은 계책이 있긴 있습니다.”

“국선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소. 그래서 명주에 가자고 했던 거였군.”

왕무가 약간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계책에 대해서는 안 듣고 그리 결단을 내리셔도 됩니까? 실패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그런 왕무를 보고 놀라서 되물었다.

“국선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부석사 무차대회 때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때 국선 덕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번에도 국선을 믿습니다.”

왕무가 대뜸 말했다.

“정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어전에서 폐하께 이번 일을 맡겠다고 정윤 전하께서 말씀을 올려주십시오.”

정윤 왕무는 어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알겠소. 그럼.”

왕무는 내 말을 듣고 방을 나서려고 했다.

“어디 가십니까?”

“처소는 따로 쓰는 게 국선에게 편할 것 같아서.”

“대강의 계획에 대해서는 정윤 전하께서도 듣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손긍훈을 구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며 물자가 있는데 폐하께 부탁드리려면 이야기를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렇군.”

왕무는 내 말을 듣고 도로 돌아왔다.

“피곤하십니까?”

나는 왕무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나눈 대화도 그렇고 뭔가가 묘하게 어색해서. 왕무를 데리고 가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군무를 볼 것이 많아서.”

왕무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 근래 일이 많아서 머리 회전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제 이야기만 듣고 푹 쉬십시오.”

“여기서 자도 될지?”

“여기서 푹 주무십시오. 일이 급하니 저는 잠을 안 자고 계획을 가다듬겠습니다.”

나는 그리 말했다. 이제 시간이 없어서 밤을 새울 필요가 있었다.

‘왕무 얘가 그동안 이상한 짓을 할 기미도 안 보였으니. 거기에 머리회전이 잘 안 될 정도로 지친 상태니. 이상한 짓을 하면 한 방에 제압해야지.’

나는 왕무에게 내 계획에 대해 대강 설명해 주고 말했다.

“내일 어전에서 폐하께 승려 몇 분과 목수 여럿과 함께 나서겠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알겠소.”

왕무는 그리 대답하고 지쳤는지 침상에 가서 그대로 잠들었다.

‘진짜 빨리 잠드네.’

나는 잠들어버린 왕무의 얼굴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탁에 놓인 지도와 책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다음 날 왕무가 어전에서 왕건에게 말을 꺼내자마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요구한 사람이며 물자가 즉시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날 서둘러 출전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야 했다.

“지금 시간이 매우 급하다. 손긍훈은 응천군에서 우리의 구원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왕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서둘러라.”

직접 나와 왕무를 전송나온 왕건이 말했다.

“손긍훈에게 당장은 견훤의 명에 따르는 척하며 시간을 끌라고 하십시오. 그러다가 저희가 언양군 앞바다에 당도해 전갈을 보내면 손긍훈이 몰래 가족들만 데리고 나오면 됩니다.”

내가 말했다.

“선필에게 그렇게 전갈을 보낼 것이니 걱정 마라. 무야. 이번에도 너에게 미안하구나. 그러나 고려의 정윤과 정윤비가 손씨를 구하기 위해 직접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삼한 땅에 우리 고려의 의를 알릴 수 있는지라.”

왕건은 나한테 대답하고 나서 왕무 쪽을 보며 진짜 미안한지 그런 말을 했다.

‘왕건에게 빚은 지워놨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사를 하고 왕무와 함께 군사 100기를 거느리고 명주로 향했다. 명주에는 배를 좀 준비해 달라고 미리 전령을 급파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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