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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5화 (75/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5화

75. 첫날밤

왕무는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연우 너는 이제 내 아내고 내가 이래도 결코 그른 일이 아니지?”

그러더니 왕무는 자신의 윗옷을 벗었다. 왕무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정윤 전하!”

나는 정신을 차리라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왕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왕무의 오른손이 내 가슴 쪽 옷자락 속으로 들어왔다.

“이 나쁜 놈아!”

나는 이성을 잃고 그렇게 외치며 왕무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왕무는 왼손 하나로 내 양쪽 팔목을 모두 꽉 쥐었다. 정말 힘이 얼마나 센 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남자였을 때라도 이런 괴력은 당해낼 수 없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찔끔 났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왕무는 더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 와중에도 왕무의 오른손은 내 옷 속을 헤집고 있었다. 내 윗옷도 반 넘게 벗겨졌다. 옷이 벗겨져서 살결이 반쯤 드러난 상태에서 왕무가 나를 침상에 눕혔다.

* * *

“꺄아아아악.”

나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퍼뜩 내가 몸을 일으켰는데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시녀 경란이가 놀라서 내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내 얼굴의 땀을 닦아주며 요란을 떨었다.

‘가위를 눌려도 무슨 그런 꿈을. 차라리 귀신이 나오는 것이 낫지.’

나는 몸을 덜덜 떨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구산사에서 혼사가 결정된 이후 나는 이런 꿈을 자주 꾸고 있었다.

‘그동안은 억지로 이런 일에 관해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꿈에서 구체적으로 겪게 되니. 정말, 정말…….’

그 생각을 하니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시녀 경란이뿐만 아니라 상산부인 역시 달려와 있었다.

“에구. 연우야. 매일 악몽을 꾸니 어떡하니? 이런 아이를 어찌 궁에 보낼지.”

상산부인도 속상한지 발을 구르며 외쳤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한다 생각하니 나는 민망해졌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상산부인에게 말했다.

‘구산사에서 왕건과 담판을 지어놨으니 상산은 안전할 거예요. 내 미래지식을 이용하면 상산은 빠져나갈 확률이 높기도 하고.’

* * *

구산사 대웅전에서 나는 어쨌거나 왕건이 정윤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줄 의사가 확실한 것을 확인했다. 계속 꼬치꼬치 파고드는 나에게 질린 왕건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연우야. 너무 걱정 마라. 아슬아슬하긴 해도 정윤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내가 다 계산해서 움직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왕건의 말도 맞긴 했다. 확실히 수많은 대호족들이 수작을 부렸지만 결국 정윤 왕무는 고려 2대왕으로 즉위는 했다.

‘근데 진짜 아슬아슬하게 왕만 됐지 그 이후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잖아. 이 늙은이도 거기까지는 계산을 못 했군. 왕위를 물려주는 것까지만 계산이 정확했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왕건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명주 사건 때처럼 제가 정윤 전하의 세력을 늘리려고 할 때마다 폐하께서 나서서 막으실 건가요?”

“김순식 건은 진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김순식이 고려를 위해 공을 세운 것도 없는데 덜컥 정윤과 인척이 되어 후계구도를 확정지으면 다른 대호족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거기다가 견훤이 기세를 떨치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나중에 상황이 좀 좋아지고 연우 네가 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정윤의 세력을 늘려주면 나에게도 좋은 일인데 왜 막겠느냐? 단 유긍달 등이 알면서도 반발하지 못하게 명분이 확실해야겠지. 가령 예를 들면 표천현의 은광을 네가 얻을 때처럼 말이다. 그럼 나도 모른 척할 수 있다.”

왕건이 확실하게 나에게 약속했다.

“표천현의 은광 사건이 폐하께 깊은 인상을 남겼나요?”

“그렇다마다. 그걸 보고 너를 정윤에게 꼭 붙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면 그 누가 거기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느냐?”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윤신달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나나 아버님이나 잘못된 판단을 내렸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내가 왕건에게 다른 확답도 받아내려 하는데 왕건이 반색을 하면서 외쳤다.

“이제 시간이 다 됐다. 그만 물어.”

어느새 대웅전 안의 향연기가 옅어지고 있었다. 향이 다 탄 것이다.

* * *

‘왕건과 그런 담판을 지었으니 내 지식을 총동원해 정윤의 세력을 늘려야지. 그러면 나중에 다가올 비극을 피할 수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왕무와 부부가 됐다는 사실이야. 부부가 되면.’

또다시 꿈 생각이 나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 우물 바닥에서 왕무의 상반신을 봐서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상상할 재료가 생겼으니. 으악.’

그런 나를 상산부인과 경란이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네요. 옷을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나는 상산부인을 안심시킬 겸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우적우적.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는 야무지게 밥을 퍼먹었다.

‘첫날밤에 꿈에서처럼 왕무가 건방지게 나오면 내가 제압해 버린다.’

나는 군대에서 총검술도 배운 세대였다. 지금이야 군대에서 총검술을 배우지 않지만 나 때에는 배웠다.

‘이 시대에도 총검술은 단창 같은 걸 휘두를 때 유용하게 쓸 만해. 짤막한 몽둥이 하나를 소매에 숨겨 가지고 들어가야지. 아니 이 외에도 나름 계획을 잘 짜면 근접전에서 순식간에 왕무를 기절시킬 수 있다. 부끄러운 척 웃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목젖을 치면 왕무가 아무리 강해도 한방이야.’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갑자기 체력을 최대한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체중이라도 불리면 그런 싸움에서 유리하다.’

내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임희가 말했다.

“내일이 벌써 혼사날이구나.”

임희의 안색은 담담했다. 구산사 대웅전에서 임희 역시 왕건과 독대를 하며 왕건에게 설득당한 것 같았다. 임희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시간이 한 10일만 있었어도.’

하지만 이미 연등회 날 고려의 중신들과 호족들이 보는 앞에서 나와 왕무는 혼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거창한 혼사를 치르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혼사를 마무리 짓고 싶은 것이 왕건의 의중이었다.

그래서 연등회를 마치고 3일 뒤에 양가 식구들만 모여서 간단히 혼인을 치르고 내가 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뭔가 내가 수를 내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짧았다.

* * *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예복을 입은 채 임희, 상산부인, 임연객과 함께 수레를 타고 나주원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가 탄 수레 뒤에는 혼수품을 실은 수레도 따라오고 있었다.

혼인은 나주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진짜 결혼이다. 내가 왕무의 아내가 된다고. 어제 밥 먹고 내가 뭘 했지?’

어제 아침밥을 먹고 대책을 세워보겠다고 이것저것 깔짝거리면서 했던 거 같은데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내가 체감하기에는 1분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결혼을 하러 가고 있었다.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생각을 잠깐 한 것 같은데 나는 상산부인 손을 잡고 나주원 앞에 서 있었다. 나주원 안에 들어서자 역시 예복을 입은 나주 왕후가 오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왕후 마마를 뵙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일제히 예를 갖추자 나주 왕후와 오지수도 정중히 답례를 했다. 오지수는 그 와중에 나에게 한쪽 눈을 깜박이며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눈을 깜박이며 오지수의 장난을 받아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안 났다.

‘눈을 한 번 깜박거렸는데 어느새.’

나는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인을 위해 설치된 단 위에서 왕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내 장남이 이리 혼사를 치르게 됐구나! 상산백, 혼사를 마치면 옛날처럼 술이나 하지! 하하하.”

왕건은 신이 나서 외쳤다.

“예. 폐하.”

왕건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임희가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곁에 앉아 있던 상산부인도 엉거주춤 일어나서 왕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찔끔 났다.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임희와 상산부인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반해 왕건 쪽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양가 식구들만 모여서 간단히 혼사를 치르기로 해서 왕건은 자기 부인들만 다 데리고 온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17명이나 되네. 젠장 내가 처음 개경에 올 때는 14명이었는데.’

견훤에게 몰리고 있는 왕건이 몇몇 호족을 또 포섭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다.

어쨌든 아직 29명의 시어머니가 완성되지 않았고 17명밖에 안 되는데도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자 나는 현기증이 났다.

왕건은 한가운데 앉아 있고 그 좌우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17명의 아내들이 한 줄로 앉아 있는데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충주왕후와 황주왕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주왕후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나머지 부인들도 웃는 사람은 거의 없고 뭔가를 계산하는 표정으로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진짜 무서웠다. 너무나 기괴한 광경이었다.

‘이건 악몽이야.’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나주왕후뿐이었다. 그나마 동양원 부인이 사람들 가운데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노부부 임희와 상산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닐까? 비명을 지르면 꿈에서 깨서 내 침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나는 그 생각에 비명을 한번 질러보려다가 관두었다. 그리고 내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맞은편에서 예복을 입은 왕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예복을 입은 왕무의 모습이 멋있긴 멋있었다.

‘평소에도 멋있긴 했지만 차려입으니 더 대단하긴 하네. 마음을 먹고 꾸민 거니.’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는 기억이 잘 안 났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어도 내 좌우의 시녀들이 나를 보좌하며 혼인 예식을 이끌었다.

나는 그냥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 같았다.

‘절을 몇 번 한 것 같아.’

어렴풋이 그것만 기억나는데 어느새 나는 웬 방안에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밖은 밤이었다. 내가 두리번거려도 임희와 상산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산 방 한쪽에서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고 있는 왕무의 모습이 보였다.

‘안 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왕무의 목젖 쪽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에 목젖을 치는 길만이 남았다.

그러다가 왕무가 예복을 벗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왕무의 나신을 진짜 보는 건가? 근데 목젖을 치려면 눈을 뜨긴 떠야지.’

그 생각에 나는 억지로 눈을 떴는데 왕무는 멀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겉옷만 벗은 거였다.

안에는 따로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보던 왕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왕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제가 비록 오늘 전하와 혼인을 맺기는 했지만 차마 마음의 준비가…….”

나는 우선 무릎을 꿇고 빌어보는 계략을 먼저 시전했다.

‘이렇게 하다가 무릎을 꿇은 나를 보고 방심한 왕무의 목젖을 때린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힐끔 왕무의 동태를 살피는데 왕무 역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연…… 아니, 국선. 일어나시오. 일이 이렇게 되어 나도 정말 민망하오. 정말 국선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일이 이리되니. 다만 지금 폐하께서 어려운 처지이신데 내가 정윤으로서 폐하의 뜻을 거스르면 불충이라 혼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소.”

왕무는 얼굴이 붉히며 말했다.

“저 그럼 전하?”

내가 좀 어이가 없어져서 묻는데 왕무가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우리가 부부가 되긴 했지만 나는 국선을 예로서 대할 것이니 걱정마시오. 오직 국선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오. 자 어서 일어나시오.”

나는 왕무의 그말을 듣는 순간 허탈감에 빠졌다.

‘그냥 손잡고 자자고 무릎 꿇고 빌면 통했던 거였어? 그럼 그동안 내가 왜 설친 거지?’

개경에 오기 전 내가 맨 처음 떠올렸던 계책이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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