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4화
74. 향이 탈 때까지
“자 이제 그럼 일을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다. 이 두 아이의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한다.”
왕건은 성큼성큼 단 위에서 내려와 나와 왕무 사이에 서서 외쳤다. 그리고 왕건은 내 팔과 왕무의 팔을 잡더니 우리 두 사람이 손을 잡게 만들었다. 왕무의 손이 약간 차가웠다.
‘우물 밑바닥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구산사 주변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부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폐하께서 부처님의 진의를 깨달으신 거야!”
“정윤 전하의 혼사다.”
“와아아. 만세, 만세!”
나는 순식간에 진행된 일에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어서 아버지인 임희 쪽을 바라보았다. 임희도 일이 이렇게 되자 아무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긍달이나 황보제공 같은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딱히 나서지는 않았다. 왕건이 한순간에 판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내가 이 혼사를 피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내 뇌리에 지난 1여 년간의 일이 모두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혼사를 피해보겠다고 온갖 곳을 다 뛰어다녔고 고생을 했다. 거기에 유긍달 등과 짜고 혼사를 무산시키기 일보 직전에 일이 이렇게 됐다.
호불호를 떠나 나는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허사가 되자 허탈감에 빠졌다.
“자! 오늘의 연등회는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다시 단 위에 올라온 왕건이 외쳤다. 구산사에 모여 있던 중신들이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유긍달이 이를 악물고 황보제공과 뭔가 대화를 나누며 구산사를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흡족해 보이는 기분으로 구산사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종의 기적을 구경했으니 기쁘겠지. 나와 우리 가문만 어쩔 줄 모르는 처지가 됐구나.’
임희는 구산사를 나서는 다른 중신들을 따라가지 않고 내 곁에 남았다. 동료들의 뒤를 따라 훌쩍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허허허. 아수라장에서 빠져나가 보려고 그리 애를 썼는데 일이 이리됐구나. 폐하의 뜻이 이토록 확고하실 줄은 몰랐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임희 역시 나처럼 허망한 표정이었다. 다만 왕건을 오래 따른 임희답게 왕건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고 체념한 기색도 엿보였다.
‘이런 식으로 혼사가 이루어지다니.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여전히 모포를 두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왕무를 보며 발을 굴렀다.
왕무는 중간에 정신을 차려서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한 것 같았다. 이러면 나와 왕무는 그대로 첫날밤을 치를 판이었다.
거기까지 상상만 해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았다.
“연우야!”
놀란 임희가 나를 살폈다. 왕무 역시 벌떡 일어나서 내 쪽으로 다가오려다가 임희의 모습을 보고 머뭇거렸다.
그때 구산사의 승려 하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폐하께서 상산백과 연우 아가씨는 잠시 머물러 있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장내의 상황이 정리되면 독대를 하시겠다고 합니다.”
“알았다.”
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쉬실 객방으로 안내할 테니 따라오십시오. 갈아입으실 옷도 내오겠습니다.”
승려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모포를 두르고 있긴 해도 여전히 물에 젖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 상태로 왕건을 만날 수는 없었다.
승려의 안내를 받아 객방으로 가니 나를 시중들 시녀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왕건을 따라 구산사까지 수행해 온 시녀들 같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겨우 옷차림을 수습했다.
그리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승려가 와서 말했다.
“이제 폐하께서 두 분을 부르십니다.”
나와 임희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승려의 뒤를 따랐다. 승려는 얼추 정리된 대웅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임시로 설치했던 단은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용호군의 군졸들이 대웅전을 겹겹이 경호하고 있었다.
“상산백께서 먼저 들어가십시오.”
승려가 말했다. 왕건이 독대를 한다더니 나와 임희를 각자 만날 생각인 것 같았다. 임희는 침중한 표정으로 대웅전 안에 들어갔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나는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그런지 임희를 기다리는 시간은 매우 지루했다. 한 30분쯤 지나자 임희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웅전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나에게 말했다.
“연우 너도 들어가 보거라.”
“예.”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섰다.
왕건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 앞에 방석을 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왕건은 자기 앞쪽에 놓인 빈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거라.”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국왕인 왕건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우선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떠냐? 내 계책이? 백성들의 여론을 움직이려는 너와 유긍달의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혼사를 파탄 내는 식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허허허.”
“…….”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연우 너에게 미안하긴 하구나.”
신나게 약을 올리던 왕건이 갑자기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나는 그런 왕건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고 말을 안 하는 나를 보며 왕건도 난감한 기색이었다.
나는 왕건이 더 난감하라고 입을 꽉 다물었다. 왕건은 그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불상 앞에 놓인 향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불상을 보며 말했다.
“고려 국왕으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을 할 때도 많고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 앞에 맹세하니 이 향이 다 탈 때까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더니 왕건은 향에 불을 붙이더니 불상 앞 화로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 내 앞에 놓인 방석에 앉은 왕건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나는 거짓말을 안 하기로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묻거라.”
이 순간 나는 연등회 때 왕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처님의 뜻을 묻는다고 인광을 발라놓은 연등에 물을 뿌린 사람의 맹세인데.’
왕건을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이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웠다.
“폐하께서 제가 꾸미는 모든 일을 다 눈치채고 계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까?”
상황을 보면 나와 유긍달 등도 다 왕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 무슨 수를 써서 알아낸 건지 궁금했다.
“왕창근이 자기 상단의 상거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연우 네가 입술이 트지 않는 연고와 관련된 사업을 지수에게 넘기려는 것을 보고 진작 낌새를 눈치챘지. 아무렴, 내가 지난날 왕창근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거 하나로 궁과 관련된 사업독점권을 내줬겠느냐? 거기에 나는 송악에서 태어났고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았다. 송악, 즉 개경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눈을 피할 수 없다.”
왕건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왜 굳이 저를 정윤비로 택하신 것입니까? 이 혼사를 피하려고 제가 애를 쓴 것은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상산의 세력이 정윤에게 딱 알맞다고 생각해서 너를 택했다. 그 이후에는 네가 권모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상산의 세력이 알맞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진정으로 정윤 전하를 생각하신다면 더 강력한 가문과 맺어주셔야 그 지위가 확고해지지 않습니까? 오지수 공주 마마가 명주와 연결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막으신 것입니까?”
나는 이게 오랜 의문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대담하게 물었다.
“최언위가 아이들에게 전국책을 읽히느냐? 하긴 최언위는 유학자니 그런 책을 싫어하겠지. 어쨌든 읽어보면 재밌는 책이다. 동욕자상증 동우자상친(同欲者相憎 同憂者相親)이란 구절이 전국책에 나오는데 연우 너는 해석할 수 있겠느냐?”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같은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진다. 맞습니까?”
어렵지 않은 한자라 나는 단숨에 해석해냈다.
“정윤이 바라는 바가 유긍달, 황보제공 등과 같기에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것이지. 그러나 유긍달, 황보제공은 나와 바라는 바가 다르고 견훤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이 같아 서로 친근하다. 내가 고려의 다음 왕위를 미끼로 내걸었기에 유긍달, 황보제공이며 여러 대호족들이 고려를 도와 군사를 내는 것이다. 자기 외손주들을 왕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그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만약 정윤에게 명주의 세력을 보태준다면 차기 왕위가 안정된다. 그러면 유긍달, 황보제공이 나를 도울 이유가 뭐가 있느냐? 그래서 내가 지수와 김장명을 일부러 떼어놓았다. 정윤에게는 딱 왕이 될 만한 아슬아슬한 세력밖에 줄 수 없다. 상산의 세력은 한계가 있고 너는 대단히 총명하니 내 뜻에 정확히 부합한다.”
왕건은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본인의 말이 아들인 왕무에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알고 저러는지 모르고 저러는지. 결국 왕무더러 애매한 세력으로 강적들과 싸우란 거 아니야? 상산이 딱 애매한 세력이니 알맞다는 소리를 저리 태연하게.’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가 차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어장관리.”
왕건의 행동을 보니 딱 그 말이 떠올랐다. 무심코 중얼거린 건데 왕건의 귀에 딱 들어간 모양이다.
“어장관리라. 그래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구나. 어부가 어장관리를 하듯이 지금 내가 호족들을 어장관리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거 참. 연우 네가 총명하긴 하다. 앞으로는 괜히 어려운 전국책을 인용할 게 아니라 이 비유를 써야겠다.”
어장관리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흐뭇해하는 왕건을 보니 나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의 혼사로 정윤 전하나 저나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너는 내 시험을 통과해서 괜찮다. 두 사람은 잘살 것이다.”
“시험이라니 무엇입니까?”
그건 또 금시초문이라 물었다.
“우물 바닥에 묶여 있는 왕무를 보고 결국 구하러 가지 않았느냐? 너라면 내가 그 일을 꾸민 것을 어느 정도 간파했을 텐데도 그랬다.”
“그건 일종의 측은지심이었습니다.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데 그렇게 묶여 있는 사람을 그냥 외면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걸 시험이라고 하시면…….”
“지금 왕무 그 아이의 처지가 그와 같다. 외가는 멸문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는 것이 우물 바닥에 묶여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지. 너와 상산백이 과연 그런 정윤을 외면할 수 있겠느냐?”
‘하여간 말은 잘해.’
나는 속으로 그리 투덜거렸다. 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과 상당히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엄청난 기회였다.
‘왕건의 속내를 어느 정도 알아내야 앞으로 뭐라도 하지. 그래도 혼사를 무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나는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정윤 전하께 왕위를 전하시려는 마음은 확실하신 겁니까?”
그런 나를 보며 왕건은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이 꽂아놓은 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참, 내가 너무 긴 향을 잘못 꽂아놨구나. 향이 아직도 저리 많이 남아 있다니.”
나는 힐끔 그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향이 벌써 저만큼이나 탔어. 다 타기 전에 대답을 받아내야지.’
그 생각에 나는 계속 왕건을 독촉했다.
“당연히 견훤을 정리하고 삼한을 통일하면 정윤을 밀어줄 작정이다. 그때 가면 상황이 달라지니.”
왕건은 조심스럽게 그리 대답했다. 이 말이 새어나가면 확실히 난리가 나긴 할 것이다.
하긴 왕건이 삼한통일을 할 수 있을지도 지금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다.
‘당신은 삼한통일을 하고 나서 7년 밖에 못 산다고. 7년 밀어줘 봤자.’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미래 역사를 아는 내가 일을 꾸미면 7년이 긴 시간이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