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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3화 (7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3화

73. 연등에 묻다

나는 비녀를 이용해 밧줄을 모두 끊어냈다. 밧줄이 아주 두껍지는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강철 족쇄가 왕무의 팔에 매여 있었다. 나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왕무의 오른쪽 팔목에 감겨 있는 족쇄를 풀어보려고 만지작거렸다.

덜컥.

그러다가 한순간 그 족쇄가 풀리며 왕무의 팔이 빠져나왔다.

“족쇄가 잠겨 있는 건 아니었구나.”

나는 이를 갈며 왕무의 왼쪽 팔목에 있는 족쇄도 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왕무를 풀어주고 나서 다음 일을 생각할 작정이었다.

다만 그대로 족쇄를 풀면 의식을 잃은 왕무가 동굴 바닥에 주저앉으며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상반신을 드러낸 왕무에게 바짝 밀착하며 껴안은 상태에서 왼쪽 팔목의 족쇄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족쇄가 역시 소리를 내며 풀리자 내 힘만으로 왕무를 지탱해야 했다.

‘에구구. 겉으로는 날렵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 근육이 많아서 그런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왕무의 무게를 버티며 동굴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왕…….”

그러다가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일은 아무리 봐도 왕건이 꾸민 짓인데.’

애초에 동양원 부인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이 삼한 땅에서 왕건 외에는 없었다.

거기다가 상산백의 딸인 나와 정윤인 왕무에게 이런 짓을 하면 후폭풍이 엄청났다. 그 후폭풍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왕건 외에는 없었다.

특히 왕무를 묶고 있는 밧줄이며 족쇄도 누구나 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왕무에게 딱히 악의는 없고 보여주기식으로 묶어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건 짓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거기까지 헤아리고 격노해서 왕건을 욕하려다가 참았다.

‘나와 왕무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 그 사람들 앞에서 왕건을 욕했다가 나중에 보복이라도 당하면.’

그 생각에 억지로 참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속이 아파 왔다.

‘이게 화병인가?’

쓰린 속 때문에 배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내 눈에 동굴 바닥에 누워 잠든 왕무의 얼굴이 보였다. 참 평온해 보였다.

‘왕무 얘도 왕건이랑 짜고 이런 일을 벌인 거 아니야? 지금도 깨어 있는 건 아닌지?’

그 생각에 나는 아예 돌 틈에서 물을 받아서 왕무의 얼굴에 뿌렸다.

“정윤 전하! 정윤 전하! 일어나보세요.”

나는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짐짓 애절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왕무에게 물도 뿌리고 여기저기 힘껏 때리고 꼬집었다.

그런데 왕무는 정말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참을성이 강해도 이 정도는 못 버티는데 진짜 의식을 잃었나 보군.’

그 생각을 하니 허탈해져서 나도 어깨를 늘어뜨리고 동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왕건은 나와 왕무의 혼사를 강행시키려는 거 같아. 하지만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억지로 나와 왕무를 한곳에 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조선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기고 왕무와 단 둘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나는 꼼짝없이 혼인까지 갔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자유분방한 이 시대에는 별별 일이 다 생겼다.

나와 왕무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도 이 시대 사람들은 그 때문에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긍달 등이 백성들을 움직여 혼사를 꺼리는 여론을 만드는 데 성공해서 일이 이리됐다. 왕건이 이런다고 백성들의 여론을 뒤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왕건이 꾸민 일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없는 일에 휘말려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울화가 치밀었다.

“배고파~”

나는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외쳤다. 얼마나 굶었는지 진짜 배가 고팠다.

물론 내 외침에도 응답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기다렸다.

졸졸졸.

그런 내 귀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래 물배라도 채워야지.’

그 생각에 내가 몸을 일으키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동굴 바닥에 물이 얕게 고여서 철벅거리고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지금 어디선가 물이 들어오는데?’

나는 황급히 왕무 쪽으로 달려가서 왕무를 반쯤 업다시피 해서 일으켰다. 왕무를 가만히 뒀다가는 익사할 판이었다.

물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발목까지 차올랐다.

‘설마 왕건이 이 일을 꾸민 것이 아니고 진짜 우리를 죽이려는 계책인 건가? 동양원 부인이 대체 왜?’

겁먹은 나는 그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는데 물 위로 뭔가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공기가 든 커다란 가죽주머니였다.

이 시대에 군사들이 강을 도하할 때 쓰는 기구였다.

가느다란 가죽끈으로 왕무의 허리춤과 연결되어 있었다. 작은 등잔불에 의지하느라 여태 못 봤는데 물이 차오르니 가죽주머니가 떠오르며 보인 것이다.

‘역시 왕건이 꾸민 게 맞네.’

딱 위기가 오면 빠져나갈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왕무를 업은 채로 힘겹게 가죽주머니를 부여잡았다.

차오르는 물 때문에 나와 왕무의 몸은 점점 천장으로 떠올랐다. 등잔은 진작 놓친 지 오래였지만 나는 대강 주변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천장 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보였고 거기에서 들어오는 빛 덕에 나는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저기가 밖이야.’

왕무가 익사하지 않게 보살피며 나는 그대로 그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저녁인 것 같았지만 의외로 환했다.

여기저기 횃불이며 연등이 가득해서 낮 정도는 아니라도 밝았다.

‘우리가 우물 바닥에 있었구나.’

밖에 나와서야 나는 대강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나와 왕무를 몇몇 승려들이 당황해서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두운 동굴 안에 있다가 막 빠져나온 거라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는데 귀에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연우야!”

다름 아닌 임희의 목소리였다. 관복을 차려입은 임희가 놀라서 허겁지겁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임희의 모습을 보니 나는 안심이 되면서 주변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빠져나온 우물 뒤쪽에는 구산사의 대웅전이 있었고 그 앞에 만든 단 위에 왕건과 몇몇 고승들이 앉아 있었다.

대웅전 마당에는 수많은 조정 중신들과 호족들이 관복을 걸치고 도열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건과 중신들을 호위하는 군사들 뒤에는 개경 주민들이 서 있었다.

나이가 많거나 조정과 인연이 있는 개경 주민들은 고려 조정의 초청을 받아 연등회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구산사에 와 있었다.

초청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연등회 의식을 구경하고 싶어 담장 밖에 사다리를 세워놓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와중에 나와 왕무가 우물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왕무를 뚫어지게 바라보니 부끄러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임희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단 위에 앉아 있던 왕건이 외쳤다.

“아니 저건 정윤이 아닌가? 정윤과 상산백의 딸이 갑자기 우물 속에서 나오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왕건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움찔했다.

‘왕건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

내가 왕건의 뻔뻔스러움에 몸서리를 치며 머뭇거릴 때였다. 잡찬 유긍달이 갑자기 나오더니 말했다.

“소신이 보기에 정윤 전하와 상산백의 딸이 무슨 조난이나 사고를 당해 우물에 갇혀 있다가 나온 듯합니다. 이 추운 날씨에 두 사람이 병이라도 걸릴까 봐 걱정됩니다. 어서 쉬게 하시고 연등회 의식을 마저 진행하십시오.”

‘그렇지.’

나는 유긍달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총명한 유긍달은 갑자기 나와 왕무가 우물 속에서 나온 것을 보고 왕건이 무슨 수를 썼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의관은 가서 정윤을 살피도록 하라. 따뜻한 모포도 내와라. 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정윤의 혼사 문제를 마무리 짓겠다. 갑자기 이 두 사람이 우물 속에서 나온 것도 인연이 아니겠는가?”

왕건이 단 위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유긍달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이 10살 꼬마였을 때 이 두 사람은 혼약을 맺었고 그 이후 나를 좌우에서 보좌하며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혼인하는 것이 과연 그른 일인가?”

왕건은 좌우를 둘러보며 호소하듯이 말했다.

“백성들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자 황보제공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민심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임명필 역시 그런 황보제공을 거들었다. 유긍달, 황보제공, 임명필 3명이 나서자 그 힘이 대단하긴 했다.

그 3인과 인연이 있거나 영향력 하에 있는 중신과 호족들이 그들을 은근히 거들었다.

또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정윤 전하와 상산의 혼사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니었어?”

“혼사를 강행하는 것은 불길한 일이 아닌지? 관음보살의 계시가 있다고 했잖아.”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건의 뜻대로 여론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왕건이라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리 왕이라고 하나 백성들의 말과 관음보살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이 혼사에 관해 부처님의 뜻을 묻고자 한다. 이에 동의하는가?”

왕건은 아예 단 위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호족들과 백성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웅성웅성.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의 동요는 더욱 심해졌다.

“부처님의 뜻을 묻는다니 대체 어떻게?”

“아무리 폐하라지만 무슨 수로 부처님께 묻는다는 거지?”

여러 호족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호족들의 대표로 유긍달이 나서더니 말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대답하는 것 외에 답이 없어 보였다.

‘대체 왕건은 어쩌려는 거지?’

나도 왕건의 속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기다렸다. 그사이 의관이 침을 놓고 약을 써서 정윤 왕무를 깨우는 데 성공했다.

“이게 무슨?”

계속 자다가 일어난 왕무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왕건이 명을 내렸다.

“정윤의 머리칼과 연우의 머리칼을 조금씩 베어와라.”

그러자 승려 한 명이 가위를 들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절은 삭발을 하는 곳이라 가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와 왕무의 머리카락 끝을 잘라낸 승려는 그것을 가져가 왕건에게 바쳤다.

나를 포함해 모두는 왕건이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숨을 죽이며 바라봤다. 백성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왕건은 나와 왕무의 머리칼을 받아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고려 국왕 건이 연등을 통해 부처님의 뜻을 묻겠습니다. 이 두 사람의 혼사를 진행해도 되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더니 왕건은 우리 두 사람의 머리칼을 그대로 구산산 대웅전 현판 바로 앞에 걸려 있는 연등 하나에 넣었다. 머리칼이 타는 소리와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왕건이 명을 내렸다.

“용호군의 군사들은 저 우물의 물을 떠서 이 구산사에 걸려 있는 연등에 뿌려라. 부처님의 뜻을 알아야겠다.”

그러자 용호군의 군졸들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표주박을 하나씩 꺼내며 외쳤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용호군의 군사들은 연습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우물의 물을 떠서 연등에 뿌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연등은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군졸들이 표주박을 준비한 것도 그렇고 왕건이 이 모든 것을 미리 꾸며놨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해서 일이 어찌 진행되나 지켜보았다.

수백 명의 군졸들이 기민하게 움직이니 어느덧 구산사 안의 연등은 대부분 꺼졌다.

절 안이 약간은 어두워졌다. 그래도 군졸들이 가져온 횃불이 많아서 여전히 사물을 식별하는 것은 가능했다.

어느덧 왕건이 우리들의 머리칼을 넣은 연등 하나만 빛나고 있었다.

“표주박에 물을 담아 가져오라.”

왕건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표주박을 든 왕건은 연등 앞에 가서 다시 외쳤다.

“부처님! 아이들의 혼사를 어찌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더니 왕건은 주저 없이 표주박의 물을 연등에 뿌렸다. 그 순간 주변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연등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구경을 하고 있던 백성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대사께서 해보십시오.”

왕건은 단 위에 있는 다른 고승들에게 말했다. 고승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일어나 표주박을 들고 물을 뿌렸다. 그러나 연등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저건 인광이다!’

나는 연등을 보고 진상을 깨달았다.

‘이미 비밀통로 안에서 작제건이 남긴 책자를 왕건도 봤을 테니 왕건도 비밀을 푸는 방법을 알게 됐다. 버드나무의 인광에 대해서도 그 와중에 알게 됐지. 버드나무의 인을 채취해서 연등에 발라놓은 거야. 그러니 물을 부어도 오히려 더 빛날 수밖에.’

정말 왕건은 현대인인 나도 짐작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연출력도 탁월했다.

왕건의 지시에 따라 대웅전 근처에 있던 횃불들을 군졸들이 재빨리 가지고 물러났다. 대웅전 주변이 어두워지며 그 현판 앞에 걸린 연등만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와아아아아. 부처님의 뜻이 드러났다.”

“나무아미타불.”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호를 외치면서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고 연등을 향해 절을 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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