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2화
72. 관등
“그런데 우리 연우 혼사는 뭐 끝난 건가요? 분위기상 안 되는 것 같긴 한데. 뭔가 어중간해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상산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혼사가 안 되는 것은 맞는데. 또 폐하께서 나서서 이 혼사는 끝났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겠소? 흐음. 과연 폐하께서 어찌하실지.”
임희도 밥을 먹다 말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개경 시내에는 파혼이 된 것처럼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연우가 더 이상 나주원에 가지 않는 것도 사람들이 소상히 알고 있고요. 공식적인 선언 여부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리 자연스럽게 혼사가 흐지부지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연우야 너는 괜찮니?”
임연객도 껴서 한마디 하다가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어? 뭐 나는 괜찮지.”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임연객의 말에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나는 어제 있었던 동양원 부인과의 데이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 * *
동양원 부인은 새로 지어진 구산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참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좋네요. 앞으로 연우 아가씨는 궁에 들어오기 어색할 테니 종종 밖에서 만나요.”
“알겠습니다. 부인.”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동양원 부인은 내가 꼭 정윤비라서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구나. 혼사가 사실상 파토 난 지금도 나를 만나고 약속까지 잡고.’
동양원 부인은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곧 있을 연등회 전날 이 구산사에서 함께 연등이나 구경해요. 연등회 당일이야 사람이 워낙 많을 테니 나올 수가 없고. 전날에도 연등은 달아놓았을 테니 그거라도 구경해요.”
“그런데 올해는 연등회가 좀 축소돼서 열릴 참이라. 연등도 볼 게 없을 거 같네요.”
그 정보를 알고 있는 나는 동양원 부인에게 말했다.
“뭐 별수 있나요?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죠.”
동양원 부인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김악 이 나쁜 놈! 너 때문에 하필 동양원 부인이 큰맘 먹고 연등 구경을 나왔을 때 행사가 축소됐어!’
나는 내심 연등회 축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악을 탓하며 동양원 부인과 헤어졌다.
* * *
그런데 멍하니 있는 나를 임연객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요 근래 연우 네가 통 밥을 못 먹는 거 같아서.”
나는 그 말을 듣고 내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동양원 부인을 생각하느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것 같았다.
“아 먹어야지.”
나는 억지로 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었는데 막상 먹으려니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어쨌든 대강이나마 식사를 마치고 나는 평소처럼 학관에 나갔다.
그리고 한동안 집, 학관, 한림원을 쳇바퀴처럼 도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참 단조롭긴 하네.’
나는 이런 생활에 살짝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공산 전투 이후 개경에 와서 지낸 1년여간 너무 이리저리 뛰며 보냈다.
‘1년 사이에 온갖 곳을 다 헤집고 다녔지. 그래서 그런지 요새처럼 조용한 게 어색하네. 혼사에 관한 소문이 돌긴 하지만 그 외엔 일이 없으니.’
지난 1년을 떠올리며 나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현대에 있을 때도 별 여행을 안 하던 내가 이 시대에 와서 혼사를 피해보겠다고 서경이며 부석사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앞으로는 이 조용한 삶에 익숙해져야지.’
그러는 사이 어느덧 개경 이곳저곳에 연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연등회 준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동양원 부인과도 곧 만나겠네.’
나는 그 약속을 되새기며 연등을 걸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 *
“쩝 올해 연등회는 정말 볼 게 없다. 이럴 거면 차라리 열지를 말지.”
상산저의 누각에서 개경 시내를 내려다보며 임연객이 투덜거렸다.
“꽤 볼만한 거 아니야?”
나는 온 시내에 걸린 연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등회를 축소할 거라는 왕건의 말을 진작 들은 나는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온 개경 시내에 연등이 걸려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럴듯했다.
“아, 연우 너는 연등회를 본 게 처음이구나. 작년 연등회 때는 나랑 같이 서경에 가 있었으니. 이건 진짜 초라한 수준이야. 원래 돈 좀 있는 호족들이며 중신들이 온갖 형상의 연등을 내걸어 서로 경쟁하는 행사도 있었어. 동물이며 꽃모양 연등은 기본이고. 에휴 올해는 진짜 구색만 갖춘 수준이야. 달랑 하루만 하고 보통 연등만 여기저기 걸어뒀으니.”
병부의 관리로서 개경에서 오래 지낸 임연객이 그리 말했다.
“올해야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 나도 성대한 연등회 행사를 볼 수 있겠지.”
“그야 남쪽의 싸움이 좀 잘 풀려야 연등회도 크게 열고 하는 건데. 내년에는 또 어찌 될지?”
병부의 관리인 임연객은 견훤과의 싸움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년이면 일이 다 잘 풀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건 그렇고 나는 연등회 전날 약속이 있어서 늦을 수 있어.”
“누구랑?”
“동양원 부인이랑 구산사에서 만나기로 했어. 이미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어쨌든 걱정하지 말라고 오빠한테도 말해주는 거야.”
신례 때 이후 내가 집에 늦게 돌아오는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나는 동양원 부인과의 약속에 대해 소상히 일러주었다.
“동양원 부인이라. 좋지. 유금필 장군과의 친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니. 약속 잘 잡았다. 그런데 왜 굳이 연등회 전날 약속을 잡아? 아무리 초라해도 연등회 당일이 볼 게 많을 텐데.”
임연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양원 부인이 너무 번잡한 건 싫어하셔.”
“그럼 연우 너는 연등회 당일에는 나랑 같이 구경이나 가든지.”
“됐어. 뭐. 동양원 부인과 놀고 당일에는 쉴래.”
나는 임연객에게 그리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연등회 당일에는 신나게 돌아다닐 기분이 안 들었다.
* * *
연등회가 다가오자 학관 분위기는 또 팔관회 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연이은 견훤의 승리로 인해 학관에 다니는 호족 자제들의 분위기는 암울했었다.
그런 만큼 연등회 같은 축제에 빠져 도피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무단결석을 하는 학생들 수가 엄청났다.
“사정상 그럼 연등회 날까지는 수업을 아예 쉬겠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오지 않은 교실을 바라보며 최언위는 힘없이 그런 선언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연등회가 다가오자 매일 한림원에 오는 왕건이 약간은 기운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은 자주 패했지만 올해는 마음을 가다듬고 견훤을 박살 내겠다.”
왕건은 한림원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그런 말을 하며 사벌주 인근의 자료를 찾아오라고 학사들에게 시켰다.
사벌주 인근을 굳게 수비해 볼 각오인 것 같았다.
‘올해까지는 고생을 더 해야 할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왕건도 다시 마음을 잡고 하느라고 한림원 한쪽에 처박혀 있는 나에게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연등회 전날이 되었다. 온 개경 시내가 연등으로 가득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옷을 차려입고 구산사로 향했다.
“왔군요.”
동양원 부인은 구산사 대웅전 앞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부인. 그런데 연등회 전날인데도 사람이 없네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동양원 부인과 시녀들, 호위군졸들 그리고 나 외에는 몇몇 승려들만 돌아다닐 뿐이었다.
“구산사는 아직 정식으로 연 절이 아니에요. 내일 연등회 날 정식으로 절이 열리고 사람들을 받을 예정이랍니다. 폐하께서도 중신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연등회 의식을 치를 거고요. 그래서 한적하죠. 내가 힘을 좀 써서 정식으로 열리기 전에 우리가 이 구산사를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조용해서 좋지 않나요?”
동양원 부인이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조용하고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동양원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절 대웅전 뒤쪽에는 작은 전각이 하나 더 있어요. 뭔가를 모실 예정이라는데 아직 아무도 모르죠. 그 전각을 구경할래요?”
동양원 부인은 은근한 어조로 권했다.
“둘러보고 오죠.”
나는 무조건 동양원 부인이 하자는 대로 따를 작정이었다. 과연 동양원 부인의 말대로 대웅전 뒤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확실히 볼만한 건물이었다.
‘규모는 작은데 대웅전보다 더 공들여 정교하게 만든 느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양원 부인과 함께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전각 한쪽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동양원 부인이 슬며시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동양원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연우 아가씨. 조금만 고생을 해요.”
“예?”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서 되묻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덜컥
그리고 한순간 내 발밑이 꺼졌다.
‘무슨 싱크홀이야?’
내가 이 후삼국 시대로 빙의할 때 겪었던 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뭘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발아래 생긴 구멍으로 빠져버렸다. 그 순간 나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
* * *
나는 어둑한 곳에서 문득 눈을 떴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한숨 푹 자다가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은 이상하게 멀쩡했다.
“추락을 한 것 같은데 왜 다친 곳이 없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몸을 살폈다. 몸이 멀쩡한 것이 더 찜찜했다. 아예 어둡지는 않았다. 벽 한쪽에 조그마한 등잔이 걸려 있었다.
그 등잔불에 의지해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슨 동굴 비슷한 곳인데?”
나는 위쪽을 바라보았는데 위쪽에는 구멍이 없었다.
‘내가 빠진 구멍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 내가 기절한 사이 누군가가 나를 옮긴 건가?’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동양원 부인! 동양원 부인!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는 목이 쉴 때까지 외쳤는데 아무 답이 없었다.
“진짜 나는 저녁에 약속을 잡으면 안 되는 건가? 신례 때도 그렇고. 집에 일찍 안 가면 꼭 이런 일이?”
나는 탄식하며 등잔을 들어 올렸다. 어쩔 수 없이 한번 이 동굴을 둘러볼 작정이었다.
‘가족들에게 내가 구산사에 온다는 것을 자세하게 말해뒀으니 반드시 나를 찾으러 올 거야. 너무 걱정하진 말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을 걸었다. 이 동굴은 진짜 좁았다. 폭도 2명 정도가 걸으면 꽉 찰 수준이었다. 좁아서 더 무섭고 갑갑했다.
‘이쪽으로 가면 동굴이 점점 넓어진다.’
나는 오락가락하다가 문득 그것을 눈치챘다. 갑갑함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동굴이 넓어지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나는 뭔가가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설마 신례 때처럼 이 동굴에도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나는 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대처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다.
그곳에 당도하자 돌 틈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졸졸 흘러내리기는 해도 그 양이 많지 않았다. 이 동굴 안을 가득 채울 양은 절대 안 됐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른데 잘 됐군.”
나는 두 손을 돌 틈에 가져다 대서 물을 받아 마시려고 등잔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동굴 벽 쪽에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뭔가 커다란 형체였다.
“맙소사.”
등잔을 들고 그쪽으로 가까이 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름 아니라 정윤 왕무가 동굴 벽에 매달려 있었다.
양쪽 팔은 동굴 벽과 연결된 강철 족쇄에 매여 있었다. 또 상반신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왕무의 윗옷은 어디로 갔는지 상반신을 다 드러낸 채로 있었다.
나는 뭔가 엄청난 음모가 있을 거란 예감을 받았다.
“정윤 전하!”
나는 우선 왕무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왕무가 기절한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짝!
나는 있는 힘껏 왕무의 뺨을 쳤다. 왕무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뺨을 맞아도 왕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무가 기절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뭘 어찌해야 할지.”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기절한 채 묶여 있는 왕무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우선은 밧줄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등잔불을 가져다 대서 밧줄을 반쯤 태웠다.
그리고 머리에 꽂고 다니는 비녀를 뽑아 반쯤 탄 밧줄에 문질렀다.
그러자 밧줄이 한 가닥씩 끊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