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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1화 (71/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1화

71. 구산사

내가 왕창근의 상단에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왕 노인이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납품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왕 노인이 약간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상인답게 확실히 납품 걱정만 하고 나를 둘러싸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소문에 관해서 묻지는 않았다. 그 태도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밀랍처럼 연고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재료들은 앞으로 나주원에 납품을 해주세요. 1년 어치 재룟값은 제가 대겠습니다. 앞으로 나주원의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연고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실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왕 노인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1년 치 재룟값을 선불로 내실 겁니까? 아니면 후불로 내실 겁니까?”

“선불로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어차피 나는 나주원과 인연이 끊어질 판국이라 오지수에게 선물로 립밤 사업을 넘기려 하는 것이다.

1년 치 재룟값도 미안해서 내주는 것이다.

‘후불로 내면 또 그때 가서 복잡하게 얽힐 수 있으니 선불로 내서 끝내자.’

나는 단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1년 사이에 밀랍값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선불로 내실 거면 가격을 좀 넉넉하게 받아놔야겠습니다.”

왕 노인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은제련소 관련해서도 이 상단에서 납품을 받고 있는데 좀 깎아주셔야죠.”

나는 선불로 하면서도 비싼 돈을 내기는 싫어서 그렇게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왕 노인이 굽신거리는데 나는 문득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좋은 생각이 났다.

“좋은 정보를 하나 얹어 드릴 테니 밀랍값을 좀 깎아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보라면?”

왕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있을 연등회와 관련된 정보입니다.”

“연등회라.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한 달도 채 안 남았습니다. 허허”

날짜를 계산하던 왕 노인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순간 놀랐다.

‘그럼 팔관회가 끝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말인가?’

중간에 일이 많아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

‘왕무도 한 달 동안 못 만났군. 나주원에서 오씨 일족의 장례 때 잠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왕무는 정윤이라서 일이 많아서 원래 자주 만나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나주가 무너지면서 왕무가 한동안 장례도 도맡아 치르고 그 뒷수습을 다해야 했다. 그 이후에는 내 혼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도무지 만날 겨를이 없었다.

‘왕무는 팔관회 때 내 공연을 어찌 생각할지? 그 소감 정도는 듣고 싶었는데.’

문득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약한 생각을 했다. 이제 왕무와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비밀통로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왕무에게는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만큼 마무리도 깔끔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순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인연이 끊어지다니. 그러나 지금 이리 소문이 무성할 때 내가 다시 왕무와 만나면 또 무슨 말이 돌지 몰라. 부질없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연등회에 관한 정보인데 들으실 것입니까? 아닙니까?”

나는 잡념을 떨쳐내고 왕 노인을 은근히 압박했다.

“총명한 연우 아가씨께서 정보라고 하시면 확실히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좋습니다. 정보를 받겠습니다.”

왕 노인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계약서의 밀랍 가격을 적는 부분에 적당한 가격을 써놓고 나에게 보여줬다.

“올해 연등회는 그 규모가 줄어들 것입니다. 연등 재룟값도 조만간 폭락할 거예요. 그러니 오늘 연등 재료 같은 것을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방금 얻은 따끈따끈한 정보를 왕 노인에게 주었다. 왕건과 김악이 연등회를 두고 한 말을 내가 직접 들었다.

‘내일쯤에 왕건이 어전에 가서 연등회에 관해 중신들에게 알릴 거고 곧 개경에 소문이 퍼지겠지. 이 정보를 하루라도 일찍 알면 손해를 안 볼 수 있다. 정말 고급 정보를 얻는 이 맛에 한림원에 다니는 거지.’

왕건이 던지는 농담이나 실없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 시대의 특급 정보인 것이다.

‘혼사가 파토 나도 한림원 직원 지위는 유지가 되겠지? 에잇 한림원에서 나오게 돼도 상관없어. 파혼이 되면 조용히 살면 되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사실이라면 엄청난 정보입니다. 아가씨를 믿고 움직여야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왕 노인은 재빨리 상단에서 부리는 사람 몇 명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연등 재료 같은 것을 처분하라고 명을 내리는 것 같았다.

왕 노인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기다렸다가 나는 말했다.

“그럼 계약을 마무리하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일이 다 끝났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팔관회 때 아가씨께서 선보인 시는 아가씨께서 지으신 것입니까?”

왕 노인이 계약서를 완성하면서 물었다.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시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역시 내가 너무 과하게 힘을 줬던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인을 만나 그 시를 들었습니다.”

“연우 아가씨께서 선보인 시는 삼한 땅이나 당나라에서 못 보던 것이었습니다. 참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풀립니다. 그 기인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왕 노인은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는지 캐물었다.

“어렸을 때 잠깐 본 분이라.”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흘렸다.

“그때 그 기인의 시는 참으로 놀라운 면이 많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도저히 지금 시대에 나올 수 없는 시가 나온 것입니다. 한문을 빌렸지만 사용된 시어나 구성이 삼한 땅의 기풍을 드러내고 당시의 관습을 과감히 무시하면서 격조가 있습니다. 저는 삼한 땅의 문사들이 수백 년은 고심하고 고민해야 그런 시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시가 이미 당세에 나오다니 놀랄 뿐입니다. 글이란 것도 혼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생각을 보태야 발전하는 것인데…….”

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왕 노인은 적지 않게 흥분된 기색으로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기인으로부터는 시 몇 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가 몇 수 더 있단 말입니까?”

왕 노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왕 노인과 의논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에 관해 돌고 있는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제가 한 여러 활약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는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듣긴 했습니다.”

“일찍이 저는 부석사에서도 희랑 대사와 인연은 맺은 바가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희랑 대사께서 계신 해인사에 한번은 가서 예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예물을 마련할 때 상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가씨께서 우리 상단을 이용해 주시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희랑 대사께서는 검박하시니 그런 선물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왕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나중에 왕 노인께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왕 노인에게 길게 읍을 하고 상단을 나섰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수레에 올라서 그대로 상산저로 향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상산저에 들어서자마자 하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동양원에서 사람이 와서 지금 아가씨에 서신을 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양원에서?”

나는 깜짝 놀라서 동양원에서 온 사람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곧이어 내가 얼굴을 아는 동양원의 시녀가 다가와서 내게 예를 갖추며 서신 하나를 바쳤다.

‘그러고 보니 동양원 부인에게도 그동안 너무 무심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신을 펼쳤다.

-연우 아가씨와는 인척이 되어 계속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세가 변하며 혼사를 진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가씨와의 인연도 이리 끝난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네요. 서신으로는 말을 다 전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 궁궐 인근에 새로 지어진 구산사라는 절에서 유시 즈음에 아가씨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시면 아가씨께서 한림원의 일도 다 끝낼 시간 아닌가요? 만나기 어렵거나 시간을 바꾸고자 한다면 내가 보낸 시녀에게 알려주세요.

동양원 부인이 정갈한 필체로 서신을 보내왔다.

‘그래 왕무와의 혼사가 끝난다고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인간관계를 다 저버릴 필요는 없어. 동양원 부인과도 인연을 이어나가고 배수현도 그렇고.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지수와도 일이 잠잠해지면 만나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양원의 시녀에게 말했다.

“구산사에 유시에 갈 거라고 부인께 전하세요.”

다음 날 나는 약간은 설레는 기색으로 학관에 들어섰다. 동양원 부인과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배수현은 좀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제 폐하께서 너에게 더 이상 나주원에 머무르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게 정말이니? 아니지?”

그 사이에 정보가 흘러나간 모양이었다.

‘하긴 수많은 한림원 학사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으니. 학사들 중 다른 호족들과 연이 있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했겠지.’

“맞아. 폐하께서 그런 명을 내리셨어.”

나는 일부러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관의 다른 아이들도 모두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왕건이 나에게 나주원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명을 내린 의미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왕건 역시 지금 개경에 이는 소문을 무시하고 혼사를 강행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럴 수가.”

배수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웅성웅성.

다른 아이들도 내 말을 듣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폐하마저 저러시면 소문대로 혼사는 끝나는 건가?”

“애초에 수많은 사람들이 혼사를 하면 안 된다고 여기는데. 아마 정윤 전하께서는 다른 가문과 인연을 맺으시겠지.”

“그럼 연우는?”

학관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많이 절망한 기색의 배수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나보다는 연우 네가 더 힘들 텐데. 정윤 전하와 이렇게 끝나는데 연우 너는 어떻게 버티려고.”

배수현은 오히려 나를 껴안으며 위로를 건넸다. 아마 내가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애초에 내가 혼사가 싫어서 일을 꾸민 건데. 배수현이 미안하게 착각을 하네. 그래. 어쨌거나 정말 끝이구나.’

나는 먹먹한 기분으로 배수현을 끌어안았다.

한림원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왕건은 암울한 표정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군사를 배치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학사들을 시켜 견훤의 진격로 주변의 지도와 자료들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견훤이가 좀 급사라도 해줘야 하는데.”

오늘도 왕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지도만 매만지다가 결국 머리를 감싸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 덕에 오늘 내 일도 일찍 끝났다. 나는 황급히 수레에 올라 구산사로 향했다. 구산사 앞에 당도하자 몇몇 승려들과 인부들이 절의 기와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서 절의 대웅전 쪽으로 향하니 동양원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시녀들과 호위하는 군졸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부인!”

나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연우 아가씨. 그러고 보니 궁 밖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동양원 부인이 내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우울한 기분은 나아지셨나요?”

팔관회 전에 만났을 때 동양원 부인의 침울한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야 잠깐 그런 거죠. 안 그래도 기분도 풀 겸 새로 지어지는 이 구산사를 구경하러 나오면서 연우 아가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다행이에요.”

“같이 절 구경이나 해요. 개경에 절이 많은데 또 이런 큰 절을 짓네요. 연우 아가씨 그거 아세요? 왕숙께서 이 절을 갑자기 짓기 시작하며 아주 정력적으로 뛰셨어요. 원래는 그런데 돈을 쓰는 분이 아닌데. 연우 아가씨가 개경에 왔을 무렵이네요. 그때부터 왕숙께서 나서서 절을 지었죠. 그래서 한번 구경하러 왔는데 어마어마하네요.”

동양원 부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왕숙이면 왕평달인데? 그러고 보니 비밀통로에서 수습한 저민의의 유골을 조용히 안장했다고 들었다.

대대적으로 떠들어대면 신라와의 외교관계가 파탄 나니. 왕평달이 그게 안타까워서 그런지 자기 어머니인 저민의를 위해 이 절을 지었구나.’

나는 짚이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원 부인에게도 이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이건 기밀이라서 말을 못 해줘서 너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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