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0화 (70/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0화

70. 파혼

소문의 힘이란 대단했다.

‘솔직히 딱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나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객관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소문이라도 유긍달 등이 세력을 동원해 계속 떠들자 어느새 이 시대 사람들에겐 그럴듯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맞아. 그러고 보니 상산의 그 아가씨가 부석사에 가서 화엄종과도 인연을 맺었지. 선묘 아가씨가 강림하셨다는데.”

“화엄종 사람들이 관음보살을 숭상하지. 근래 관음보살이 상산의 국선과 관련된 계시를 내린 이유가 있었군. 아귀가 딱 맞아.”

좀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해석을 덧붙이며 나에 관한 소문은 더욱 그럴듯해졌다. 원래 내가 지난날 했던 활약을 보통 백성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팔관회의 국선 선발 이후 내 명성이 높아지고 이번 소문까지 퍼지면서 예전에 내가 했던 활약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었다.

‘유긍달이 거기까지 헤아리고 기획을 한 거겠지. 이런 걸 보면 조선시대 왕들이 왜 유언비어나 이상한 노래, 관상 같은 것에 몸서리를 치며 과민반응을 했는지 알겠네.’

역사책을 읽다 보면 조선시대에 이상한 노래, 참요를 퍼뜨렸다고 사형까지 내리는데 확실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근대 시절에는 이런 걸 이용해서 얼마든지 여론을 뜻대로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왕건의 왕권이 굳건하면 그냥 다 때려잡겠지만 지금은 고려가 건국된 지 10년을 좀 넘긴 시점이고 견훤에게 연전연패해서 궁지에 몰려 있으니. 감히 왕건이 이 소문의 배후를 파헤치지 못하겠지.’

어느덧 나에 관한 소문은 온 개경에 다 퍼지고 있었다.

‘정윤과의 혼사가 강행되면 개경의 백성들이 축복하지 못하고 불길하게 여기는 그런 혼인이 된다. 여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왕건이 이 혼사를 강행할 수 없는 상황이지. 이제는 진짜 내 뜻을 이뤘다. 끝난 거야.’

개경의 여론을 살피던 나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이 임연우의 몸에 빙의하고 나서 결혼을 피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갖 일을 다 겪었다.

그렇게 애를 쓰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니 나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래서인지 입맛도 없었다. 매일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밥이 잘 안 넘어갔다.

“연우야, 괜찮니?”

상산부인은 예리하게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채고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정윤 전하와의 혼사는 피하게 된 거 같아 다행이지만 요사이 도는 소문이 예사롭지 않아요. 우리 연우의 혼삿길이 앞으로도 영영 막히는 것 아닌가요?”

상산부인은 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예 혼인을 안 하는 게 내 진정한 소원인데 오히려 잘 된 거죠.’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임희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정윤 전하와의 혼사가 깨지면 향후 몇 년간은 자중하며 다른 혼사를 추진해서는 안 되오. 정윤 전하와 혼사를 깨놓고 바로 다른 가문과 이어지는 것은 정윤 전하를 모욕하는 거니. 길게 한 4~5년 쉬어간다고 생각합시다. 4~5년 뒤에는 어차피 사람들이 이 소문도 모두 잊고 연우의 혼사에 관심이 없을 거요.”

노련한 정치가인 임희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머. 4~5년이라니! 그럼 우리 연우가 20살이 넘어서 혼인을 하게 생겼네요. 이를 어째.”

상산부인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상산부인이 보기엔 너무 늦은 결혼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오. 가문이 곤경을 피한 값이라고 생각해야지.”

임희도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4~5년 사이에 또 수를 내서 빠져나가야지.’

나는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궁리를 했다.

* * *

개경 전체에 퍼진 광범위한 소문 덕에 혼사가 깨져나가는 것은 좋았지만 나는 길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했다.

‘진짜 내가 지나갈 때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보네. 그냥 학관이며 한림원이며 안 가고 상산저에 틀어박혀 있고 싶은데.’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으니 당연했다. 다만 나는 학관도 왕건의 명으로 다니는 거고 한림원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대로 안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학관에 도착하자마자 배수현이 나에게 황급히 다가왔다.

“연우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너에 관해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 너가 정윤 전하와 혼인하면 큰일날 거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파혼 얘기까지 돌고 있어.”

배수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거 같은 표정이었다.

‘아마 배수현이 제일 놀랐겠지. 정말 난감하군.’

나도 가슴이 아팠다. 유긍달, 황보제공 등과 결탁해 이 혼사를 깨려고 한 건 나인 것이다.

정윤파이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도와줬던 친구 배수현을 배신한 거나 다름없다는 막연한 죄책감 때문에 나도 괴로웠다.

그러나 어쨌든 이 혼사는 피하는 게 순리였다.

‘남자의 마음을 가진 채 왕무를 사랑할 수도 없는데 혼인을 하는 건 나에게도 고통이지만 왕무에게도 엄청난 해를 끼치는 거야.’

결국은 내 판단이 옳았다. 그래서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관음보살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 그게 도리고.”

나는 소문을 믿는 척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연우야. 그걸 따른다니. 그럼 정윤 전하는 어떻게 되겠어? 이럴 게 아니라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그래 연우 너는 예전에 최승우도 이겼잖아. 여러 곤경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빠져나갔어. 이번에도 그러자. 나도 도울게.”

배수현은 발까지 구르면서 말했다.

“민심이 이렇다면 나도 방법은 없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유긍달, 황보제공 등은 여론조작으로 민심을 일으켰다. 이 단계까지 오면 민심을 함부로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배수현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너무 마음 쓰지 마. 다 잘 될 거야.”

나는 그런 배수현을 가볍게 껴안으며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학관 수업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공부가 잘 안 됐다. 모든 학생들이 나를 힐끗거리며 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1~2달만 참자. 참아. 그러면 다 끝난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학관 수업을 마치고 최언위를 따라 한림원으로 갈 때도 씩씩하게 걸어갔다.

“연우 아가씨…….”

그런 나를 보며 최언위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끝을 흐렸다. 최언위 역시 지금 온 개경을 뒤덮은 소문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한림원에 들어섰는데 왕건은 나를 보자마자 외쳤다.

“연우야. 이를 어떻게 해야 하니?”

“무엇을 말씀입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왕건의 어조에 나는 좀 놀랐다.

“네가 혼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소문으로 난리도 아니다. 이미 어전에서도 중신들이 조심스럽게 그에 관해 말하니 참 난감하구나. 이 시국에 백성들의 뜻을 함부로 거스를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데.”

왕건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그런 왕건의 모습의 주위에 있던 최언위 등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천명이 그렇다면야 따르는 것이…….”

나는 고개를 숙이며 애매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태연한 건 왕건밖에 없군. 왕건이 지금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는데.’

이미 언급했지만 왕건은 궁예 정권을 멸망시킬 때 노래며 예언 같은 온갖 여론 조작의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지금 돌고 있는 소문이 인위적인 것이고 배후가 있다는 것을 여론선동의 달인 왕건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런 왕건이 저렇게 나오니 그 속내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연우 너한테 너무 손해인 소문 아니냐?”

왕건은 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예?”

내가 당황해서 반문하는데 왕건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평범한 연우 네가 절세미남인 정윤과 혼약을 맺었는데 너한테 엄청 이득인 혼약 아니었느냐? 그런데 그게 이리되다니. 연우 네가 나라를 위해 공도 많이 세웠는데.”

“…….”

왕건의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왕건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연우 너에게 한 달에 1주일은 나주원에 가서 머무르라고 명을 내렸는데 우선은 그 명을 취소해야겠구나. 나주원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어수선하기도 하고. 들락날락할 상황이 아니니.”

“명을 받듭니다.”

나는 왕건의 그 명을 듣고 왕건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왕건도 혼사에서 발을 빼려고 하는군. 하긴 지금 상황에서 어쩔 수가 없겠지. 왕건 본인의 체면을 차리면서 혼사를 무르려는 수순이야. 나보고 더 이상 나주원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명령이 주는 신호는 명백하지.’

하긴 애초에 유긍달 등이 번거롭게 여론 조작의 과정을 거쳐 내 혼사를 파토 내려 한 것도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유긍달 등이 노골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상산과의 혼사를 무르라고 왕건에게 말하면 그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왕건이 호족들에게 굴복한 것이 된다. 왕건이 격노해서 대호족들과 정면대결할 수도 있고. 그러나 중간에 관음보살이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커지지.’

왕건 입장에서도 관음보살 얘기를 믿는 척하며 백성들의 뜻이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형식으로 호족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왕건은 민심을 따르는 왕이 되고 체면도 깎이지 않았다.

왕건의 명을 보면 그 수순을 밟아 일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최언위를 비롯한 한림원의 다른 학사들도 그런 왕건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간파한 것 같았다. 모두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그때 김악이 불쑥 나서서 말했다.

“폐하. 팔관회가 끝나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덧 또 연등회가 코앞입니다. 아니 이리 나라가 어려운데 놀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이번에 연등회는 좀 조치를 취하십시오.”

김악은 주변 상황이 어찌 돌아가든 자기 관심사만 중요한 모양이었다. 팔관회는 11월 15일에 열리는 행사고 연등회는 1월 15일에 열리는 행사였다.

확실히 간격이 짧아서 팔관회가 끝나고 여러 소란이 이는 와중에 연등회도 다가온 것이다.

‘또 김악이 면박을 당하는 거 아닌가?’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흠. 확실히 이번 연등회는 부담이 되긴 하는군.”

그런데 왕건은 뜻밖에도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확실히 상황이 안 좋아지니 왕건도 태연한 척하기 위해 축제를 여는 것이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와! 당장 이번 연등회는 취소하십시오.”

김악은 두 팔을 들어 환성까지 지를 태세로 권했다.

“취소까지는 그렇고 연등회 행사는 많이 축소해서 하루 만에 그냥 끝내야겠다. 재정도 부담이 안 되도록 해야 하고. 그냥 내가 중신들과 의장대를 거느리고 절에 가는 것만 해야겠다. 그에 관한 절차들을 좀 준비하라. 어전에서 중신들에게 그리 알려야겠다.”

왕건이 그런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김악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김악의 의견이 어느 정도 수용된 것이다.

* * *

한림원에서의 일도 마치고 나는 즉시 집에 가지 않고 볼일을 좀 보고 가기로 했다.

“왕창근의 상단에 들렸다가 가자.”

나는 수레 위에서 군졸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오지수에게 립밤 사업은 넘겨주기로 해놓고서도 제대로 일을 마무리 못 했어. 왕창근의 상단에서 일처리를 하고 가야지.’

왕창근의 상단에서 재료를 납품받아서 립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오지수에게 이 사업을 넘겨주려면 이쪽에도 미리 말을 해놔야 했다.

‘한 1년 정도는 오지수가 무상으로 립밤 재료를 받을 수 있게 처리해 놔야겠다. 그리고 다음번에 만날 때 이 사업을 넘겨준다고 말을 해줘야지. 에휴, 오지수는 또 어떻게 만나야 할지.’

파혼 소식을 듣고 오지수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제일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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