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9화
69. 꿈
“폭도들이 집 앞에서 떠들고 있었을 때가 차라리 나은 것 같구나!”
아침식사를 하던 임희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상산부인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어곡성을 지키던 장수들의 항복 소식은 개경 주민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항복한 장수들의 가족은 모두 개경에 있었는데 처형당했다. 왕건으로서도 그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왕건이 머뭇거렸다면 고려의 동요는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처형을 해도 동요는 심했다.
이 공포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상산저 앞에서 죽치고 있던 팬들도 싹 사라졌다. 그런 일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그 사람들은 팔관회가 끝난 직후 축제 분위기에 취해 그랬던 거야.’
나는 나름 그런 분석을 하고 있었다.
“나주원 왕후 마마의 일족들도 그리되셨는데 나주원에 문상이라도 가야 하지 않나요?”
상산부인이 임희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소. 연우야 네가 한림원에서 일을 마치면 오후에 구정 앞에서 만나 문상을 가자. 그래도 나주원에 가보긴 해야지.”
임희가 말했다.
“휴, 정윤 전하께서 가여운 처지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나요?”
상산부인은 살짝 눈물이 나는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우리 상산에서 물자 같은 것을 부의로 좀 드리는 게 도리 같소. 한때나마 혼사가 오갔던 사이니.”
임희가 말했다. 다만 임희는 말속에 정윤과의 혼사는 이미 끝났다는 함의를 담아놓고 있었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 혼사를 계속 진행시키긴 어렵죠.”
그동안 정윤과의 혼사에 호의적이었던 상산부인마저 발을 빼고 있었다. 정윤의 외가가 말 그래도 멸문했으니 정윤과 함께하면 상산도 어려워질 것이란 것은 상산부인도 확실히 느낀 것이다.
“맞습니다. 구구한 이해관계는 제쳐놓더라도 정윤 전하께서는 상중이시니 앞으로 몇 년간 혼사를 논의하시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그 점을 생각해야죠. 우리가 그 몇 년을 기다리기도 어렵고. 다른 좋은 가문이 나서줄 것입니다.”
한쪽에 있던 임연객도 약간은 우물거리며 말했다. 임연객도 이제는 정윤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저리 나오는 것이다.
그동안 은근히 나와 정윤 사이가 잘되기를 바라던 임연객이었지만 역시나 이 상황에서는 가문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망한 지 임연객은 상중이란 핑계를 찾아냈다.
나는 그런 상산부인과 임연객의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그래서 답답한 건가? 그런데 나야 미래지식 덕에 일찍 깨달은 거고 어머니나 오빠에게 답답함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도 답답하기도 하고 밥이 잘 안 넘어갔다.
“우리 상산은 잘 빠져나갈 방도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그 와중에 좀 소란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니 각오를 단단히 하시오.”
임희가 상산부인을 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상산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아침 식사는 끝났다.
‘정말 소화가 안 돼.’
식사를 마치고 나는 임희와 같은 수레를 타고 학관으로 향했다. 앞으로의 일을 간단하게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유긍달 등이 곧 너에 관한 여론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러니 너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거라.”
어전에서 유긍달, 황보제공 등과 자주 만나는 임희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여론이 쉽게 일어나긴 할까요?”
“연우 네가 국선 선발에서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활약을 해줬다. 잠시 폭도들이 생길 정도였으니. 유긍달 등이 여론을 일으키기 쉬워졌다고 기뻐하더구나. 은근히 연우 너의 혼사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엄청 많이 생겼다고 하구나.”
“일이 그리 풀리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꼭 지금 시점에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잠시 늦출 수는?”
어차피 왕건이 단기간에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생각에는 1~2달 정도는 타이밍을 늦춰도 혼사를 파토 내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뭐 유긍달 등이야 정윤 전하께 심대한 타격을 줄 기회이기도 하니 지금 곧 일을 꾀할 작정이지. 참 냉정한 자들이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우리라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빠져나가야지.”
임희 역시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죠.”
나 역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림원 일을 마치고 나서 함께 나주원에 가기로 한 것을 잊지 말아라.”
임희가 그런 당부를 했다.
* * *
학관의 학생들도 처형을 보고 모두 우울해했다. 자신들이 인질로서 개경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왕건이 학관 학생들에게 교육기회도 주고 축제도 열며 아닌 것처럼 숨겨왔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 가문은 백제군의 진격로에 가까이 있는데 나는 어찌 될까?”
“아버님이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리실지.”
학관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눈치를 보며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고려가 밀릴 경우 백제와 가까이 있는 가문들은 난감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개경에 있는 자신의 자제들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학관 아이들은 모두 이에 관해 걱정하고 있었다.
모두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지수 공주 마마는 며칠째 안 나오시네.”
배수현은 내 곁에 와서 걱정스레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 그래도 오늘 나주원에 가볼 작정이었어.”
내 말을 들은 배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가서 공주 마마께 나도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줘.”
“알았어. 그런데 네 혼사는?”
“분위기가 이런데 혼사를 할 수는 없지. 좀 상황이 풀리면 하기로 했어. 한동안은 같이 다닐 수 있겠다.”
배수현이 나에게 속삭였다. 평소처럼 떠들썩한 학관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모두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조금만 큰 소리로 말하면 다 들릴 판이었다. 그래서 속삭이는 것이다.
고요한 교실 안을 최언위가 머뭇거리면서 들어왔다. 최언위도 오랫동안 자신이 가르쳐 온 제자들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자 수업을 시작합시다. 이런 때라도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최언위는 그래도 차분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격려하며 수업을 진행했다.
학관 수업을 마치고 들린 한림원에서 왕건은 조용했다. 왕건은 자신의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만 이리저리 보며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림원 학사들은 그런 왕건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니 평소에 농담을 그리하던 사람이 조용하니 사람들이 동요하지. 역시 내 생각처럼 평소에도 왕무처럼 과묵한 게 낫다니까. 뭐 1년만 참으쇼. 1년만 고생 실컷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맡은 잡무를 열심히 했다.
‘천년이 흐른 뒤에도 왕건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정도 고생이야 감수해야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왕건이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연우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예?”
뜬금없는 왕건의 말에 나는 좀 놀랐다.
“지금 나조차도 기력이 떨어지고 갑갑하고 중신들도 우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건 너뿐이구나. 진짜 대담하구나.”
“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야 미래를 아니 그런 거라서 별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도 연우 너는 견훤이도 나한테 항복하고 신라왕도 굴복할 거라 믿는 거냐?”
왕건이 문득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그리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게 사실이라서 나는 그리 답했다.
“연우 너도 참 고집이 있구나. 끝까지 우기다니. 그래 정말 그리됐으면 좋겠구나. 아니면 현실적으로 나이가 많은 견훤이 죽는 행운이라도. 허허.”
왕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왕건과 내가 실없는 말을 잠깐이라도 나누니 눈치만 보던 학사들의 분위기가 약간은 풀린 것이 느껴졌다.
왕건도 아마 장내의 답답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말을 건넨 모양이었다.
* * *
한림원에서 일을 마친 나는 그대로 구정 앞에서 임희와 만났다.
“나주원으로 가자꾸나.”
임희는 부의 명목으로 가져온 예물을 등에 진 하인들도 데려왔다. 구정 자체가 궁궐 바로 앞에 있었다. 이제는 나에게도 익숙해진 궁궐 언덕길을 올라가자 나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주원에 들어서자 나주원 사람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번에 나주에서 전사한 오씨 일족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상복을 걸친 왕무와 오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어린 오지수는 기진맥진한 채 겨우 서 있기만 했다. 앞에 나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왕무였다.
마침 황보제공이 문상을 위해 온 것인지 왕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윤 전하의 외가가 나라를 위해 외로운 나주를 지키다가 순국했으니 참 안타까우면서도 그 기개에 놀랄 따름입니다.”
황보제공도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정적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예를 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안으로 드십시오.”
왕무 역시 흔들림 없이 황보제공을 맞이했다. 황보제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향을 피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그다음에는 임희가 나서서 왕무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한쪽에 서 있는 오지수에게 다가갔다.
“언니.”
나를 보자마자 오지수가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 오지수도 외가의 멸망이 주는 의미를 아는 듯했다.
“배수현이나 학관 아이들이 모두 공주 마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오지수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와 임희는 문상도 하고 부의도 전달하고 나주원을 나섰다. 문상을 위해 고려의 왕족이며 중신들이 끊임없이 오고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주원을 나서는 임희를 향해 황보제공이 말했다.
“잠시 황주원에 들러서 간단히 식사나 하고 가시오. 문상하느라 이미 저녁때가 아니오?”
“그럼.”
괜히 황보제공이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제공의 뒤를 따랐다.
나 역시 그 덕에 황주원을 둘러볼 수 있었다.
‘으리으리하군.’
확실히 돈이 많은 황주라 그래서 황주원도 굉장히 화려하게 지어 놨다. 시녀들이 내오는 식사도 말만 간단하지 대단했다.
양념을 잘한 돼지수육에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며 무가 곁들어져 나왔다.
나와 임희, 황보제공은 각자 상을 받아 식사를 시작했다. 다만 황보제공은 성격이 약간 급한지 식사 중에 바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일을 꾀해도 오씨 일족의 장례 중에 바로 일을 벌이는 것은 또 아닌 것 같소. 예가 아니니.”
그말을 듣고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음모를 꾸며도 약간의 도리는 지켜야지.’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황주며 충주니 나야 기다릴 뿐입니다.”
임희는 모든 책임을 저쪽에 떠밀었다.
“내가 잡찬과 의논해서 장례가 끝난 뒤 3일 뒤부터 일을 도모하기로 했소. 개경 전체에 소문이며 노래가 퍼지려면 3~4일은 걸리니. 정윤에게 일주일의 시간은 주는 격이오. 그런 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것이고. 상산 쪽은 맞장구나 잘 치시오.”
황보제공이 수육을 씹으면서 말했다.
“알겠소.”
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쪽에 앉아서 말없이 버무린 채소를 씹을 수밖에 없었다.
‘달랑 일주일 여유를 주다니. 좀 더 주지.’
오래지 않아 나는 유긍달과 황보제공 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국선으로 뽑힌 흰옷을 입은 아가씨
본래는 관음보살의 제자였다네
그래서 돌을 밀고 노래를 불러 중생을 감화시켰네
혼인을 할 게 아니라 수행에 힘써야 할 터
한낱 평민인 광덕의 풍모를 왕공귀족들도 본받아야 하리
아! 마침내 수행으로 나라가 평안해지고 도를 이루리.
가사만 봐도 의도가 확연히 보이는 노래가 딱 황보제공이 말한 그 시기부터 개경 전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것이 꽤 자주 보였다.
또한 똑같은 꿈을 꿨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꿈에서 한 중년 부인이 나타나서 전생에 자신의 제자였던 국선으로 뽑힌 상산의 여아로 하여금 세속의 일에 연연치 말고 수행을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부인이 관음보살로 변해서 흰 연꽃을 타고 사라졌습니다. 나는 놀라워서 봉은사의 스님에게 대체 무슨 꿈인지 물어보려고 갔는데 봉은사의 관음보살 석상 앞에 꿈에서 본 중년 부인이 입었던 옷가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개경 봉은사의 석상 앞에서 옷가지를 봤다고 떠들어대니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