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8화
68. 위기
“와아아아.”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어서 포위망을 뚫어라!”
임희가 임연객과 상산 군졸들을 향해 그리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몽둥이를 든 상산 군졸들이 마구 사람들을 밀어냈다.
“학관까지 가는 길을 확보하라!”
임연객이 군졸들을 이끌고 절규하며 육탄으로 길을 뚫었다.
‘이거 흉험함만으로 따지면 전쟁터보다 더한 거 아니야?’
나는 얼마 전에 삼년산성 인근에서 있었던 전쟁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상산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투극은 목숨을 잃을 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더 치열했다.
“아버님. 차라리 학관에 가지 말고 한동안은 상산저에서 머무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솔직히 며칠 동안 느긋하게 기다리면 저들이 제풀에 지칠 것입니다.”
나는 수레 위에서 임희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고대에는 현대처럼 미디어며 여론이 발전하지 않았다.
현대야 미디어를 통해 이런 인기가 생기면 계속 소식을 전해 그것이 유지되지만 고대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 만큼 가만히 기다리면 저런 열기도 식을 게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전(前) 병부령이 집 앞에 몰려든 폭도들에 굴한다면 상산 땅의 망신이다. 폭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돌파한다!”
임희는 이를 갈며 외쳤다.
요 며칠간 상산저에 몰려든 내 팬(?)들의 횡포에 맺힌 것이 많아 보였다. 원래는 임희도 좋은 말로 타일러서 사람들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내 딸의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이리 오신 것에는 감사드리오. 하지만 이렇게 상산저를 둘러싸고 있으면 하인들도 일을 못 하고 이웃에 불편을 끼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모두 돌아가시오. 사람이 도리를 지켜야 하지 않겠소?”
임희는 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했다. 상산부인도 딸인 나를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라고 물이며 간단한 간식을 집 앞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내주기도 했다.
“늙은이는 필요 없다! 국선을 보여줘라! 달랑 공연 한번 하고 사라지는 게 어디 있냐?”
“국선을 내놔라.”
그런데 상산백인 임희가 점잖게 말해도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이런 패악질이 며칠간 이어지니 임희도 마침내 강행돌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계속 고함을 지르며 학관까지 가는 내 수레를 따라오는 폭도(?)들을 보고 임희가 말을 돌려 또 외쳤다.
“이놈들! 여태까지는 내가 너희들 사정을 봐줬지만 계속 이런다면 조정에 고해 진짜 병력들을 동원해서 너희들을 체포하겠다.”
“…….”
임희의 이 말에는 사람들도 움찔했다. 여태까지는 임희가 상산저를 경호하는 군졸이나 하인들을 동원해 대응을 해왔지만 조정이 나서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 가운데 비단옷을 입은 한 소년이 나타나서 외쳤다.
“걱정 마라. 난 창부령 진원 각하의 손자다. 이런 일로 창부령의 손자를 조정이 못 잡아간다! 우리야 국선을 따라다니면서 소리만 지르는데 무슨 죄로 잡아가겠는가? 그런 법령은 없다!”
“맞다! 우리 쪽에도 높은 사람들이 있다.”
“겁먹지 마!”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더니 다시 기세가 올라서 외쳤다. 임희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창부령의 손자를 자처하는 소년의 복색이나 말하는 투를 봐서는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돌파하라!”
임희는 상산 군졸들과 하인들로 하여금 내가 탄 수레를 감싸고 학관까지 나아가게 했다. 사람들이 신이 나서 계속 고함을 지르며 내가 탄 수레를 쫓아왔다.
‘이건 고지식한 아버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저들이 놀이라고 여기고 더 열광적으로 쫓아오는 것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수레 밖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소란도 내가 학관 앞에 당도하자 끝났다.
쫓아오던 팬인지 폭도인지 헷갈리는 사람들도 학관 같은 관공서 앞에는 소란을 못 피우고 흩어졌다.
“학관에서도 조심하거라. 연우 네가 집에 올 때도 데리러 오마.”
임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나 때문에 임희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나는 민망했다. 나는 겨우 학관에 들어섰다. 내가 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배수현과 오지수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호위하는 시늉을 했다.
“국선 임연우를 지키자.”
배수현이 반쯤 농담을 섞어 외치는 것 같았다.
“에휴 정말 힘들어서 이건 농담할 거리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히 지금 나는 군졸들의 호위 없이는 혼자 개경 거리를 걸을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내가 준비한 공연이 그 정도로 강렬했나? 힘을 좀 뺐어야 했나?’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후회까지 했다.
“나도 농담이 아니야. 학관 안에서도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배수현은 그러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우리가 언니를 지켜드릴게요.”
오지수도 배수현에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학관 안에 들어섰는데 내가 들어서자마자 학관 안이 조용해졌다.
모든 학생들이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나마 함께 무대에 올라갔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내 주위에 몰려와 줘서 다행이었다.
“사람들 반응 보니 공연은 대성공이었던 것 같아.”
“연우 네 생각이 통한 것 같아 다행이야.”
“내가 연우 너와 무대 올라갔다는 걸 주위에 말하니 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 나까지 어깨가 으쓱해졌어.”
친구들은 주변에 몰려들어 수다를 늘어놓았다.
‘성공해서 다행이긴 한데 이 정도로 부작용이 클 줄은.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유명인사가 됐으니 유긍달 등이 여론몰이를 하기도 좋을 거고. 다 끝났다. 상산에 내려가면 이런 난장판도 피할 거고.’
이제는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나는 애틋해졌다. 친구들과 공연을 준비하며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최언위가 교실 안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 목탁을 사정없이 치며 들어섰다.
“자 팔관회 때문에 진짜 공부를 너무 오래 쉬었습니다. 앞으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수업을 하겠습니다.”
* * *
팔관회가 끝난 이후에 열리는 첫 수업이라 그런지 많은 학생들은 집중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학관에서의 수업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 나는 언제나처럼 최언위의 뒤를 따라 한림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잠시 머뭇거리던 최언위가 나를 향해 물었다.
“연우 아가씨께서 국선 선발 때 선보였던 그 시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그 시를 아가씨께서 직접 지으셨습니까?”
“우연히 만난 신비한 기인이 남긴 시입니다. 제가 그런 시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재빨리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나도 문리가 트여서 한문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쳐도 한시를 짓는 것은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다.
‘내가 지었다고 거짓말을 치면 나중에 파탄이 나니.’
그러자 최언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시를 지은 사람은 어쩌면 저보다 더 뛰어난 문인일 수 있습니다. 대단한 시였습니다. 혹시 어떤 기인이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참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당세에 나오기 힘든 시였습니다.”
“그냥 노인이셨습니다. 우연히 잠깐 만난 것에 불과해서.”
나는 최언위에게는 그리 둘러대었다.
“아쉽습니다.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만.”
최언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규보 시를 사용했던 것도 효과가 너무 컸던 건가?’
나는 너무 안타까워하는 최언위의 반응을 보고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최언위와 함께 한림원에 들어서자 여러 학사와 함께 뭔가를 의논하는 왕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왕건이 말했다.
“우리 임 국선이 왔군. 허허허. 국선 덕에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나를 좀 국선이라고 안 불렀으면 좋겠는데. 국선이라고 부르면 뭔가 민망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티는 안내고 공손히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부러 왕건이 무슨 의문을 풀었는지에 대해서는 거론 안 했다.
‘내가 물어보면 당연히 길고 황당무계한 소리를 늘어놓을 테니.’
“국선을 보고 무슨 의문이 풀리셨습니까?”
그런데 곁에 있던 김악이 궁금한 표정으로 대뜸 물었다.
“삼한의 역사를 읽어보면 신라에 어리고 잘생긴 화랑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낭도들을 데리고 전장에서도 활약했다고 적혀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어린 꼬맹이들이 전장에서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진짜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늘 임 국선을 따라다니며 난동을 피우는 사람들을 보고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저 정도 광기면 전쟁터에서도 통할지도.”
왕건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호 그도 그렇습니다. 저도 좋은 지식을 하나 알게 됐습니다.”
김악 역시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사람이 그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그걸 본인 역사공부(?)의 도구로 쓴다고?’
나는 분기탱천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한 구석에 앉아서 한림원의 문서 잡무를 봤다.
평소였다면 그렇게 잡무만 보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하루가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의 사람들이 속속 한림원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급보입니다! 너무 다급해서 한림원까지 달려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왕건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유긍달 등도 팔관회가 끝나는 시기 즈음에 견훤의 공세가 거세질 거라는 것을 예상했다.
왕건 역시 그와 관련된 소식일 거라도 예상을 했는지 태연한 기색이었다.
“오어곡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 6명이 그대로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항복? 그냥 도주한 것이 아니냐? 항복할 리가?”
왕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어곡성은 그대로 견훤에게 항복하며 비축한 곡식과 병기들을 모두 바쳤습니다. 인근에 있던 진보성주 홍술이 몇 차례나 척후를 보내 확인하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 항복이라니!”
그 말을 듣자 왕건은 자신의 이마를 짚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하!”
한림원에 있던 학사들이 놀라서 그런 왕건을 일으켰다. 왕건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 무렵 고려는 견훤에게 계속 몰리고 있었고 왕건 본인도 견훤에게 여러 차례 패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견훤에게 패해서 도망쳐도 처벌을 심하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장수들을 달래가며 견훤에게 항전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가 터진 것이다.
‘슬슬 왕건의 진짜 위기가 시작되는군.’
역사학도인 나는 익히 짐작하고 있던 사태라 놀라지 않았다. 이제는 928년도 거의 다 끝나가고 929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공산전투 이후 근 1년 동안 견훤이 왕건을 몰아붙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심해질 것이다.
‘물론 왕건은 이 모든 위기를 이겨내긴 하지. 그러나 앞으로 1년간 궁지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유긍달 등의 뜻을 무시하기 어렵지. 내 혼사와 관련해서 유긍달 등이 강하게 여론을 조성하면 왕건도 따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혼사에서 빠져 나갈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그 이후에는 왕건이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에 다른 대호족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또 다른 전령이 뛰어 들어오더니 외쳤다.
“급보입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좀 나중에.”
최언위가 그리 말하는데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왕건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견훤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나주가 무너졌습니다. 끝까지 항전하던 오씨 일족은 모두 죽거나 섬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끄응.”
왕건은 가슴이 답답한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익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정윤 왕무의 외가가 사실상 멸문당했구나.’
왕무의 얼굴이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