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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66화 (6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6화

66. 탑

“앗 저기 아버지가 있다.”

내 곁에서 임연객이 외쳤다. 서둘러 달려온 덕에 나를 포함한 일행은 구정 내의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과연 여러 중신들 사이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임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국왕인 왕건과 중신들이 궁에서 내려와 구정에서 예법대로 의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괜히 다리가 아프다고 한 것이 아니군.’

수많은 호족들과 중신들이 줄을 맞춰서 정확하게 움직이며 왕건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매스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멋지긴 멋졌는데 연습할 때 엄청 힘들었을 것 같았다.

‘나이도 많은 중신들이 이걸 해내려면 엄청 고생했겠어. 그래도 저 사이에 끼면 자랑스럽기는 하지.’

수많은 개경주민들 앞에서 어쨌든 자신의 지위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왕건도 평소 때와 달리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확실히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다만 나는 점점 속이 불편해졌다.

‘내일 내가 여기에서 무대를 펼쳐야 한다는 말이야?’

구정 한가운데는 이미 팔관회를 위해 임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국선선발에 나서는 나는 물론 그 무대 위에서 연습을 해봤다. 하지만 사람들로 가득 찬 구정은 또 처음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괜찮은가?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닌지?”

그때 곁에서 왕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용케 내 상태를 눈치챈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나마 오늘 한번 와서 이 구정의 분위기를 느껴봐서 다행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건과 중신들은 의식을 끝내고 앉았다.

“공연이 시작한다.”

그리고 구정의 관객들이 큰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왕건과 중신들이 펼치는 의식도 볼거리였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그거 하나 달랑 보려고 여기 다 몰려왔을 리가 없었다.

구정 중앙에 설치된 무대에서 인형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형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형들이 대단히 정교하군.’

그냥 시장에서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고려 조정 차원에서 전문가를 동원한 것이다.

지금 구정에는 엄청난 수의 개경 주민들이 모여 있었지만 매우 고요했다. 그만큼 인형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긴 이 시대는 현대처럼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호족이라고 해도 이런 공연을 볼 기회가 드무니.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진짜 1년에 한 번 있는 공연이다.’

떠들면 큰일 날 분위기였다.

그리고 잠잠한 가운데 인형극이 펼쳐졌다. 극의 내용은 삼국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있었던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영웅들의 모습대로 만든 인형들이 계속 등장했다. 영웅의 간단한 일화 같은 것이 짧은 인형극 형식으로 소개되고 다음 영웅이 등장했다.

나 역시 홀린 듯이 공연을 바라봤다. 사학도인 나는 이 공연의 가치를 실감하고 있었다.

‘이 공연을 10분 만이라도 동영상으로 찍어서 현대에 가져가면 온 학계가 난리가 날 텐데.’

사학과뿐만 아니라 국문과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학계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동영상이 안 되면 그림이라도 몇 장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현대인 중에서는 나만 이것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공연은 아주 길지는 않았다.

공연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엄청난 예산이 소모될 것이다. 1시진쯤 지나자 나는 슬슬 공연이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대 위에 신라 말의 영웅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이야기가 끝났다. 다음 무대가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나오는 인형들의 수가 많았다.

‘막판에 힘을 주려는 건가?’

그 순간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잠잠했던 구정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신숭겸 장군이다! 김락 장군이다!”

“앗.”

나는 유심히 구정 중앙의 무대를 살폈다. 커다란 8개의 인형을 중심으로 군사들의 모습을 본뜬 수십 개의 인형이 보였다.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8명의 장군들이다.’

아마 인형도 실감 나게 잘 만든 모양이었다. 개경 주민들 중에서는 신숭겸 등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등장한 인형이 신숭겸임을 알아챈 것이다.

잠시 술렁이던 구정은 곧 조용해졌고 공산 전투의 이야기가 구정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공연은 끝났다.

“폐하가 눈물을 흘리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왕건은 구정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잘 볼 수 있는 누각 위에 앉아 있었다.

“어디야. 어디?”

나는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누각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과연 왕건이 소맷자락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울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왕건 주변의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왕건 곁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곧 시종들이 커다란 비단 장막을 가져와서 누각을 통째로 가려 버렸다.

‘아니 난 공산 전투가 끝난 직후의 왕건도 만났는데 그때는 오히려 멀쩡했는데?’

나는 재암성에서 선필 등과 함께 왕건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 * *

여러모로 가치 있고 놀라운 공연이 끝나고 나와 일행은 모두 구정 밖으로 나섰다. 아직도 하루가 꽤 남아 있었다.

“모두 법왕사에 가서 노는 건 어찌 생각하십니까?”

배수현이 사람들에게 권했다. 이 시대에는 절이 안전하게 모여서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절에는 승려들도 있고 보는 눈도 많았다.

법왕사는 큰절이기도 해서 모두가 찬성했다. 다만 오지수만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요? 이 사람들 사이에 껴서 법왕사까지 가느니 그냥 공연도 봤으니 나주원에 가서 쉬는 것이 어떠시나요?”

오지수는 그런 제안을 했다.

“사람들을 많이 구경하는 것이 팔관회의 재미입니다. 막 서로 부딪치고 그래야 맛이 나는 겁니다.”

임연객이 냉큼 그런 말을 했다. 다른 일행은 모두 임연객의 말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그럼 저는 우선 나주원에 가 있을게요.”

북적이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얼굴로 바라보며 오지수는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갔다.

나는 오지수처럼 상산저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필드워크라고 생각하고 팔관회를 한번 구경해 보자. 물론 논문을 써서 발표하거나 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래서 일행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법왕사로 향했다.

‘팔관회가 겨울에 열려서 다행이야. 겨울이니 사람이 북적여도 버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법왕사에 도착하자 배수현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법왕사에 아는 승려가 있어서 방 한 칸을 미리 빌려놨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거기서 좀 쉬면 되겠습니다.”

임연객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리고 일행은 배수현의 안내를 받아 법왕사 뒤쪽의 건물로 향했다. 방앞에는 웬 키가 큰 청년 하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일행이 오는 것을 보자마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윤 왕무에게 예를 표했다.

“누구신지?”

예를 받고 왕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곁에서 재빨리 배수현이 말했다.

“박술희 장군의 자제이신 박제안이라 합니다.”

“아!”

키 큰 청년이 박술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왕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배수현에게 말했다.

“네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알아?”

“안 그래도 팔관회가 끝나면 모두에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나 조만간 혼인하게 될 것 같아. 저 사람이랑.”

배수현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향가를 배울 때도 계속 법왕사로 오자고 하더니 그때부터.”

나는 왜 그동안 배수현이 계속 법왕사 타령을 했는지 깨달았다. 연습을 끝내고 박제안과 만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집안에서 혼사 말이 나와서 만났는데. 연우 네가 보기엔 어때?”

“잘 어울려.”

나는 배수현과 박제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확실히 두 사람 다 키가 크고 늘씬해서 잘 어울리긴 했다.

“그렇지? 사실 이번에도 그이가 정윤 전하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해서. 연우 네 말을 듣고 잘 됐다고 싶어서 꼈어.”

배수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또…….”

나는 배수현의 혼사 소식을 듣고 허전함을 느꼈다.

‘혼인을 하면 배수현도 앞으로는 학관에 못 나올 텐데.’

따지고 보면 내가 처음에 학관에 왔을 때부터 배수현은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정윤파이기에 나에게 베푼 호의라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항상 곧 정윤과의 혼사가 파기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배수현 등과 마음속으로 거리를 두었다.

‘배수현에게 제대로 보답도 못 했어. 나는 왜 그랬던 걸까?’

허전함과 함께 그런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배수현이 입을 열었다.

“연우 네 덕에 나도 학관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었어. 연우 너가 아니었으면 진짜 학관에서 한림원령의 수업만 듣다가 나왔을 건데. 신례 때도 그렇고 최승우와의 대결도 직접 봤어. 이번 국선 선발도 잘 해내자!”

“뭘 그런 걸 가지고.”

내가 쭈뼛거리고 있는 사이 왕무와 대화를 마친 박제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에게도 인사를 했다.

“연우 아가씨의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모두 허명입니다.”

나는 박제안에게도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제가 빌린 이 방은 오늘 하루 종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됩니다. 저희는 따로 가볼 데가 있어서.”

배수현은 일행에게 그리 말하더니 박제안과 손을 잡고 훌쩍 떠나 버렸다.

“참 부럽구만. 탑을 돌러 가는 거겠지?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뭐 했는지?”

임연객은 장탄식을 하며 배수현과 박제안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시대에는 연인들끼리 왜인지는 모르지만 절의 탑을 빙글빙글 도는 풍속이 있었다.

‘왜 그런 걸까? 하긴 현대에도 연인들끼리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많이 하니.’

현대의 데이트를 수백 년 뒤 사람들이 보면 그 의미 없음을 이해하지 못할지 아니면 그 의미 없음 자체에 공감할지 나는 궁금했다.

어쨌든 배수현이 빠지고 왕무, 나, 임연객 3명은 방안에 앉아 쉬고 있었다. 군졸들은 호위를 위해 방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임연객이 왕무에게 그리 말하더니 방 밖을 나섰다. 그러더니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병부낭중이 왜 돌아오지 않지?”

왕무가 어색하게 말했다.

‘이 인간이 같이 탑을 돌 아가씨를 만나보려고 도망쳤구나!’

나는 이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오라버니를 찾아볼 겸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방 안에 왕무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려고 그런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함께 찾도록 하지.”

그런데 왕무는 또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와 왕무는 법왕사 탑쪽으로 걸어 나갔는데 임연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진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껴서 어느덧 나와 왕무는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나는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왕무가 문득 말했다.

“나는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라. 나와 함께 하면 갑갑할 수도.”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과묵하신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습니다.”

최고권력자가 되면 속을 숨겨야 하는데 그러면 왕건처럼 모든 사람에게 수다를 떨거나 왕무처럼 과묵해야 했다.

나는 김악을 괴롭히던 왕건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없는 게 나아.’

그런데 왕무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길게 이어나갔다.

“내가 태어났을 때 폐하께서는 궁예의 시중이셨어. 나는 내가 정윤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

“굉장히 어린 시절 일인데 기억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기억이 난다.”

왕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가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 못 했어. 나는 남자로 태어났다고.’

왕무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내 처지를 떠올렸다. 그러더니 왕무의 심정이 이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그리됐으니 뭐 별수 없습니다. 하하하.”

나는 약간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왕무는 내 말을 듣고 역시 가볍게 웃으며 말하더니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순간 놀라서 버둥거렸다.

그런데 왕무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왕무의 품속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하?”

“사람들이 많아서 휩쓸릴 수 있어서.”

왕무가 나에게 변명하듯이 속삭였다. 이 순간 나는 왕건의 눈물을 떠올렸다.

‘팔관회니까 왕건이 눈물을 흘려도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지. 그래서 왕건은 그토록 팔관회를 기다린 건가? 그리고 왕무도.’

이 순간 나는 그만 왕무의 진실한 호의를 느껴 버렸다. 왕무의 품속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배수현에게 거리를 두고 후회했던 것처럼 왕무마저도 밀어내면 나중에…… 그러나 이 혼사는 파기될 텐데.’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우선은 왕무의 품속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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