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65화 (65/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5화

65. 고려 할로윈

팔관회가 다가오면서 거리 이곳저곳에 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축제 분위기를 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용이며 온갖 귀신들의 탈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인형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지푸라기로 대강의 형태를 잡은 뒤 그 겉에 천을 여러 겹 싸매고 천을 주물럭거려서 정교하게 사람의 형상을 만든 뒤 물감을 칠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즈음 해서 나주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 달에 일주일은 여기 있으라는 왕건의 명이 은근 까다롭네.’

거기다가 하필 이때쯤에는 팔관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무도 계속 나주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쟁도 지금은 소강상태라서 왕무가 군무를 보기 위해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마다 왕무의 얼굴을 보게 됐는데 내 심경은 복잡했다.

‘참 몇 달간 지켜봐도 말이 없어.’

아침밥을 먹으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왕무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가볍게 예를 갖추기는 했으나 수다스럽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었다.

“국선선발에 나간다는 말은 들었는데.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니?”

나주 왕후가 밥을 먹다가 궁금한지 질문을 던졌다.

“예.”

나는 왠지 모를 중압감을 느끼며 짧게 대답했다. 일은 그럭저럭 진행되고 있었다.

내 미래지식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배수현, 임연객과 나를 돕는 학관 아이들의 인맥 등이 결합되어 구색이 갖춰지고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나는 압박감을 느꼈다.

‘내가 구정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해야 한다고?’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이게 팔관회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부담이었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곁에서 오지수가 외쳤다.

“엄청난 무대가 펼쳐질 거니 꼭 보세요. 연우 언니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여러 가지를 생각해냈어요. 진감 선사의 제자라는 유명한 승려도 연우 언니의 생각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듣기에도 그렇고요.”

오지수는 요 근래 들어 제일 신이 난 기색이었다.

‘하긴 요새는 매일 국선선발 준비를 한다고 놀러 다니니.’

첫날처럼 거의 놀다가 10분 정도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관 아이들과 하다 보니 반은 놀고 반은 일을 하는 식이었다.

오지수로서는 개경 이곳저곳을 다니며 팔관회를 준비하는 것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즐거운 일인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구색만 맞췄습니다.”

나는 재빨리 끼어들어 내 부담감만 더 키우는 오지수의 말을 정정했다.

“국선선발은 팔관회 둘째 날에 하니 첫째 날에는 시간이 비지 않니? 연우 너는 첫날에는 뭘 할 작정이니?”

나주 왕후가 물었다.

팔관회 준비를 이리 어마어마하게 하는데 당연히 달랑 하루만 놀고 끝낼 리가 없었다. 팔관회는 2일에 걸쳐서 열리는 축제고 3일째는 개경 전체가 휴식을 취했다.

“저를 도와주는 학관 아이들도 팔관회를 즐겨야 하니 첫날에는 우선 각자 놀다가 둘째 날 오전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첫날에는 저도 시간이 비긴 합니다. 딱히 무엇을 할지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마 국선선발 전날이니 집에서 혼자 떨고 있을 거 같네.’

지금도 이리 긴장감을 느끼는데 전날이 되면 진짜 힘들 것 같았다. 심리적 압박 때문에 지금도 입안에서 씹고 있는 닭고기가 잘 안 넘어가고 있었다.

“어머 그것참 잘 됐구나. 그럼 아예 팔관회 첫날에는 무와 함께 좀 다녀주렴.”

나주 왕후가 손뼉까지 치며 권했다.

“그게…….”

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나주 왕후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나와 왕무를 친해지게 하고 싶은 마음에 저런 제안을 하는 것 같은데. 이것 참.’

혼사를 파토 내기 위해 국선선발에까지 나선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어차피 혼사가 깨질 건데 막판에 같이 다니면 왕무에게 오히려 못 할 짓을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근데 여기서 단호하게 나주 왕후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이상해 보이기는 하고. 괜히 첫날에 시간이 빈다고 말해 버려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곁에서 오지수가 나를 구해주었다.

“와, 그러면 되겠네요. 나도 연우 언니와 오라버니와 함께 다닐게요. 그럼 안전하기도 하고. 그날 궁 안에만 있으면 정말 갑갑할 거 같아요.”

“예, 그럼 오지수 공주 마마도 함께하고 우리 오라버니나 마음 맞는 사람을 몇 명 더 불러모아 같이 다니겠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러면 한결 부담이 덜한 것이다.

“그러도록 하렴. 그래 무야. 너는 어찌 생각하니?”

나주 왕후는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왕무는 매우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 * *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는 우선 여러모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나주원 경내를 거닐었다.

어느덧 나주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내가 나주원에 머무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혼사가 끝장나기 전에 은제련으로 얻은 수입의 일부라도 나주 왕후에게 주고 나와야겠지. 그래야 이 허름한 건물들을 좀 손볼 수 있고. 립밤 사업도 그냥 오지수에게 넘기자. 짭짤한 소일거리는 될 거야.’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 정도는 하고 나와야겠다는 계산을 했다. 내가 요 근래 은제련으로 얻는 수입은 엄청났다. 그 정도 돈을 쓴다고 해서 별 부담도 없었다.

그렇게 산책을 하다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2명의 여종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내가 얼굴을 비추자 2명의 여종들이 일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직 안 왔습니까?”

내가 가볍게 묻자 여종들이 말했다.

“예, 그들은 자신의 처소에서 쉬다가 오후에야 나옵니다. 일이 고되어 교대로 푹 쉬어야 합니다. 저희도 시간이 되면 가서 쉽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 속에서 작은 은조각을 꺼내어 그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은조각을 보고 여종들은 얼굴이 환해져서 예를 갖추었다. 나는 그런 반응을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을 나섰다.

이제 나주원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으니 이곳 사람들에게 좀 베풀 작정이었다.

* * *

이때 이미 학관도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팔관회가 다가오면서 들뜬 학생들이 학관에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뿐만 아니라 한림원령 최언위도 임희처럼 왕건에게 예를 올리는 행사연습도 해야 했고 이외에 팔관회 관련 처리할 일도 많았다.

“한동안은 수업을 쉬고 팔관회가 끝나고 재개하겠습니다.”

마침내 최언위도 이런 상황에 굴복해서 그런 선언을 했다. 거기에 오늘은 국선선발 준비를 위해 모이는 날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시간이 널널했다.

“동양원이나 한번 방문해야겠다.”

전쟁터며 표천현에서 있었던 은광 사건을 해결하고 개경에 돌아와서 나는 몇 번 동양원 부인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오가는 동안 친해져서 이제는 미리 연락을 안 하고 가도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여전히 동양원 부인이 좋긴 한데 탕정군에 가기 전처럼 안 보면 큰일 날 것처럼 애절한 느낌은 사라져서.’

그런 강렬한 감정이 들 때 계속 만났어야 했는데 그 시기에 나는 유금필을 따라 전장에 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동양원 부인을 다시 만나니 그때 그 느낌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또 그 감정을 이어갔으면 무슨 답이 나왔을까? 거기다가 동양원 부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는데.’

그 생각을 하니 이제 와서는 그 무렵에 탕정군에 간 것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양원에 들어서자 동양원 부인이 언제나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전각에 들어가 시녀들이 건네주는 차를 나눠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우 아가씨가 국선 선발에 나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정말 생각해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용기를 내 그런 도전을 해봤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준비는 잘하고 있나요?”

다만 내 얼굴을 보자마자 국선선발 이야기를 꺼내서 나는 역시 이곳에서도 부담감을 느꼈다.

“뭐 그럭저럭하고 있습니다.”

“팔관회 날이 다가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네요.”

동양원 부인은 나를 향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원래도 폐하께서 동양원에 잘 오지 않으셨지만 팔관회라 온 사방이 떠들썩한데 혼자 동양원에 있으려니 더 외롭네요.”

동양원 부인은 턱을 괴며 말했다. 왕건은 요근래 바쁜 데다가 애초에 왕후며 부인 수가 너무 많았다.

‘앞으로 부인 숫자가 더 늘어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동양원 부인이 더욱 안쓰러워졌다.

“팔관회 날 저와 함께 다니시면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첫날에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러고 싶지만 이 나이에 그러는 것도 이상하죠. 연우 아가씨는 친구들과 함께 팔관회를 잘 즐기세요. 에휴 차라리 결혼 같은 건 하지 말고 혼자 살 걸 그랬어요.”

동양원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저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혼사가 흐지부지돼도 동양원에는 꼭 찾아올게요.’

나는 동양원 부인의 흰 얼굴을 바라보며 남은 차를 들이켰다.

* * *

그리고 순식간에 시간은 흘러서 팔관회 날이 되었다.

“어마어마하군.”

나는 개경 거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탈을 쓴 채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탈을 쓰고 다니는 것은 별 게 아닌데 인형이 소름 돋네.’

몇몇 사람들은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을 껴안고 다니거나 어깨에 얹고 다녔다.

아직 오전이라 햇살이 밝은데도 온 거리의 사람들이 이러고 다니니 섬뜩하긴 했다.

‘김악이 분기탱천해서 외국인들이 보고 무서워서 못 나온다고 할 만하긴 하네.’

나도 진짜 생전 처음 팔관회를 경험해 보는데 무섭긴 했다.

현대인인 내가 보기엔 이 시대 기술력으로 만든 탈이며 인형들은 진짜 가만히 보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느낌과 질감을 줬다.

그 와중에 내 곁에서 임연객이 물었다.

“상산에서 모시는 산신으로 꾸몄는데 어때? 그럴듯해?”

임연객은 턱에 붙인 가짜 흰수염을 쓰다듬었다.

“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도 같이 다닐 임연객은 점잖은 수준으로 꾸며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냥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어차피 내일 국선선발 무대에 서야 될 판인데. 뭘로 분장할지 고민하고 또 탈이며 옷 준비하고 하기가 싫어.’

“정윤 전하께서 상산저 앞에 오시기로 했다고?”

“응.”

팔관회 날이 되면 구정 앞으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릴 것이 뻔했다. 왕궁 근처도 인산인해일 것이다.

그래서 아예 왕무와 오지수 등이 상산저 앞까지 와서 합류를 하고 나서기로 했다.

정윤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상산저 안에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나와 임연객은 저택 대문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야. 나 왔어.”

배수현이 손을 흔들며 상산저 앞에 당도했다. 나는 어색할까 봐 배수현도 불렀다. 배수현은 무슨 여우탈을 손에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고마워.”

나는 선뜻 달려와 준 배수현을 껴안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왕무 일행도 당도했다.

‘어부 차림을 했네?’

나는 왕무와 오지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무는 몸에 달라붙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작은 그물을 마치 허리띠처럼 두르고 나왔다.

이상한 차림이긴 했지만 잘생겨서 그런지 그것도 봐줄 만했다.

오지수는 어촌 소녀처럼 꾸미고 무슨 커다란 조개껍질을 어디서 구해와서 가져 다니고 있었다.

왕건을 비롯한 왕실의 선조들이 바다에 나가 활약했으니 저런 차림을 한 것 같았다.

‘용이나 용왕 차림을 하면 눈에 너무 띌 테고. 대신 저러는 것 같군.’

이 외에 왕무와 오지수를 호위해 온 군졸들도 바다와 관련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너무 대충 만들어와서 보면 웃겼다.

‘불가사리 가면은 대체 뭐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왕무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런 내 곁에서 임연객이 다급하게 외쳤다.

“서둘러 구정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좀 있으면 폐하와 중신들이 구정에서 행사를 치를 것입니다.”

아버지 임희도 아침에 나서기 전에 자기가 연습을 많이 했으니 꼭 오전 중에 구정에 와서 행사를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것이 떠올라서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일행은 서둘러 구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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