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4화
64. 준비
“제가 이번에 국선 선발에 나가게 되어 한림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 달만이라도 휴가를 청합니다.”
나는 왕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야 뭐 당연한 것 아니냐? 한동안 한림원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
왕건은 흔쾌히 휴가요청을 승낙했다. 왕건의 말을 듣고 내가 국선선발에 나선다는 것을 알게 된 한림원 사람들은 모두 나를 격려해 주었다.
“워낙 총명하시니 국선선발 때도 기대하겠습니다.”
평소에는 말이 없던 최응도 그리 말했다. 구족달이며 그간 얼굴을 익힌 한림원 사람들도 반응이 비슷했다.
나는 더욱 큰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림원 사람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준 것은 아니었다.
“연우 아가씨마저 팔관회에 그리 적극 참여하시니 너무 실망입니다.”
대내학사 김악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김악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되묻는데 김악이 팔관회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팔관회 날 외국 사람이 고려를 방문하면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를 못할 지경입니다. 사람들이 다 귀신인 양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하니까요. 나라망신이에요. 망신! 참 점잖지 못한 일입니다. 아니 연우 아가씨께서는 경전도 읽고 학문도 깊으신데 왜 굳이 그런데 끼십니까?”
김악은 이 시대 유학자 중에서도 상당히 강경파 같았다.
‘하긴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팔관회 같은 축제가 싫은 게 당연하지. 다만 김악이 눈치는 좀 없는 거 같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김악이 내 곁에서 팔관회의 나쁜 점에 대해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왕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왕건이 상냥한 표정으로 김악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경험한 무서운 사건을 이야기했던가?”
“무슨 이야기를 말씀하시는지?”
김악은 재빨리 왕건을 향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기실 내가 어렸을 때도 워낙 풍류를 좋아했어. 그래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고도 몇 번 치고. 그리고 우리 집에는 어렸을 때 나에게 학문을 가르쳐주던 서생이 하나 있었지. 아버님께서는 그 서생에게 삼국사를 읽어달라고 자주 부탁하셨어. 그래서 서생이 삼국사를 읽어나가면 아버님은 눈을 감고 그것을 들으셨다.”
“세조께서 학문을 가까이하셨으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김악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서생은 삼국사에서 신라 대야성주 김품석이 부하의 아내를 건드렸다가 그 부하의 배반으로 성을 잃은 부분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부분을 여러 번 읽어보라고 그 서생에게 말했어. 그러자 눈치 없는 그 서생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부분을 계속 읽었다. 정말 눈치 없는 서생은 한번 혼이 나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야기에 빠져든 김악이 물었다.
“그 당시에 나는 또다시 풍류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그 와중에 아버님이 삼국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지. 그리고 아버님은 오늘 결단을 내리시겠다고 외치더니 나를 향해 화살을 쐈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날아든 화살에 맞으며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지.”
“헉.”
“근데 다행히 나는 안 죽었다. 아버님은 나를 위협했지만 사실은 맞아도 안 죽는 명적을 쏜 거지. 명적을 쐈기에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던 거야.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을 한 나는 이후로 풍류를 자제하는 성격이 됐다.”
“…….”
왕건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침묵이 감돌았다. 나도 충격에 빠졌다.
‘어렸을 때 저런 경험을 해서 풍류를 자제하는 성격이 됐다면서 부인이 29명?’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왕건은 김악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젊었을 때 동료 장수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꼭 그때 아버님이 나한테 화살을 더 쐈어야 한다고 말하더군. 김악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농담을 하는 듯한 왕건의 어조에 김악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려 했다.
“그것이…….”
그 순간 나는 재빨리 김악의 발을 밟았다. 김악은 그 바람에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건이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대체 왜 김악을 구해준 거냐? 가만히 있었으면 김악이 불경죄를 저질렀을 텐데. 확 녹봉을 몇 달 끊어놨어야 하는데.”
“예? 폐하 도대체 왜?”
김악이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며 외쳤다. 아마 내가 아니었으면 김악은 그대로 화살을 더 쐈어야 한다는 말에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왕건이 젊었을 때야 그냥 일개 장수니 그런 농담을 한 거고 지금은 어쨌든 국왕인데 그러면 곤란하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김악이 왕건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도운 것이다.
“내가 이야기 중간에 눈치 없는 서생은 혼이 나야 한다고 이미 말했는데. 김악, 너는 눈치가 없잖아! 팔관회를 앞두고 그리 초를 쳐!”
왕건이 그런 김악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폐하.”
김악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장내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쨌든 국선선발에 나서는 바람에 몇 달은 휴가를 얻었으니 이런 꼴은 안 봐서 좋군.’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국선선발과 관련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음 날 계획대로 배수현과 오지수를 비롯해 나를 도와주려고 마음먹은 아이들은 모두 상산저에 몰려왔다.
‘그나마 하인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2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위해 하인들이 차와 다과를 쉴 새 없이 날랐다. 아이들은 신나게 다과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연우, 너네 집 정원을 잘 꾸며놨다. 다과도 먹었으니 정원이나 좀 구경하자.”
“그래.”
순식간에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돌더니 모두가 우르르 정원으로 나왔다.
“아니 기왕 모였으면 우선 준비를.”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았다.
‘팔관회 날까지 뭔가를 해낼 수 있을지?’
나는 속으로 그런 근심을 하며 우선 아이들을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한참 정원을 구경하고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여기저기서 주저앉는 애들이 나타났다.
“역시 팔관회 준비는 만만치 않구나. 힘들어서 몸이 노곤하다.”
“그래 모두 낮잠 잠깐만 자든가 쉬고 나서 생각하자.”
그러더니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몇몇 아이는 하품을 하더니 바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팔관회 준비를 했다는 거야? 아무것도 진행된 것이 없잖아!’
나는 속이 타서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미 장내의 분위기는 내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에구구. 저도 피로하네요. 언니도 좀 쉬세요.”
제일 신나게 논 오지수가 내 곁에서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눕히며 잘 태세를 취했다.
“어, 그래.”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오후도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식사를 하십시오. 영공 각하께서 연우 아가씨를 돕기 위해 여러분들이 오셨다는 것을 알고 식사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인들이 상을 차리며 말했다. 확실히 진수성찬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 사이에 껴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어영부영 있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산저에 모인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이제 집에 가야 하는데.”
“정말 팔관회 준비는 만만치 않네. 이 많은 사람들이 온종일 애를 썼는데도 된 일이 하나도 없어. 어쩌지?”
아이들은 끝나갈 시간이 되니 발을 동동 굴렀다.
“우선 뭘 할지부터 정해야지.”
그제야 배수현이 전면에 나서더니 말했다.
“뭐 팔관회 때야 향가를 부르고 춤을 곁들이는 거 말고 더 할 게 있겠어? 몇 년간 팔관회 국선선발을 봐도 다 그렇게 했는데. 굳이 어설프게 다른 거 했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해?”
개경에 살아서 지난 수년간의 팔관회를 다 구경한 아이들 몇몇이 말했다.
“연우 네 생각은 어때?”
배수현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향가로 가자.”
이미 일의 진척 속도를 보고 뭔가 새로운 걸 시도했다가는 시간을 못 맞출 거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냥 무난히 남들이 하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뭐 일은 쉬워. 내가 법왕사에 아는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이 진감선사의 제자야. 음악에 능하다고. 그러니 그 스님에게 가서 향가 지도를 받자.”
배수현이 순식간에 일을 진행시켰다.
“와아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힘들었잖아. 내일 바로 법왕사에 가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니 내일은 각자 집에서 푹 쉬고 내일모레 학관이 끝나면 다 함께 법왕사에 가서 스님을 만나보자. 내가 말을 해놓을게.”
배수현이 말하자 아이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그리고 귀가를 위해 아이들은 하나둘씩 상산저 앞에 세워둔 자신들의 수레에 올라탔다.
나는 저택 밖까지 나와서 아이들을 전송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 힘들었지.”
나는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인사를 건넸다.
‘실질적으로 일 비슷한 거라도 한 것은 막판 10분 동안 의논한 거밖에 없잖아.’
어쨌든 그러긴 해도 이리 상산저까지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했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오늘 국선선발 준비를 근심하는 와중에도 즐거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손까지 흔들며 멀어지는 수레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 처소에 돌아와 혼자 앉아 있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진짜 딱히 하는 게 없어도 힘든 게 사실이구나.”
그 사실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국선 선발을 어떻게 준비할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일모레 법왕사에 가도 왠지 소풍처럼 일이 흘러갈 거 같았다. 일을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내가 뭔가 대비를 해야 했다.
‘역시 내가 가진 미래 지식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에 유행하는 노래를 섣불리 사용할 수는 없었다. 현대인의 취향에 맞는다고 1천 년 전 고대인의 취향도 맞출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니 무엇보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현대 가수나 아이돌들의 노래나 춤을 따라 하기 어려워.’
내가 다니던 학교 인문대 대학원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대중문화나 아이돌산업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대학원생 특성상 다른 전공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연구하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법이었다.
그 덕에 나는 현대 대중문화산업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간단해 보이는 아이돌 안무라도 최소 몇 년은 단련을 거친 사람이 춰야 멋있어 보인다. 달랑 2달 남았는데 준비할 수가 없어. 뭔가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해. 간단하면서도 시각적 효과는 극적인. 드라이아이스 같은 게 있으면 좋은데……. 없으니.’
무대 효과 쪽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비눗방울을 떠올렸다.
‘그래. 그건 지금 시대에도 만들 수 있고 고대인에게도 감명을 줄 만하다. 향가를 부르는 건 평범한 수준이라도 그런 무대 효과를 곁들이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겠지. 비누를 우선 만들어야겠어’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향가를 부를 때 음률, 가락, 곡조는 법왕사의 그 스님에게 배운다고 쳐도 가사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거지. 그러면 나에게도 다 방법이 있다.’
나는 고려 중후기와 조선시대에 활약했던 뛰어난 시인과 문장가들의 글을 상당히 알고 있었다.
현대 대학원에서 한문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것들이었다.
‘그중 훌륭한 거 1~2개를 추려서 향가 가사로 쓰면 되지. 지금 시대 사람들의 취향에도 딱 알맞을 게 확실하고.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