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0화
60. 기도
나는 왕건의 기분이 좋은 틈을 타서 물었다.
“표천현의 도사들과 이곳 주민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백성들이야 죄를 지은 것이 없다. 저들에게 속았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판단할 것이 없고 저 도사들도 괘씸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느냐? 수완이 있으니 이곳 은광의 관리를 맡겨도 되겠지. 윤신달이 저들을 감독하게 하고 말이다. 허허허.”
확실히 성격이 모나지 않은 왕건이라서 그런지 일을 온건하게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곳에서 나는 은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또 표천현 백성들은 부역에 대해서는 생각이 어떠십니까?”
“그야 여기에서 나는 은의 8할은 개경으로 가져와야 한다. 1할은 은을 캐낼 때 비용으로 표천현에 주고 다른 1할은 군졸들을 부려 채굴을 돕고 운송을 맡을 파평현에 주고. 표천현 사람들에게야 미안하지만 고생을 좀 해야겠지.”
왕건이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니 이상한 모양이었다.
‘역시 표천현 사람들에게는 고생길이 열렸구나. 은광에 나오는 은 1할을 줘봤자 채굴비용으로 퉁치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앞으로 대대로 부역에 시달려야 하니. 표천현 사람들은 진상을 밝힌 나를 원망하겠군. 차라리 예전에는 도사들이 속임수를 쓰긴 했어도 표천현 사람들에게도 베풀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마음이 찜찜했다.
‘그리고 사실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도 나한테 있긴 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왕건을 바라보았다. 왕건과 자주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왕건은 일국의 왕이었다.
막상 그 앞에서 뭔가 요청을 한다고 생각하니 떨리긴 했다.
‘그래도 표천현 사람들을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할까?’
나는 짧은 순간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왕건이 나를 진짜 신임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왕건은 나를 만날 때마다 항상 농담도 하고 웃는 낯으로 대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은광의 채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폐하께서 채굴되는 은의 8할을 가져가시겠다고 했는데 그 기준은 장부에 나와 있는 1년 생산량입니까?”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그러겠지? 이 장부에 1년에 산출되는 은의 양이 적혀 있으니. 또 내가 개경에서 데려온 은광기술자도 이 수치가 맞다고 했다. 왜 그 뻔한 것을 묻느냐?”
왕건이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장부에 적힌 것보다 더 많은 은이 생긴다면 그 나머지는 어찌 됩니까? 그것을 표천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제가 용돈으로 써도 됩니까?”
나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더 많은 은이 생기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왕건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에게 은을 더 많이 생기게 할 방책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느냐? 허허허. 그래,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나머지는 내가 너한테 용돈으로 주마. 이번에 이 표천현의 은광을 발견하는데 연우 네 공이 크기도 하고. 상산백이 용돈을 조금 줘서 그런가? 내가 인심을 쓰마. 그런데 은이 더 안 나올 텐데 이게 인심을 쓴 거라 할 수 있는 건가?”
왕건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약조를 하신 것입니까?”
내가 재차 물었다.
“그렇다니까? 자 다들 들어라. 내가 맹세하니 이 장부에 나온 것보다 많은 양의 은이 생산된다면 내가 그 여분은 상산의 임연우에게 용돈으로 주겠다.”
왕건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은광기술자입니까?”
나는 압수된 은광석을 살피는 한 중년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
왕건이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은광기술자 쪽으로 가서 물었다.
“은 1돈을 얻으려면 은광석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은광석 질이 좋아 잘하면 3근의 광석을 제련하면 1돈이 나올 것입니다. 제련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은광기술자가 말했다.
“정확합니다. 약간 질이 떨어져서 불순물이 많으면 4근까지 써야 합니다.”
조심스레 한쪽에서 눈치만 보던 표천현의 도사들도 거들었다. 자기들 전문분야가 나오니 입이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은광석 3근만 저에게 주십시오. 폐하. 그리고 제가 이 은광석 3근에서 1돈의 은을 만들어 바치면 나머지는 제 용돈입니까?”
“아니 연우야.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아무리 네가 신통하다 해도 말이다.”
왕건이 웃으면서 물었다.
“도관 한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려고 합니다. 김유신도 출정하기 전에 기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며칠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표천현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한동안 머무르려던 참이었다. 그래 연우 네 뜻을 펼쳐 보거라.”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은광석 3근을 가지고 도관 내 한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표천현의 도사들이 쓰던 저울이며 화로, 그릇 같은 것들이 있었다.
“잘됐군. 이제 재만 있으면 되는데.”
나는 내 거처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누가 나를 훔쳐보거나 감시할까 봐 걱정이었다.
‘내가 아는 연은분리법의 비밀을 남한테 알려줄 수는 없지.’
다행히 나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재빨리 도관의 주방에 가서 아궁이에서 재를 바구니에 가득 가져왔다.
은광기술자나 표천현 도사들의 말대로 이 시대에 은을 제련하기가 어려웠다. 은광석도 얼핏 보면 그냥 돌처럼 보였다.
전문가가 봐야 은광석인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표천현 주민들도 도사들의 지시를 따라서 돌을 모으면서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물질들과 섞여서 돌처럼 보이는 광석에서 은을 빼내야 하는데 이 시대에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3근의 광석에서 은을 1돈 밖에 못 얻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시대에 연은분리법이라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그래서 은광석에서 편하게 더 많은 은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미래의 사학도인 나는 이 연은분리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연은분리법이 놀라운 기술이기는 하지만 아이디어가 독특하긴 해도 간단한 것이라 조선에서 개발된 이후 다른 나라도 다 따라 했다.’
당연히 나는 이 연은분리법을 사용해 은광석에서 더 많은 은을 뽑아내서 왕건에게는 장부에 기록된 분량만큼을 바치고 나머지는 내가 쓸 작정이었다.
‘그중 일부를 표천현 사람들에게 좀 나눠주면 그 사람들이 날 원망하지 않겠지. 윤신달에게도 좀 챙겨주고.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챙긴다면 앞으로 립밤 같은 걸 만들 필요도 없다. 정치자금을 쓸만한 돈도 확보되는 거니. 진짜 이 재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어.’
솔직히 이제까지 나와 상산의 힘을 키운다고 내가 이리저리 뛰었지만 성과를 거둔 것은 적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성사시킨다면 정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연은분리법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은광석에는 납도 자연스레 많이 섞여 있다. 부족하면 납을 따로 구해와서 은광석에 섞어도 되고. 그리고 재를 깐 화로 안에 은광석을 넣고 불을 때면 빨리 녹는 납이 먼저 액체가 돼서 재와 반응해 다른 불순물과 함께 사라지고 은만 남는 거지. 재도 일종의 화학적 성분이 있는 물질이니.’
아이디어는 간단했는데 고대에는 이것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말로는 간단하지만 아마 내가 실제로 이걸 해보려고 하면 만만치 않게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며칠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왕건에게 말해둔 것이다.
이미 표천현의 도사들은 연단술을 하는 척하고 제련과 관련된 기구들을 준비해놓았다. 납도 준비되어 있었다. 연단술에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 납이었다.
그 덕에 나는 별 장애 없이 내가 아는 이론대로 연은분리법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만만치 않네.’
나는 새삼 그것을 느꼈다. 내 손재주가 탁월한 것도 아니고 화로는 어느 정도 온도로 달궈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 모두 기술이었다. 적절한 때에 물을 부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잡기도 어려웠다.
나는 종이에 내가 얻어낸 정보들을 적어가며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몇날 며칠을 밤까지 새어가며 나는 화로를 달구고 은광석을 조금씩 넣어가며 실험을 반복했다.
‘나 혼자서 연은분리법의 효과를 온전히 발휘할 수는 없겠어.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실험을 거듭해야지. 그래도 당장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눈앞에 있는 은을 바라보았다. 내 서투른 솜씨 때문에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2돈 정도 되는 은이 놓여 있었다.
나는 완전히 식은 그 은을 손으로 집어 들고 도관을 나섰다.
* * *
“폐하를 알현하고 싶습니다.”
나는 도관을 경비하는 부장에게 물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 그래도 폐하께서 아가씨가 알현을 청하시면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여러 사람들과 이곳 일을 수습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부장은 나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왕건은 윤신달 등을 데리고 지도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은광 기술자나 표천현의 도사들도 말석에 서서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은광 운영에는 표천현의 도사들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용서해 주고 끼게 한 것 같았다. 앞으로 은이 생산되면 이걸 개경까지 운송해야 하는데 어느 경로로 운송을 하고 경비는 어찌할 것인지를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왕건이 말했다.
“그래 천지신명께서 네 기도는 들어주셨느냐?”
“예.”
나는 그러면서 소매 속에서 내가 얻어낸 은 2돈을 내려놓았다.
“거의 2돈은 되어 보이는데 맞나?”
왕건은 약간은 놀란 기색으로 은광 기술자를 보며 말했다.
“상등품은 아니지만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져간 은광석 양으로 이만한 은을?”
은광 기술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게 어찌? 혹시 은을 숨겨놓았다가 제련한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닙니까?”
표천현의 도사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제가 그런 거짓말을 쳐서 얻는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왕건의 눈치를 살폈다.
‘왕건이 과연 약속을 지킬까?’
어차피 약속을 했다고 해도 왕건이 어기면 그만이라서 나는 조마조마했다.
“허허허, 이런 일마저 가능하다니. 정말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응. 이게 가능할 줄은. 은이 2배가 나와! 그냥 장난으로 약속을 한 건데.”
왕건은 망연한 표정으로 내가 제련해 온 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폐, 폐하.”
곁에서 이 일을 함께 본 윤신달도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에잇. 그래도 연우야. 네가 가져가는 나머지를 떼어 표천현 백성들에게 넉넉히 주거라. 허허허. 고생해야 하는 파평 사람들에게도 좀 풀고. 그래 내가 너무 과한 용돈을 줘버렸구나.”
왕건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약속을 지킨다는 말이었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예 절까지 올렸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해도 왕건이 이러는 것은 대단한 호의였다.
‘왕건이 겉으로만 나를 웃으면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신임하는 것이 맞다.’
나는 이번 일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일이 바빠지겠군. 내가 혼자 연은분리법을 계속 연구할 수는 없고. 상산 사람들을 불러서 개경에 제련소를 차려야겠군.’
나는 내가 가진 연은분리법의 기술을 남한테는 주기 싫었다. 대대로 상산에서 산 사람들을 개경에 불러와서 일을 시킬 작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은제련 기술자들도 포섭을 해서 연구를 심화시켜야지. 물론 그들의 가족은 상산으로 이주시키고 말이야. 내가 대강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들의 경험이 더해지면 엄청난 성과가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