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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59화 (5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9화

59. 연단술

표천현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준 처소는 겉으로는 도관으로 보였다. 이 도관을 일종의 관청으로 삼아 도사들이 표천현의 행정을 하는 것 같았다.

왕 노인의 말을 들은 나와 일행들은 도관 안을 유심히 살폈다. 여러 가지 도가의 물품들이 그럴듯하게 있긴 했다. 도가의 연단에 쓰는 화로, 솥, 재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외에도 도교의 신을 그린 그림들도 여러 점 있었다.

분위기 자체는 부유한 도관이 맞았다.

‘신라 말의 난세 때는 각지의 사찰들도 자체 군사력을 가지고 인근을 지키기도 했고. 도관이 한 개 현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어. 어차피 지금도 고려 조정이 전국의 군현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 표천현에 머물고 있는 일행들의 고심은 깊어졌다.

“가장 큰 의문은 저들이 어떻게 버티느냐는 것입니다. 딱히 저들을 하나로 묶어줄 교리도 변변찮게 없는 것 같은데.”

자인 대사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제는 세금 문제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윤신달 장군께 대접을 그리 받고 성과를 못 낸다면……”

최지몽도 난감한 기색이었다. 다만 왕 노인만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지난 며칠간 이곳의 도사들과 대화를 계속 나눠봤습니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도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종교 쪽으로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 긴 세월 동안 좌도의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교리 같은 것이 얼핏 보면 아무 쓸모가 없어 보여도 그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오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자인 대사가 말했다.

“정신적으로 뭔가가 없다면 물질적으로 저들을 묶어주는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군사력이든, 재력이든 말입니다. 이 표천현에 그것이 있겠지요. 저들은 좌도를 표방하면서도 그들의 세력을 밖으로 넓히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왕 노인이 논의를 진전시켜나갔다.

나는 장내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뭐랄까? 이곳 사람들의 행동에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조선 후기에 뭔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고려사를 연구할 작정이었지만 당연히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부했다.

근데 지금 표천현에 와서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 뭔가 딱 떨어지지는 않지만 유사한 뭔가가 있었다. 근데 머릿속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생각이 잘 안 나네. 나이가 30대라서 그런가? 근데 지금 내 신체는 10대인데.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10대의 몸에 빙의하면 기억력은 어찌 되는 걸까?’

계속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오히려 온갖 잡념이 솟아올랐다.

고민에 빠져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었다.

“재력이 있어야 군사력을 유지시킬 수 있으니 그 둘은 하나요. 하긴 윤신달 장군도 이 사람들이 자력으로 표천현을 지켜냈다고 하지 않았소?”

자인 대사도 왕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좌도들이 표천현의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긴 인망을 샀으니 이리 오래 버티는 것입니다. 이들이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정 정도의 세금과 돌탑 쌓기며 기도에 동원하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그게 그들의 진면목일 수 있습니다.”

왕 노인은 자인 대사와 주고받으며 계속 논의를 진전시켰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왕 노인과 자인 대사가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는데 왕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앗!”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왜 그러십니까?”

왕 노인과 자인 대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최지몽이 놀라서 물었다.

“알았습니다. 은광! 은광이 이 표천현에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내가 외쳤다.

‘파주에는 은광이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 기록에 있다. 조선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은광이었어.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광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땅을 깊이 파는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광물이 땅속에 깊이 묻혀 있지 않는 곳만 개발됐다. 파주 은광도 즉 광물이 땅에 드러나 있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고대인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파내지 않아서 은광의 은 양도 많고 땅 위에 나와 있는 은광석도 많을 것이다.’

이 표천현에 굴러다니는 돌 중에 은광석이 많다는 말이었다.

‘이 위장 도사들은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표천현 사람에게 숨겼다. 그래야 자신들이 이득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 하지만 은광석은 모아야 하니 돌탑을 쌓는 일을 시킨 거야.’

표천현 사람들이 탑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돌을 모아오면 그중에서 은광석을 빼돌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가져온 돌을 살피다가 은광석이 특히 많이 나는 지점은 땅을 어느 정도 파기도 했을 것이다.

‘이곳은 수운이 발전한 지역이라 은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쉽다. 임진강을 타고 조금만 나가면 예성강에 닿고 그곳에는 외국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니까. 사실 은을 캐고 이걸 팔아치우는 과정에서 들킬 확률이 높은데 수운이 편하고 혼란기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쉽게 해결했네.’

나는 모든 게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광이 있다고 생각하면 윤신달이 표천현에 대해 가진 의문도 쉽게 해소되었다.

‘고대라서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아 조금만 은을 파도 엄청난 이득을 챙겼을 것이다. 돈이 많으면 아무리 난세라도 고을을 지키는 것은 쉽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도 이 재력을 바탕으로 무기를 사고 군사를 훈련시키면 도적들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궁예가 이 지역을 평정할 때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항복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도 그래. 이런 교리에 사람들이 따른 것은 이곳 도사들이 그래도 표천현 사람들을 약간은 도와줘서 그렇지. 어쨌든 표천현 사람들은 그런 지원이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는 잘 살았을 테니.’

다만 미래 지식 덕에 파주에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납득해 버린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은광이라니. 그 무슨. 설마 연우 아가씨는 광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십니까?”

최지몽이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은광이 확실합니다.”

나는 애매하게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물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허허허.”

최지몽이 난감한 듯 웃는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왕 노인이 말했다.

“확실히 은광이나 어떤 광물이 있다고 하면 한 가지 의문은 해소가 됩니다.”

“그건 또 무엇이요?”

자인 대사는 여전히 충격에서 못 벗어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 굳이 불교처럼 널리 알려진 종교가 아니라 도교로 포장을 했는지 말입니다. 도가에서는 연단을 하니 화로며 광물과 관련된 여러 기구, 재료들을 의심 없이 들여올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금속들을 제련할 때도 쓰이는 것들입니다.”

왕 노인이 대답했다.

미처 나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끄집어낸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합니다만.”

자인 대사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연우 아가씨가 제시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표천현의 상황에 부합하긴 합니다. 그러면 윤신달 장군께는 이리 말씀을 올리는 것이.”

왕 노인이 한마디 하자 최지몽은 또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될 수 있으면 서둘러 이 표천현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은광에 대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면 표천현의 도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창밖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없나 유심히 살폈다.

고려 조정이 아무리 느슨하게 지방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지만 개경에서 가까운 은광을 방치할 리는 없었다.

광산은 중앙 직할로 운영하려고 할 것이 뻔했다. 표천현 도사들도 그래서 끝까지 이 사실을 숨긴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체적인 군사력도 가지고 있어서 일이 위험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아가씨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윤신달 장군께 가서 이를 알려야 합니다. 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파평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 노인 역시 기민하게 말했다.

우리는 함께 온 윤선지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랴부랴 파평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행은 입을 모아 윤신달에게 말했다.

“표천현에 은광이 있다는 의심이 듭니다.”

“은광이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윤신달은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진짜 은광과 관련된 문제라면 윤신달이 홀로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다. 윤신달은 재빨리 개경으로 이와 관련된 서신을 보냈다.

* * *

“정말 표천현에 오니 돈이 생기는구나. 어렸을 때 아버님이 말려도 듣지 말고 한번 와볼 걸 그랬다.”

왕건이 표천현의 도관을 둘러보며 말했다.

“폐, 폐하. 무슨 그런 말씀을.”

왕건을 따라온 김악은 당황해서 말했다. 한쪽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윤신달이 서신 한번 보냈다고 왕건이 직접 올 줄은 나도 몰랐는데. 아무리 개경과 이곳이 가깝다지만’

그야말로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개경에서 2천 명의 병력들과 함께 바로 파평현까지 달려온 왕건은 윤신달과 나, 최지몽과 함께 표천현으로 진입했다. 왕 노인과 자인 대사는 고령이고 쉬고 싶다고 해서 두고 왔다.

왕건은 무슨 군사 작전을 벌이듯 표천현의 사방을 봉쇄하고 들어왔다. 2천 명이면 이 시대에 상당한 대병력이었다.

표천현의 좌도들은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고려군의 명을 따랐다.

“도관의 지하 창고에서 은광석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이 외국 상인과 밀무역을 한 장부도 발견되었습니다.”

도관을 수색한 부장들이 왕건에게 그런 보고를 올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압수한 장부를 바쳤다.

“으하하하. 꽤 짭짤하구나.”

왕건은 흡족하게 웃으며 장부를 넘겼다.

도관에 있던 도사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왕건은 표천현에 들어오면서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기는 했지만 포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사들이 은광이 있다는 것을 숨기고 몰래 캐서 밀무역을 하기는 했어도 이 시대 기준으로 죄를 지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워낙 난세라 아직 이에 관한 법령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다만 왠지 도관에 있기가 힘들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대군이 몰려오니 무슨 일이 터졌나 하고 표천현 백성들이 도관 밖에 가득 몰려와 있었다.

그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 백성들에게도 알려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찌 될지. 아니 저 도사들이 은광을 숨겨놓고 저랬다니.”

“그런데 저 사람들 덕에 그동안 우리가 좀 괜찮게 산 건 맞지 않나? 앞으로는 부역이 늘어나는 거 아니야? 들키지나 말지.”

백성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때 군졸 하나가 도관에서 달려 나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군졸의 말을 듣고 도관 안에 들어서니 왕건은 이 일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하나씩 치하하고 있었다.

“장군의 예민함 덕에 이 은광을 얻었군. 하하하.”

먼저 윤신달을 칭찬한 왕건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마디씩 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연우 너는 진짜 용하게 이런저런 일을 잘 뚫어내는구나. 참 신통하다.”

왕건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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