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58화 (5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8화

58. 표천현

파평현까지 향하는 여정은 편했다. 윤선지와 파평 군사들은 손님들이 불편한 것이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나는 그저 수레에 올라 멍하니 있으면 됐다. 거기다가 파평현은 개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참 이런 게 정말 여행이지.’

나는 평온한 여행을 하면서 문득 왕무와 함께 말을 타고 백제 군사들을 피해 다니던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 그때에 비하면 너무 편했다. 다만 그 때문인지 나아가는 속도가 느릿느릿했다. 거기에 자주 쉬었다.

적당한 곳을 보면 바로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파평 군졸들이 손님들에게 간식이나 차를 가져다주었다.

‘너무 느려서 갑갑할 정도야. 하긴 노인들도 함께 여행을 하고 있으니.’

나는 왕 노인과 자인 대사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고령인 것이다.

고령의 손님을 모시고 있으니 파평 사람들이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어쨌든 이 인근은 커다란 강 세 줄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참 지리적으로 요충지라고 할 만합니다. 일찍이 우리 스승님께서 폐하와 폐하의 부친이신 세조를 만나셨을 때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돗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자인 대사가 풍수지리에 능한 도선의 대사답게 그런 말을 해줬다.

“오호. 그렇습니까?”

왕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자인 대사는 그러고 보니 도선 대사를 모시며 재밌는 것을 많이 봤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두 사람이 있는 돗자리에 가서 앉았다.

“도선 국사께서 폐하께 왕위에 오르실 것을 예언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리고 나는 자인 대사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허허허, 스승님께서 며칠 동안 송악에 머물며 왕위에 오르시기 전의 폐하와 또 그 부친이신 세조의 대접을 받다가 가셨습니다. 그때 정말 여행 때문에 지쳐 있었는데 그런 대접 덕에 체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승님을 모시면서 그런 예언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내가 없었을 때 그런 말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송악과 그 인근 풍수를 칭찬하면서 삼한의 중심이 될 땅이며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입지라 하셨습니다. 세줄기 강 때문에 수운이 편하고 농사도 잘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왕은 이런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자인 대사는 웃으면서 그리 대답했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왕 노인이 잘 호응해 주자 신이 난 자인 대사는 자신의 스승인 도선과 다니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일행은 한참 쉬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윤선지는 딱히 일행을 독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파평현에는 내일 도착할 것 같습니다. 파평에 가려면 칠중하를 건너야 하는데 배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슬슬 쉬면서 칠중하 앞까지만 가서 하루를 묵고 내일 오전에 강을 건너면 될 것 같습니다.”

칠중하는 오늘날의 임진강이었다. 임진강만 건너면 오늘날의 파주인 파평현까지는 금방이었다.

“알겠습니다.”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편한 여행을 즐겼다.

* * *

그리고 다음 날 역시나 거하게 대접을 잘 받으며 일행은 파평현에 들어섰다. 파평현 장군 윤신달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귀한 손님들이 이곳까지 와주셨습니다.”

반백의 머리칼에 빈틈없어 보이는 인상의 윤신달이 공손하게 말했다.

“너무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일행의 대표로는 자인 대사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 뒤에서 나와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확실히 너무 후한 대우를 받아서 부담이 되네. 원래 나는 그냥 와서 표천현을 둘러보고 시간만 때우다 갈 작정이었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윤신달이 말을 이었다.

“여정에 피로가 심하실 테니 이 파평현에서 좀 머물며 단단히 준비를 하고 한번 표천현을 둘러봐 주십시오.”

그렇게 일행은 또 윤신달의 저택에 가서 대접을 받았다. 식사도 하고 또 중간마다 나오는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왕건이나 임희나 모두 나에게 윤신달이 상당한 재력이 있다고 말했는데 저택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음식이나 차도 고급이었다.

‘하긴 이 일대는 농사도 되고 자인 대사 말처럼 교통이 편해서 교역이 활발한 곳이니.’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윤신달이 재력이 있다고 해도 너무 대접만 받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장군께서 표천현의 일로 저희들을 부르신 것 아닙니까? 표천현에 대해 장군이 생각하시는 바도 좀 듣고 싶습니다만.”

최지몽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일을 좀 하겠다는 말이었다. 역시 받아먹기만 하려니 찜찜한 모양이었다.

“표천현의 좌도들이야 원래 유명했고 이제는 그 역사가 100년에 이릅니다. 물론 중간에 신라 조정에 의해 그들이 체포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좌도들이 중간에 수십 년간 사라졌습니다. 한참 지나서 눈치를 보며 소규모로 드문드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30여 년 전 전국에 난리가 나자 그제야 세력을 엄청 늘렸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진짜 옛날 기세를 완벽히 회복했습니다.”

윤신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들의 역사에 대해 아시는 것을 보니 조사를 좀 하신 것 같습니다.”

최지몽이 물었다.

“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예의 주시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이 30년 전 혼란기에 이 일대에는 수적들과 도적들이 엄청 날뛰었습니다. 수운이 편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니 수적들이 설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아버님과 그 이후 나 역시 젊은 시절 엄청난 고생을 하며 겨우 파평을 지켰습니다. 이 난리를 못 견디고 무너진 군현도 많습니다. 그냥 도적들이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표천현의 좌도 무리들은 거뜬하게 사방의 수적들을 막아 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윤신달이 예사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의 본거지와 가까운 곳에 사이비 종교가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으니 엄청 신경을 쓰는 기색이었다.

‘이거 그냥 유람한다는 생각으로 대충 둘러보고 오면 안 될 기세인데.’

윤신달의 그 표정을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의 교리 같은 것들은 따로 없습니까? 돈을 빨리 벌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까?”

자인 대사는 흥미가 동했는지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돈 타령만 하는 무리들입니다.”

“허허허. 대개 돈을 벌게 해준다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재산을 강탈하고 도망치는 것이 그런 좌도들의 수법입니다. 그런데 표천현의 무리들은 아예 한곳에 터를 잡고 뿌리가 깊은데 아무 교리가 없다니. 교도들은 그럼 좌도들을 믿으면서 무엇을 합니까?”

자인 대사는 난감한 듯 웃으며 말했다.

“돌탑 같은 것을 많이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이미 표천현에 가보면 그 교도들이 쌓아 올린 돌탑이 많습니다. 돌탑을 쌓아 올리며 기도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윤신달이 대답했다.

“돌탑? 아 그러면 그 좌도의 교주가 승려 복색을 하고 있습니까? 탑을 쌓는다면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자인 대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우두머리들은 도교의 도사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윤신달이 그리 말했다.

“삼한 땅에도 도교가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크게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는데 신기한 일입니다. 왕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인 대사가 왕 노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행 중에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느낀 것이지만 이 왕 노인은 도교나 중국 쪽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그런 것이 느껴졌다.

“한번 가서 살펴봐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좌도의 무리들이 인심을 얻으려면 승려 흉내를 내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기이해 보이긴 합니다. 무슨 도교와 관련된 교리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왕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면이 있는 좌도들입니다. 한번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곁에서 계속 듣던 최지몽이 말했다. 오가는 말을 듣고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도 별생각은 없지만 한번 둘러보고 싶기는 하네.’

그리고 윤신달은 최지몽의 청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 시기에 여러분들을 초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곧 추수할 때라서 표천현에 세금을 얼마나 받을지 협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을 함께 보낼 계획입니다. 조사를 위해 따로 사람을 파견한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숨길 것입니다. 그러니 세금 업무를 논의하기 위해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함께 가면 좋을 듯합니다.”

“확실히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장군의 말씀을 들으면 표천현의 좌도들이 나름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파헤치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최지몽이 그 점을 지적했다.

“표천현의 좌도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기는 하지만 내 군사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있습니다. 표천현의 호구 같은 것을 따져보면 모을 수 있는 군사 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거기에 세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때 상당한 군졸들이 함께 따라갈 것이니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윤신달이 여러 가지를 준비해 왔는지 바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최지몽을 비롯한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대로 일행들은 파평현의 군졸들과 함께 표천현을 향해 나아갔다.

이 파평 군졸들을 이끄는 것은 윤신달의 아들 윤선지였다. 파평과 표천은 거의 붙어 있는 고을이라 금방 갈 수 있었다.

‘확실히 돌탑들이 많군.’

다만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예술성 있는 탑은 아니었다. 그냥 작은 돌들을 쌓아올려 만든 탑들이었다. 노인들이며 어린아이들이 돌을 주워다가 또 탑을 쌓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윤신달에게 대접을 받았으니 나름 열심히 탐문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돌을 들어 탑을 쌓는 노인 하나를 보며 물었다.

“이 돌탑은 왜 쌓는 것입니까?”

“그야 부자가 되기 위해 탑을 만들어 비는 거지. 돈! 돈! 돈!”

노인은 그러더니 돈 타령을 하면서 돌을 쌓아 올렸다.

‘참 사이비 종교라도 참 신기한 종교군. 노골적으로 이러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 사이에 껴서 계속 걸었다. 곧이어 도복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나와서 파평 군졸들을 환영했다.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확실히 표천현 좌도의 간부쯤 되는 것 같았다.

“허허허, 올해는 농사가 좀 애매하게 돼서. 잘 봐주십시오.”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엄살을 피우며 윤선지에게 말했다. 세금을 적당히 조금 내려고 그러는 것이다.

“상황을 잘 살피고 결론을 내겠습니다. 어쨌든 그동안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은 없습니다. 하하하.”

윤선지 역시 짐짓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어쨌든 좀 쉬시다가 가십시오. 처소는 미리 마련했습니다.”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리를 안내했다. 왕 노인은 자연스럽게 도복을 입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상단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친화력이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표천현에서 마련한 처소에 당도하자 왕 노인은 우리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도교와 관련해 뭔가 최소한의 가르침을 받지도 않고 인연이 닿은 것도 아니고 그냥 도복만 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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