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7화
57. 파평현
윤선지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무엇보다 윤신달이 대체 뭘 원하는지도 이해가 안 가.’
윤선지의 말을 들어보면 표천현에 있는 좌도의 무리들이 딱히 문제도 안 일으키고 잘 있는 것 같았다.
세금을 안 내는 것도 아니고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뭐가 궁금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내 곁에 있던 임희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 그 좌도들이 100년이나 버텨왔다는 말입니까? 그것참 신기합니다. 그런 좌도의 무리들은 교리 같은 것이 부실해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인데 100년이나 내려오다니. 허허.”
임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윤선지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버님도 상산백처럼 생각하시고 계십니다. 거기에 표천현의 좌도들이 내세우는 교리도 웃깁니다. 돈을 빨리 벌어서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교리를 내세워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교리 같지도 않은 교리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윤선지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윤신달이 왜 이 문제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현대로 따지면 다단계 같은 건가? 하긴 돈 빨리 벌게 해준다고 선전하는 것도 똑같고. 확실히 이러면 표천현을 관리하는 윤신달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겠지.’
오늘날에도 돈 빨리 벌게 해준다고 선전선동을 하는 사이비 종교가 한 도시를 장악할 정도로 창궐하면 당장은 사고가 안 나더라도 사법당국이 주의를 기울여 감시할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나한테 와서 이러냐는 거지. 곧 나주원에 가서 지내며 동양원 부인도 만나봐야 하는데.’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동양원 부인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 나는 왠지 모르게 빨리 동양원 부인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찮은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거기에 윤신달이 왜 신경을 쓰는지는 이해가 갔지만 이 문제가 해결이 어려워 보였다.
‘아마 왜 이런 사이비 종교가 창궐하는지 알아보려는 의도 같은데. 날 불러서 어쩌자는 거야.’
이런 생각이 팽배한 나는 직접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 부족한 재주로 표천현에 가봤자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친 것뿐입니다.”
“연우 아가씨 혼자 부담을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께서 인맥을 발휘해 여러 명사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수행이 깊은 고승과 박식한 분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아가씨께서 함께하신다면 반드시 뭔가를 해내실 것입니다.”
윤선지가 말했다.
“그럼 그…….”
초청한 고승이나 학자들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나는 말을 멈추었다. 곁에 앉은 임희가 발로 안 보이게 내 발을 살짝 눌렀다.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아버님은 윤신달의 부탁을 한번 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군.’
그걸 깨달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임희가 대신 나서서 말했다.
“우리 연우는 한림원 직원이기도 하고. 또 호족들끼리 폐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사사로이 교류하기도 어렵습니다.”
“아 그것은 염려 마십시오. 이미 아버님께서 폐하께도 글을 올렸습니다. 폐하께서도 이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윤선지가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아마 우리 연우가 표천현에 한번 가볼 것입니다.”
임희가 은근히 부담을 주는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임희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대답했다.
“잘된 일입니다. 지금 제가 개경에서 표천현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명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다 모으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다 함께 우선 파평현에 오셔서 준비를 하고 표천현에 가시면 됩니다. 그럼.”
윤선지가 그리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용건을 잘 끝냈으니 이제는 가려는 기색이었다. 나와 임희도 몸을 일으켜서 예를 갖추며 윤선지를 전송했다.
나는 윤선지가 나가자마자 임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연우 네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인 것은 알았지만 윤신달 공은 친분이 생기면 큰 도움이 될 만한 분이다. 세력도 탄탄하고 능력도 있으니. 거기에 파평현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다. 한번 유람한다고 생각하고 둘러보고 오너라. 허허허.”
임희의 이 말에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파평현까지 가기 싫었던 것은 귀찮아서 그런 것이 컸다. 확실히 윤신달과 친분을 다져놓으면 좋긴 좋을 것이다.
* * *
내가 매일 같이 나가는 한림원에는 역시 왕건도 앉아 있었다. 왕건이 전문적인 자료를 찾으려면 한림원에 와야 했다.
한림원에서 학사들이 찾아준 지도와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왕건이 한림원에 온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윤신달이 참 재미있는 보고를 올렸더구나. 표천현의 그 유명한 좌도들에 대해서는 나도 어렸을 때 들어본 적이 있다. 송악과 표천현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고 소문도 자주 들었지. 아니 내가 어렸을 때 활개치던 무리들이 여태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그게 거의 40년 가까이 됐을 텐데.”
“저도 그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라 흥덕왕 때 그 좌도들의 수괴를 체포하기도 했습니다. 아예 폐하께서도 그러십시오.”
곁에서 듣던 한림원령 최언위가 그리 권했다.
표천현의 좌도들은 이 시대에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래, 확 최언위 말대로 강경조치를 취하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고.’
나는 내심 최언위를 응원했는데 왕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표천현의 좌도들이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어찌 그러겠나? 그리고 안 그래도 지금 일이 많아. 그 교주 비슷한 사람을 붙잡아 갔다고 표천현의 좌도들이 날뛰기라도 하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냥 한번 수상한 점이 없나 감시를 해봐야지.”
왕건이 그 점을 지적했다.
‘하긴 사이비 교도들은 물불 안 가리는 성향이 강하니.’
왕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니 나는 더 가기 싫어졌다.
‘결국 조사를 하러 가는 나도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니야?’
그리고 왕건의 말을 들은 최언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거기다가 나는 표천현의 좌도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왕건이 문득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최언위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어렸을 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나도 한번 표천현에 가보려고 했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떼돈을 벌게 해준다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뭔가 이유가 있으니 사람들이 그리 엄청 모였다고 생각했어. 물론 아버님이 그 사실을 눈치채시고 나를 못 나가게 하고 혼쭐을 내셨지.”
왕건이 옛날 추억을 회상하며 말했다.
‘왕건도 어렸을 때 다단계에 들어갈 뻔했다는 건가? 나름 역사적 발견이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언위가 할 말을 잃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에휴. 나는 지금도 힘들어 죽겠어. 표천현 좌도들의 말대로 진짜 떼돈 벌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그 돈으로 뚝딱 뚝딱 사람들을 모으고 훈련시킬 텐데. 견훤도 박살 내고.”
왕건이 상상만 해도 신이 나는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거의 왕건 본인이 표천현에 갈 기세인데?’
“폐, 폐하?”
나처럼 생각했는지 최언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쨌든 그러니 연우 너도 한번 표천현을 둘러보고 오너라. 네가 문제해결을 못하더라도 윤신달이 딱히 너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신달은 의욕적인 사람이니 아마 정말 궁금해서 사람들을 모으려는 거야. 너야 파평현에 가서 거하게 대접이나 잘 받고 오면 된다. 윤신달이 은근히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이라 손님들을 후대해 주지.”
왕건이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건마저 이러니 나도 방법이 없었다. 다만 왕건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다.
‘그래. 그냥 파평현에 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오자.’
* * *
결국 나는 표천현 좌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개경을 떠나게 됐다.
“내일 사시에 구정 앞에서 명사들이 모여서 우선 파평현으로 갈 것입니다. 연우 아가씨께서도 꼭 시간에 맞춰서 오시라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파평현까지 타고 가실 수레도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저 갈아입으실 옷가지만 챙겨서 부담 없이 몸만 오시면 된다고 하십니다.”
윤선지가 보낸 하인 하나가 상산저에 와서 말했다.
“알겠다.”
그나마 일체 비용은 나를 초청하는 파평 쪽에서 다 부담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그 점은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임희, 상산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상산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구정 앞에 이르렀다.
이미 여러 대의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고 윤선지와 파평현 군졸들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저기에 우리들이 이번에 모셔갈 명사들이 있습니다. 수레에 오르기 전에 잠시 인사라도 나누십시오.”
윤선지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그쪽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낯익은 사람이 많았다.
“아! 연우 아가씨도 오셨군요. 부석사에서처럼 이 일도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최지몽이 내 얼굴을 보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윤신달이 표천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끌어모은 사람들 중 최지몽도 포함된 모양이다. 아마 왕건에게 부탁을 한 듯했다.
‘최지몽이 명사? 하긴 무슨 군사를 동원하는 일도 아니고 외교업무도 아니고. 이건 일종의 사회문제 가까운 것이니. 고려 쪽에서도 쓰던 사람 계속 쓸 수밖에 없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최지몽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최지몽 옆에 있는 사람도 낯이 익었다.
“왕 노인도 반갑습니다.”
나는 왕창근 상단에서 만난 왕 노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쩌다 보니 파평장군의 부탁을 받아 저도 여기에 끼게 되었습니다.”
왕 노인이 어눌한 고려말로 나를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왕 노인의 수완이야 개경에서 유명합니다. 우선 표천현 좌도들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으니 왕 노인 같은 상단 분도 오셔야죠. 거기에 해박하시기까지 하시니.”
최지몽이 옆에서 말했다. 왕 노인이 개경에서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듯했다.
‘하긴 립밤을 만들 때도 왕 노인 도움을 많이 받았어. 순식간에 재료를 구해다 줬으니.’
요새는 립밤 판매가 그럭저럭 돼서 어느 정도 돈이 모이긴 하고 있었다. 유금필을 필두로 군부의 장수들이 조금씩 구매를 해주고 있었다.
물론 정치자금으로 쓸 액수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왕 노인과는 앞으로도 잘 지내야 해서 나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최지몽과 왕 노인까지는 아는 얼굴이었지만 그 옆에는 있는 늙은 스님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분은?”
그래서 최지몽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소승 자인이라고 합니다. 화엄종 남악의 관혜가 아가씨의 지혜를 못 당해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인 대사가 직접 나서 합장을 하며 말했다.
“부석사의 일은 운입니다. 이리 대사를 만나게 돼서 기쁩니다.”
나는 겸손한 척 그리 말했다. 윤신달이 그냥 보통 스님을 초청했을 리는 없어서 예를 갖추었다.
“자인 대사는 저 유명한 도선 국사의 제자가 되십니다. 폐하께서 어린 시절 도선 국사를 만나셨을 때 이 자인 대사께서 국사를 곁에서 모셨습니다.”
최지몽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확실히 대단한 거물이군.’
도선의 제자라면 풍수도 어느 정도 볼 것이고 이런 문제를 다룰 만했다.
‘나, 최지몽, 왕 노인, 자인 대사 4명이 가는 것 같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윤선지가 외쳤다.
“자 모두 수레에 오르십시오. 파평현까지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