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6화
56. 희망
요즘 아버지인 임희의 표정은 매일 극히 어두웠다. 그리고 아침부터 나와 임연객을 바라보며 신신당부를 했다.
“근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각자 언행에 신경 쓰도록 해라. 연객이 너는 병부에서 근무하고 연우 너는 한림원에서 일하니 더욱. 내가 어전에서 보니 폐하며 모든 사람들의 심기가 좋지 않다.”
“알겠습니다.”
나와 임연객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 모두 다녀오거라. 나도 나가봐야겠다.”
임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키는데 그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아이고, 당신 요새 너무 신경을 쓰더니. 살도 너무 빠지셨어요.”
곁에서 조용히 있던 상산부인이 놀라서 즉시 임희를 부축했다.
“그런가? 허허. 잠깐 현기증이 난 것이니 걱정 마시오. 너희들은 모두 나가보거라.”
임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와 임연객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 * *
아침부터 임희의 몸이 안 좋은 것을 봐서 그런지 나는 마음이 심란했다. 학관에 왔는데 여기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 우리가 삼국사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굳이 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선별한 시문들을 읽는 수업을 하겠습니다.”
학관에서 최언위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최언위의 얼굴도 핼쑥했다. 그리고 학관의 학생들도 수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마다 모여서 웅성거렸다.
“우리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데.”
“뭐 잘되겠지?”
강력한 세력을 지닌 공주인 황보인혜와 유설란 곁에 모여서 뭔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말을 거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거 원. 나이만 어리지 사실상 정치인들이야.’
이 학관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가 유력 호족의 자제들이기 때문에 정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왕건이 삼년산성에서 대패하고 돌아왔으니 민심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이 삼년산성도 돌파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동안 견훤은 사벌주의 여러 성들을 격파했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견훤은 원래 전라도, 충청도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경상도 쪽으로 진출해 지금은 경상남도, 부산, 울산을 거의 장악하고 경상북도와 대구마저 장악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는 형세였다.
견훤의 군사들은 점점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왕건은 어떻게든 견훤이 오늘날의 경상북도 지금의 사벌주를 완전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군사를 보내고 있었지만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견훤이 군량을 모으고 좀 쉬느라 진군을 잠시 멈췄지만 2~3개월 뒤에 다시 진군하기 시작하면 막지 못할 거야. 이번에 중요한 성들을 다 뺏겨서.’
모든 사람들이 이걸 예측하고 있으니 개경의 동요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으면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최언위가 굳이 수업교재를 바꾼 것도 민심을 생각해서겠지. 이제 삼국사에서 신라의 진골귀족들끼리 내란을 일으키며 서로 죽고 죽이는 부분을 다뤄야 하는데. 지금 시점에서 그런 글을 읽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내 곁에 있던 오지수가 입을 열었다.
“연우 언니는 전쟁터에도 나가고 백제 사람들을 혼내주면서 활약했잖아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 같아요? 요새 궁 안 분위기도 너무 갑갑해요.”
오지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질렸는지 나를 향해 물었다.
‘음, 오지수가 이런 질문을 던져주다니 잘됐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지수가 입을 여는 순간 장내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학관 학생들 중에 오지수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한림원에도 나가고 있고 전장 경험도 있었기에 고급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거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나에게 접근하면 까딱 잘못하면 고려 정계에서 정윤파로 분류될 수도 있어서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오지수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질문을 던지니 관심이 쏠린 것이다.
“뭐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야 뻔한 거지.”
내가 자신감 있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는데요?”
오지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야 우리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지. 신라왕도 개경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견훤도 우리한테 항복할 거야. 그렇게 되는데 몇 년 안 걸릴걸?”
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 예. 뭐 그래야죠.”
내 말을 들은 오지수는 약간은 시큰둥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무슨 엄청난 정보가 나올 줄 알고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도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역사를 스포일러 해줬는데도 이러니. 오래 걸리지도 않아. 8년 뒤엔 진짜 이리되는데.’
이 시대 고려 사람들은 지금의 이 암울한 상황에서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이 안 믿어지는 모양이다. 내가 한 말을 조금도 안 믿고 있었다.
왕건에게 견훤과 신라왕이 항복해 오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꼭 사학도가 아니라도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었다.
‘이래서 역사가 재미있는 거지. 예측대로 안 가니.’
나는 실망한 듯한 장내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나는 자주 이런 말을 공식 석상에서 꺼낼 작정이었다.
‘8년 뒤에 진짜 이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그 이후 내 말에는 엄청난 힘이 실린다. 모두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예견한 것이 되니. 나중에는 내가 한마디 말만 해도 온 고려가 전전긍긍할걸. 흐흐흐.’
이 시대에 와서 내가 느낀 것은 힘을 좀 키워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예 몇 년 뒤까지 내다보고 내 힘을 키우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이다.
* * *
학관을 마치고 나는 최언위를 따라 한림원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느 때처럼 왕건이 앉아 있었다.
왕건의 표정도 볼 만 했다. 사채를 빌려 쓴 중소기업 사장님 같은 얼굴을 하고 왕건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제일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이 왕건이었다.
한림원 학사들은 그런 왕건 곁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소매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서 왕건에게 바쳤다.
“김장명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나에게 왔지만 이건 사실상 명주 쪽에서 왕건에게 보내는 답신이었다. 나는 서신을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
“오! 그래.”
그제야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왕건은 서신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 나서 왕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김순식은 그래도 양심적인 사람이구나. 명주에 기근이 들어 군사를 더 동원하지 못한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우고 있어. 그래도 군사를 100명은 더 보내준다는구나. 하아. 어디서 동원할 수 있는 장정이 1만 명. 아니 5천 명만 생겼으면 좋으련만.”
왕건은 갑갑한지 그리 중얼거렸다. 나는 눈치를 보며 한쪽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왕건 곁에 있던 대내학사 김악이 입을 열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은데 올해 팔관회는 어찌해야 합니까? 팔관회를 여는 것에는 상당한 비용이 듭니다. 차라리 그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올해 팔관회는 미루는 것이.”
팔관회는 고려에서 여는 축제로 11월 15일에 열었다. 지금이 8월이라 슬슬 팔관회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야 했다.
“아니 팔관회를 안 열면 내가 왕이 된 보람이 없는데. 그걸 왜 안 열어?”
그러자 왕건은 대뜸 그리 면박을 주었다.
“소신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김악이 굽신거리며 대답하는데 왕건이 입을 열었다.
“그 돈 좀 아낀다고 팔관회마저 안 열면 진짜 위기인 줄 알고 사람들의 동요가 더 심해질 텐데. 그냥 무조건 열어야지.”
왕건이 소매까지 휘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이 오가는 동안 여러모로 우울해하는 왕건이 안타까웠는지 최언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연우 아가씨께서 앞으로의 정세에 대해 재미있는 예견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모두가 들으라고 은근히 큰소리로 말해서 그런지 최언위 귀에도 그것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오호 그래. 우리 신통한 연우가 이번에는 무슨 말을?”
왕건이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건에게도 밑밥을 깔아두는 게 좋겠지.’
그 생각에 나는 왕건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왕건의 표정도 좀 떨떠름해졌다.
“뭐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느냐? 견훤이 항복하다니. 그냥 나이도 60살이 넘어 늙었으니 말을 타다가 콱 죽거나 병으로 쓰러지면 소원이 없겠다. 그러면 숨을 좀 돌릴 텐데. 어쨌거나 좋은 말 해줘서 고맙다. 연우야.”
왕건은 내 말을 그냥 격려차원에서 한 아첨이나 인사치레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가볍게 그리 말한 왕건은 한숨을 쉬며 자기 앞에 놓인 책이며 지도를 연신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지금 난국을 타개할 것인지 고민이 많은 듯했다.
* * *
그렇게 나름 하루를 알차게 마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임희와 상산 부인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연우 너를 찾아온 손님이 한 분 계시는구나.”
“손님이라면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지?”
“파평현 장군 윤신달 공의 아들인 윤선지다. 윤선지가 말하기를 전장에서 연우 너를 본 적도 있다고 하더구나. 확실히 네가 빠져나올 때 명지성주 왕충과 그 부장 윤선지와 함께 온 기억이 나도 나는구나.”
임희가 말했다.
“맞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선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니 나는 왕무와 함께 말을 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왕무와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네.’
왕무는 개경에 온 이후로도 군무에 바빴다. 그러다가 나는 동양원 부인의 얼굴도 떠올렸다.
‘조만간 다시 나주원에서 지내야 하는 시기니 그때 동양원부인을 만날 수 있겠다.’
이 생각을 하니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윤신달 장군과 딱히 친분이 없는데 굳이 그 아들인 윤선지가 찾아온 연유는 무엇일지 궁금하구나. 나와 함께 가보자. 어쨌든 윤신달 장군은 폐하께서 신임하는 호족이니.”
임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윤신달의 본거지인 파평현은 오늘날의 파주 인근이었다. 개경과도 가까운 지역이었고 왕건의 직계세력이라 할만 했다.
임희도 그래서 가볍게 이 사람들을 대하지 못했다.
나와 임희는 손님을 응대하는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에는 낯이 익은 윤선지가 차를 마시면서 앉아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본 윤선지는 몸을 일으키며 예를 갖추었다.
“상산백과 연우 아가씨를 뵙습니다.”
“지난번에는 제 딸이 신세를 졌습니다.”
임희도 역시 예를 갖추며 말했다.
“연우 아가씨께서 부석사에서 우리 고려를 위해 대공을 세웠는데 그런 아가씨를 호위할 기회를 얻어서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공께서 찾아오신 연유가?”
임희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연우 아가씨의 지혜를 빌려볼까 하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연우 아가씨께서 며칠이라도 말미를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
“부탁이라면?”
“아시다시피 우리 파평현에서 인근의 여러 현들을 관장하고 있는데 그중 표천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천현이 좌도의 무리들이 활개를 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혹여 들어보셨습니까?”
윤선지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시대에는 고려가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해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핵심 거점이 될 만한 곳의 호족을 포섭하고 그 호족이 인근의 다른 현도 간접적으로 관리했다.
즉 왕건의 신임을 받고 확실히 고려의 통제를 따르는 파평현의 윤신달이 있고 그 파평현이 인근의 여러 현에서 세금을 거두는 형식이었다.
좌도는 오늘날 용어로 치면 사이비교를 가리켰다.
“내가 상산에서 온 사람이라 이 인근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좌도의 무리들이 무슨 반란이라도? 아니면 세금을 안 바친다거나?”
임희가 물었다.
“그런 문제라면 그냥 우리가 군사를 보내 토벌을 하면 됩니다. 좌도의 무리들이 세력을 불리기는 해도 말은 고분고분 잘 듣습니다. 다만 아버님께서는 왜 굳이 표천현에 끊임없이 그런 무리들이 생기는지 궁금해하십니다. 정말 아버님 평생의 의문이셨지요.”
윤선지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그리 의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좌도 무리들의 역사가 족히 100년은 됩니다. 중간에 신라 조정에서 체포해서 귀양을 보내기도 했는데 근절이 안 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데 이번에 아버님께서 부석사에서 있었던 연우 아가씨의 활약상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또 그 이전에 최승우를 꺾고 온갖 기묘한 꾀를 내신 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각별히 저를 보내 연우 아가씨를 파평현에 초청하시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한번 살펴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