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4화
54. 휴전
나는 퍼뜩 눈을 떴다.
“아이고.”
그리고 바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온몸이 너무 쑤시고 아파 왔다.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억지로 고개만 까딱 움직여 상황을 살피니 나는 모포를 깐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내 앞쪽에는 따뜻한 모닥불이 있었다.
뭔가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상황이 진정된 것 같았다.
“이제 깼어?”
내 옆에 앉아 있던 임연객이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졸면서 말을 몰던 네가 정윤 전하 품속에서 한숨 자는 사이에 어느 정도 백제 기병과 거리를 벌렸지. 코까지 골더라.”
임연객이 약간 놀리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치스럽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잠깐의 졸음을 이겨내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다니. 군대까지 다녀온 나인데. 하긴 현대에서는 보병으로 갔다 와서 지금 상황에 도움이 안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때 역시 가까이 앉아 있던 최지몽이 입을 열었다.
“잠이 들었다기보다는 기절한 것에 가깝습니다. 따지고 보면 부석사에서 모든 일을 주도한 것이 연우 아가씨셨습니다. 바위를 민 것부터 시작해서 화엄종 신도들의 분위기를 바꾼 것까지 모두 연우 아가씨가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입만 놀렸고요. 힘을 많이 소진한 연우 아가씨를 돌봐드렸어야 했는데 우리가 너무 소홀했던 것입니다.”
문관인 최지몽의 얼굴도 엄청난 강행군 때문인지 진짜 형편이 없었다. 볼이 움푹 들어갔다.
“그 말이 맞습니다.”
임연객은 슬며시 최지몽의 눈치를 보더니 더 이상 나를 놀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최지몽이 그리 말해준 덕에 나는 적지 않게 위로가 됐다.
“물이 먹고 싶어.”
나는 목이 너무 깔깔해서 그리 말했다.
“저쪽에 인근 개천에서 떠온 물이 담긴 통이 있어.”
임연객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서 앉았는데 온몸이 근육통 때문에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도무지 기력이 없어서 임연객 쪽을 바라보며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내가 떠다 줘야 하는데 나도 지금 기운이 없다. 좀만 기다려봐. 내가 힘을 좀 회복하면 떠다 줄게.”
임연객이 말했다. 임연객도 근 반나절 간 말을 타며 뒤에서 쫓아오는 백제군에게 활을 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쉽사리 못 일어나고 있었다. 최지몽도 한쪽에서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가 가져다 먹어야지.’
나는 일어날 수가 없어서 앉은 채로 흙바닥에 엉덩이를 질질 끌며 물통을 향해 나아갔다. 먼지를 휘날리며 내가 겨우겨우 반쯤 갔을 때였다.
내 쪽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윤 왕무였다. 왕무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임연객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 낭중. 내가 누이를 좀 살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앗! 연우야! 잠깐 내가 눈을 돌린 틈에 언제 거기까지? 전하. 원래 제 누이가 부탁 같은 것을 하지 않고 혼자 뭐든지 해결하려고 해서. 뭐? 물이 먹고 싶다고?”
왕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멍하니 앉아 있던 임연객은 몸을 일으키더니 부산을 떨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왕무는 그런 임연객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물통으로 다가가서 표주박에 물을 떠서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너무 목이 말랐던 나는 표주박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내 속내는 복잡했다.
‘혼사를 피하겠다고 기껏 부석사까지 와서 그 난리를 치며 일을 성사시켰는데. 이런 식으로 왕무와 더 얽혀버리다니.’
다만 그런 와중에도 물맛이 너무 좋았다. 그 사이 왕무는 다른 표주박에도 물을 뜨더니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에는 2명의 군사들이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발목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왕무는 그 군졸들에게도 물을 나누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내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원래 천성이 착하니.’
그 사이 임연객은 나를 부축해서 모포가 깔려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다.
“하필 그때 정윤 전하가 돌아오셔 가지고 간 떨어질 뻔했다. 어쨌든 정윤 전하께서도 대단하신 분이야. 모두가 지친 와중에서 직접 척후까지 보시고 군사들도 보살피시고. 나도 기운만 있으면 저럴 텐데.”
임연객은 그런 말을 하며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체력 하나는 어마어마하긴 해. 그건 부럽다.’
* * *
다음 날 새벽 일찍 일행은 출발할 준비를 갖추었다. 오늘 바로 소백산맥을 넘어 왕충의 군사들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커피 한잔이 먹고 싶다. 그러면 뭔가 힘이 솟아날 거 같은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마 이 시대에 사는 한 나는 남은 평생 커피를 못 마실 게 뻔했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우울해졌다.
“자 연우 너는 오늘도 정윤 전하와 함께 말을 타고 가라. 말 두 필을 번갈아 가며 타면 괜찮을 거야.”
임연객이 나에게 대뜸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이제 다 회복됐어.”
나는 짐짓 힘차게 말했다.
“여기 거울을 하나 가져와서 네 얼굴색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냥 정윤 전하와 함께 타. 나머지 사람들은 너를 건사해 줄 수가 없어. 나도 이리 힘든데.”
임연객이 말했다. 어쨌거나 임연객은 상산의 후계자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왕건도 임연객이 말을 잘 탄다고 평가했다. 보통 군졸들보다는 체력이나 실력이 월등했는데 그 임연객마저 힘이 부치니 다른 군졸들은 나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찌 그러겠어.”
나는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오늘까지 왕무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 진짜 정치적으로 곤란해진다. 어떻게든 참고 내가 알아서 가야 해.’
그런데 임연객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도 네가 낙마하거나 했으면 우리 군사들의 대오가 무너졌을 거야. 전장에서 기병들이 대오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오늘도 험한 산의 샛길을 하루 만에 넘어야 하는데 네가 중간에서 꾸물대면 속도가 안 나. 그렇다고 너를 최후미에 둘 수도 없고. 그냥 내 판단대로 같이 타. 지금 급한 상황인데 군령을 따라야지. 지금이 사실상 전쟁 상황이야.”
임연객이 이렇게 공무원 모드로 나오면 상당히 무서웠기에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나는 머뭇거리며 왕무 쪽으로 걸어갔다. 왕무는 이미 말에 올라타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 전하. 힘드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나를 따라온 임연객이 말했다. 왕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임연객의 도움을 받아 나는 그대로 왕무의 말 뒤쪽에 올라탔다.
‘등이 엄청 넓네.’
내 눈에 왕무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왕무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다만 주변 상황이 급박해서 무슨 이상할 생각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임연객은 문관인 최지몽과 부상병 2명도 꼼꼼하게 살폈다. 이 사람들도 이젠 혼자 말을 몰 수 없었다. 그래서 임연객은 기마술이 뛰어난 군사들을 가려 뽑아 옆에서 이 사람들을 살피도록 했다.
임연객이 병부낭중이라 지금 일행들 사이에서 실무를 보고 있었다. 임연객이 준비를 마치고 후미에 가서 서자 왕무가 힘차게 외쳤다.
“출발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왕무 등 뒤에 타지 않았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군.’
나는 있는 힘껏 왕무의 허리를 안고 아예 볼도 왕무의 등에 바짝 붙이며 생각했다. 볼에 딱딱한 가죽 갑옷의 감촉이 느껴졌다. 진짜 오늘 내로 소백산맥을 넘을 기세인지 행군 속도가 엄청났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내가 혼자 말을 몰면 못 쫓아갔을 것이다.
‘나만 괜히 이상한 생각을 했어.’
나는 스스로 그런 반성도 했다. 일행 전체는 그야말로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말만 몰고 있었다.
‘말을 안 해도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네.’
그리고 이런 강행군 덕에 마침내 이날 우리는 왕충의 군사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장군께서 정윤 전하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온 윤선지가 외쳤다. 명지성주 왕충은 우리를 염려해서 부장 윤선지를 보내 우리를 마중 보낸 것이다.
‘살았다.’
나는 윤선지의 얼굴을 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충의 군사들과 합류했으니 왕건의 본대와도 곧 만날 것이다. 그럼 이 어색한 상황도 다 끝나는 것이다.
‘유긍달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다.’
나는 이쯤 해서는 왕무의 등 뒤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여전히 분위기가 다급했다.
“서두르십시오.”
윤선지는 기껏 정윤 일행을 만나놓고도 연신 그리 독촉했다. 그래서 나는 왕무와 떨어질 타이밍을 못 잡고 그대로 함께 말을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일행은 다음날 왕충의 군영에 당도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겨우 왕무와 떨어질 수 있었다.
왕충은 뭘 했는지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우리 일행을 맞이하러 나왔다. 표정도 매우 심각했다.
그리고 왕무에게 대뜸 물었다.
“전하께서 부석사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벌이셨습니까? 지금 온갖 유언비어만 무성해서 저도 매우 궁금합니다. 상황이 매우 급합니다.”
“부석사에서 희랑 대사를 구할 수 있었소. 그런데 상황이 급하다니?”
왕무가 재빨리 전황을 물었다.
“죽령을 막고 있던 백제의 장수 관흔이 지금 발작하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사방을 그냥 짓밟으며 기동하고 있어 그것을 견제해야 합니다. 또한 삼년산성과 청주 일대의 백제군도 일제히 진출하고 있습니다.”
“흐음.”
보고를 받은 왕무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섣불리 소수의 인원으로 충주에 있는 폐하의 본대와 합류할 생각은 버리십시오. 한동안은 저희와 함께 움직이셔야겠습니다. 백제군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해 중간에 매복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산백의 따님이 일행 중에 있습니까?”
왕충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저입니다만.”
왠지 모르게 심각한 분위기에 내가 머뭇거리면서 나섰다.
“아가씨는 정윤 전하 곁에 바짝 붙어 있는 게 좋겠소. 지금 사방을 돌아다니는 백제군이 하나같이 아가씨를 콕 집어서 찾고 있소. 아가씨를 가만히 안 둘 기세요. 엄중한 경호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윤 전하와 같이 있어야 우리가 호위하기가 편하니까.”
왕충이 그런 경고를 했다.
부르르-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견훤이 화가 많이 났나? 내가 너무 설친 건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고려에 속한 몸이라 백제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래도 막상 한 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나를 주요 표적으로 삼고 찾고 있다니 무섭기는 했다.
내 곁에서 임연객도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니 더 두려웠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름 아닌 왕무였다. 그러더니 또 왕무가 말했다.
“정신 차려.”
* * *
어쨌든 일행은 한동안은 왕충의 군사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관흔 이자가 보통 장수가 아닙니다. 활동 범위가 엄청 넓으니 우리도 그를 견제하려면 강행군을 해야 합니다. 단단히 채비를 하십시오.”
왕충은 우리에게 그런 당부를 하고 일을 보러 갔다.
‘아니 또 강행군이라니.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확실히 왕충의 말이 군사적으로 옳긴 옳았다. 견훤의 심복 관흔은 마구 군사를 보내 충청도 일대의 고려 군현을 짓밟았다.
그때마다 왕충의 군사들도 관흔을 막으러 가야 했다. 어쩔 때는 진짜 자다가 한밤중에 출진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진짜 왕무의 등 뒤에 꼭 붙어 있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이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다가 진짜 골병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