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53화 (5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3화

53. 예언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이냐?”

아직도 발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며 백제 이찬 능환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백제 왕자 양검도 관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사. 이런 일에 현혹되지 말고 어서 조사당으로 가 종정 자리에 오르십시오.”

백제인들 입장에서는 진짜 막판에 일이 이리되니 울화가 터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관혜는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또 남악파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일을 밀어붙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종정이 돼도 남악파의 사람들 외에는 나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관혜는 쓴웃음을 지으며 백제인들에게 말했다. 포기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아니, 대사. 이 무슨.”

양검은 관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격노한 이찬 능환이 외쳤다.

“우리 조정이 이 일에 소모한 물자가 얼마인데 그런 말을 하시오?”

본전 생각이 났는지 능환이 관혜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압박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뒤에 있던 백제 술사 종훈이 그런 능환을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들은 관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기껏 선물을 돌리고 관혜에게 백제 왕자들이 예를 갖추어 힘을 실어주려고 했으나 능환의 고함소리에 헛된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일은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폐하께 사죄하겠습니다.”

관혜는 창백해진 얼굴로 합장하며 능환에게 말했다. 그러나 능환의 말대로 억지로 종정이 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여기에 격분한 능환은 계속 관혜를 갈구는데 관혜는 연신 합장을 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흐흐흐. 역시 내 계산대로다. 의상 대사를 끌어들여서 일을 벌였으니. 북악파든 남악파든 화엄종 신도들이면 이 일을 믿고 싶겠지.’

이 시기 화엄종은 여전히 왕건과 견훤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거대한 종파기는 했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못 했다. 화엄종 사람들이 이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화엄종의 중심지인 부석사에서 수천 명의 신도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의상 대사와 관련된 기적(?)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화엄종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불리를 떠나 어찌 됐든 이 일을 믿고 싶겠지. 의상 대사와 선묘 아가씨의 전설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라면 화엄종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니. 수많은 사람들이 본 사실이니 조만간 9주 전체에 이 소문이 돌 것이다.’

관혜도 남악파 이전에 화엄종 승려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거물이었다.

이 기적을 인정하는 게 화엄종에게 유리했기에 저리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어설프고 엉성한 면이 있는 내 계략이었지만 화엄종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믿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잘 통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혜가 무조건 자신이 종정이 되겠다고 이 기적을 부정하면 오히려 역풍을 받아서 화엄종 내에서 남악파가 인심을 잃을 수도 있다.’

지금 부석사 내에서 신도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선묘 아가씨!”

“나무관세음보살.”

내 쪽을 향해 아예 무릎을 꿇고 외치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나를 향해서라기보다는 내 뒤에 선묘룡이 있다고 믿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냥 조사당 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조사당에는 의상 대사의 지팡이가 남아 있었다. 의상 대사가 흙에 꽂아놓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었다.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리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대 위에 있는 왕무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아가씨. 대체 이 무슨 일입니까?”

희랑 대사가 내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정말 어찌 굴러가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슬슬 빠져나가야겠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에게 눈짓을 했다. 나와 왕무 일행이 이 일을 꾸밀 때는 희랑이나 지명 스님같은 화엄종 사람들에게 아무 상의를 안 했다.

그냥 고려 사람들끼리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어쨌든 우리가 벌인 짓은 의상 대사와 선묘 아가씨의 이름을 빌려서 속임수를 쓴 것인데 화엄종 승려들이 찬동할 리가 있나?’

괜히 상의를 했다가 계율이니 도의니 따지면서 오히려 우리 일을 막을 확률도 있었다. 거기에 나와 일행이 희랑과 대화를 나눴을 때도 종정 자리에 딱히 집착은 없어 보였다.

관혜를 막겠다고 우리가 속임수를 쓰는 것에 협조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희랑을 배제하고 그냥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지금 희랑의 모습을 보니 우리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기세라서 나는 마음이 찜찜했다. 그냥 말을 길게 하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하하.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다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대개의 사기꾼들이 그러하듯 호탕하게 웃으면서 희랑에게 아무 알맹이가 없는 말을 했다.

“아니. 그 무슨?”

여전히 상황 파악을 조금도 못 한 희랑이 계속 귀찮게 말을 걸었다. 그때 왕무가 나서서 나를 구해주었다.

“대사님. 대사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지금 상황이 급합니다. 아무래도 백제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우리들은 몸을 피해야겠습니다. 대사께서 나중에 개경에 오셔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왕무가 양검, 용검, 능환 등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능환은 길길이 날뛰면서 남악파 승려들을 비난하고 백제인들을 불러 뭐라 명을 내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부석사 인근은 견훤의 세력권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나와 왕무 일행이 감히 들어오지도 못했다.

왕건과 견훤의 세력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라 할 수 있었다.

다만 견훤이 물자며 군사들을 이쪽으로 일시적이나마 투입시킬 여력이 있었다. 그래서 관혜를 위해 어마어마한 선물도 보낸 것이다.

빨리 몸을 피하지 않으면 백제의 추격이 시작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제 제자들과 함께 하십시오. 그들이 길 안내를 해드릴 것입니다.”

이 급박한 상황을 깨달은 희랑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우리에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일행은 일제히 희랑에게 예를 갖추며 부석사를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가씨! 아가씨께 하나 묻고 싶습니다. 선묘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까?”

낙산사의 주지인 명법 대사가 몸을 빼려고 하는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한순간 장내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집중됐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으십시오.”

나는 어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위기를 넘기겠다고 속임수를 쓰기는 했지만 대놓고 선묘 아가씨와 함께 있다는 말을 하기는 그랬다.

그래서 애매하게 묻고 싶으면 물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우리 종단이 북악, 남악으로 나뉘어 싸운 지가 수십 년입니다. 오늘도 결국 양측이 화합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종단이 언제 예전처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희랑 사형, 관혜 사형 아니, 그 누구라도 교단을 하나로 만들 사람이 있습니까? 설마 영영 종단이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닙니까?”

명법 대사는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법은 진지하게 교단의 통합에 관심이 있어서 절박한 심정으로 묻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을 하는군.’

미래의 역사학도인 나는 당연히 이후 화엄종의 역사에 대해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가 외쳤다.

“희랑이든 관혜든 이 자리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북악, 남악을 하나로 만들지는 못하리라! 다만 수십 년 뒤에 누런 땅에서 노래 잘하는 화상 하나가 나타나 그대 소원을 이뤄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가 오래 살면 종단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외치고 몸을 돌렸다. 내가 외치는 순간 장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남악파 승려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명법 대사는 애가 타는지 우리 쪽으로 달려오면서 그리 외쳤다.

“이제 저는 평범한 소녀일 뿐입니다.”

나는 그런 명법에게 손을 흔들며 그리 말해줬다. 그리고 나와 왕무 일행은 거의 뛰어서 부석사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내 옆에서 뛰던 최지몽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우 아가씨, 왜 그러셨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희랑 대사께서 북악, 남악을 통합시키고 종정이 될 거라고 말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희랑 대사께 힘이 실리고 화엄종이 우리 고려 손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최지몽은 많이 난감한 기색이었다. 아마 방금 전에 남악파 승려들도 그래서 나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낸 것 같았다.

“제가 막판에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의 위기를 연우 아가씨의 명민한 지혜로 넘겼습니다. 그런 연우 아가씨가 실수로 그러실 리는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최지몽도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하하.”

나는 웃음으로 최지몽의 질문을 얼버무렸다.

‘미래의 사서에 적혀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왔는데. 그 바람에 귀찮아졌네.’

그러나 종단의 통합에 진심인 듯한 명법 대사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치기에는 내 양심이 찔렸다. 그래서 사실대로 알려준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일하고 나서도 화엄종의 분열을 끝내지는 못했다.

왕건도 견훤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승들을 죽이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남악파는 삼한통일 이후에도 버티면서 북악파와 대립한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균여라는 뛰어난 고승이 나타나서 겨우 화엄종을 하나로 만든다.’

이 균여가 황주 출신이고 향가에 능통한 사람이기에 나는 명법에게 그리 말해주었다. 최지몽은 계속 뭔가를 더 묻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때 부석사 밖에서 말들을 데리고 대기하던 군졸들이 합류했다. 그리고 외쳤다.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 척후들 말에 따르면 백제군사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져서 일행들은 모두 말에 올라 서둘러 소백산맥을 넘는 샛길을 향해 달려가야 했다.

* * *

왕건이 정윤 왕무를 호위하라고 가려 뽑은 무사들은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말 위에서도 몸을 뒤로 돌려서 활을 쏘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뒤에서 추격해 오는 백제 기병들도 움찔했고 일행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거기에 하나같이 기마술도 뛰어났다.

30기밖에 안 되기는 했어도 무난히 소백산맥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나였다.

‘이거 참. 내 몸이 좀 이상한데.’

나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바위를 놓을 자리를 점검하고 예행연습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무엇보다 부석사에서 무리했다.’

부석사에서 그 무거운 바위를 밀 때 나는 온 힘을 다 짜냈다. 그때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이기도 하고 흥분 상태라서 몸이 멀쩡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니 힘을 너무 써서 그런지 온몸이 아팠다. 그리고 너무 졸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임연객 쪽을 바라보았다.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는데 임연객은 진지한 표정으로 일행의 최후미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나는 억지로 버텼다. 계속 말을 달리니 졸음 때문에 그런지 내 고개는 계속 떨구어졌다.

‘진짜 딱 3초만 눈을 감고 있다가 뜰까? 그럼 상쾌할 거 같은데.’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순간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 같았다.

‘낙마하는 건가?’

내가 그리 생각하는데 온몸에 포근함이 느껴졌다. 놀라서 고개를 드는데 왕무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 차려!”

왕무가 다급한 표정으로 짧게 외쳤다. 한 손은 내 허리춤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왕무가 달려와 나를 낚아채서 자기 말에 태운 것이다.

‘힘이 좋아서 그런가 안정감이…….’

그런 생각을 하던 내 의식이 한순간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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