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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51화 (51/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1화

51. 조사당

사학과 대학원생인 나는 현대에 있을 때도 부석사에 답사차 와본 적이 있었다.

‘부석사의 산세와 풍경은 똑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새벽부터 부석사 경내를 거닐었다. 내 곁에는 왕무, 최지몽, 임연객 세 사람이 함께 걷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어젯밤 잠도 안 자고 이리저리 설쳐서 그런지 졸리고 하품이 나왔다. 최지몽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나 최지몽은 지금 자면 아예 못 일어날 거 같아서 잠을 깨려고 산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왕무나 임연객은 역시 전장을 돌아다니던 사람이라 그런지 하룻밤을 새워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내가 이러면 안 돼. 오늘 무차대회가 열릴 텐데.’

이른 새벽임에도 부석사의 몇몇 승려들은 이미 나와서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최지몽이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신라왕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부석사 내의 한 전각에 그림 하나가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칼 같은 걸로 초상화 중간에 칼집을 내놓았다.

“아! 저것이?”

내 곁에서 임연객이 초상화를 보며 감탄했다.

“폐주 궁예가 이 부석사까지 와서 초상화를 저리 만들었습니다.”

최지몽이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 초상화를 보며 왕무는 약간은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원래는 폐주 궁예가 직접 부석사까지 올 수 있을 정도로 이 주변이 고려의 세력권이었는데. 계속 패해서 백제 사람들이 부석사에서 무슨 일을 꾸밀 수 있을 정도로 밀렸구나!”

워낙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 왕무라 그런지 저런 초상화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방에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일을 논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는 무차대회 준비를 위해 본격적으로 일꾼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최지몽이 말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객사 쪽으로 갔다. 그러다가 이미 잠에서 깬 희랑과 그 제자들을 만났다.

“새벽부터 어디에 가셨던 것입니까?”

희랑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잠이 안 와서 절을 좀 구경했습니다. 오늘 큰일이 결정될 것인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왕무가 희랑에게 그리 둘러댔다.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허허허.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건을 지지하고 북악파의 수장이라서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는 해도 승려로서 수양이 깊어서 지금 상황에서도 절박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희랑의 제자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우리가 와 있는데 화엄종이 그대로 견훤과 남악파 손에 떨어지면.’

고려가 감당해야 하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나나 정윤 왕무에 대한 책임론도 거세게 일 것이다.

‘반드시 그 사태만은 막아 낸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런 각오를 다졌다.

* * *

부석사에는 무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계속 몰려와 말 그대로 절이 꽉 차버렸다.

화엄종의 승려나 신도들 모두 오늘의 무차대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멀리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달려왔다.

이번에 견훤의 지원을 받는 관혜가 화엄종의 종정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는 모양이었다.

부석사 대웅전 앞에는 거대한 대가 설치됐다. 그리고 그 위에는 화엄종의 고위 승려들이 방석을 펴고 앉아 있었다.

나나 왕무 등은 우선은 대 뒤쪽 대웅전 안에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나중에 나서게 된다고 부석사 측에서 미리 알렸다.

그리고 우리들 곁에 함께하고 있는 지명 스님이 대 위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관혜 사숙께서도 이미 와 있습니다. 휴우. 백제의 무주, 전주 쪽에 있는 우리 화엄종 사찰의 주지스님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남악파의 사람들입니다.”

과연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고승이 몇몇 승려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지명 스님의 얼굴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

이 외에도 지명 스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키며 저 사람의 부석사의 주지, 이 사람은 낙산사의 주지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나와 왕무 등이 손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사람이 다 모이자 부석사의 주지인 보경 대사가 몸을 일으켰다. 무차대회가 부석사에서 열리는 만큼 부석사의 주지가 일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오늘 남악파의 사형제들의 강력한 요구로 9주에 흩어져 있는 우리 화엄종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모인 무차대회가 이리 열리게 되었습니다. 남악파의 사형제들은 무슨 연유로 이리 사람들을 모은 것입니까?”

보경 대사가 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관혜 곁에 앉아 있는 남악파의 한 승려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종단이 남악, 북악으로 갈라져서 종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종정을 뽑고 그 대립을 끝내야 합니다. 그러기에 무차대회를 요구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남악파의 승려는 대 아래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와아아아!

그러자 대 아래쪽에 운집해 있는 일반 승려과 신도들 상당수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백제의 견훤왕이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화엄사찰의 승려들과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대웅전 안쪽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지명 스님은 발을 구르며 말했다.

‘견훤이 준비를 많이 했구나.’

그게 느껴져서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고려 쪽은 대비가 부실했다. 어쨌든 기세를 탄 남악파의 승려가 외쳤다.

“이 일은 굳이 오래 끌 필요가 없습니다. 서둘러 종정을 선출하고 이를 기념해 오늘 이 부석사에 모인 신도들이 무차대회를 즐기면 됩니다. 구차하게 시간을 끌며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명법 사형, 사형께서는 수정염주를 가져오셨습니까? 대개 명주 낙산사까지 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보물인데 오늘 한번 구경이나 합시다.”

낙산사 역시 의상 대사가 만든 절이었다. 이 낙산사는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고 받아왔다는 수정염주를 보관하고 있는 절로 유명했다.

“새로이 화엄종의 종정이 선출되면 종정이 저 수정염주를 쥐고 부석사 조사당에 있는 의상 조사의 지팡이 앞에서 맹세해야 합니다. 낙산사의 명법 사숙께서 수정염주까지 가져오셨습니다.”

지명 스님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말했다. 일이 남악파의 뜻대로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대 위에 앉아 있던 낙산사 주지 명법 대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보퉁이 하나를 꺼냈다.

보자기로 여러 겹 꽉 싸맨 보퉁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헤친 명법 대사는 두 손으로 소중히 수정염주를 받치며 장내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오오, 저것이 의상 조사님의?”

“나무관세음보살.”

장내의 사람들은 거의가 화엄종의 승려 아니면 신도들이었다. 이 전설적인 수정염주를 직접 보게 되자 감격하는 기색이었다.

맨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곁의 지명 스님 역시 합장하며 수정염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법 사형! 그럼 잠시 그 수정염주를 빌리겠습니다.”

남악파의 승려들은 그 수정염주를 보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일제히 일어나서 외쳤다. 이제 관혜가 그 수정염주를 쥐고 조사당에 가면 종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법 대사는 수정염주를 다시 보자기로 싸매더니 말했다.

“나는 남악파도 북악파도 아니오. 그저 사형제들끼리 이 오랜 다툼을 끝내기를 바라며 낙산사의 주지로서 이 수정염주를 지키며 기다려 왔소. 오늘 종정이 선출되어 이 수정염주가 쓰이는 것이 내 소원이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오. 다만 일방적으로 남악파 사람들의 말만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오. 북악 사형제들의 말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명법 대사의 이 말을 듣고 남악파 사람들도 주춤했다. 그리고 기가 죽어 있던 북악파 승려들도 처음으로 일어나 외쳤다.

“명법 사형의 말이 옳소.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종정을 뽑아서야 되겠소?”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는데 시간을 끄는구려. 오늘 우리 화엄종의 무차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밖에서도 귀빈들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보경 사형께서는 그분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남악파의 승려는 북악파의 반발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부석사의 주지 보경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우리 화엄종에 대단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우선 고려 조정의 정윤 전하께서 직접 이 부석사까지 왕림하셨습니다. 또한 삼한 땅에 이름을 떨치는 쟁쟁한 명사들이 정윤 전하와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천문을 잘 보는 최지몽 공, 또한 최승우 공을 꺾었다는 임연우 공께서도 오늘 오셨습니다.”

그말이 떨어지자 대웅전에 우리와 함께 있던 부석사의 승려들이 우리에게 나와 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일행은 왕무를 선두로 해서 차례로 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내 곁에서 임연객이 투덜거렸다.

“아니 내 이름은 왜 부석사의 주지 스님이 거론을 안 한 거지?”

하지만 나는 너무 긴장해서 임연객의 그런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대 위에 올라선 일행은 희랑 대사 앞에 절을 했다.

파격적으로 정윤 왕무가 절까지 한 것은 그만큼 희랑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또 절박한 상황이기도 했다.

‘고려의 왕위 계승권자와 명사들이 희랑에게 예를 다 하면 화엄종의 신도들도 희랑을 우러러보겠지.’

희랑은 놀란 기색으로 합장을 하며 급하게 우리들을 일으켰다.

문제는 백제 쪽도 얼마든지 우리를 따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백제 조정에서도 양검 왕자 저하, 용검 왕자 저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또한 이찬 능환 공, 술사 종훈 공께서도 직접 오셨습니다.”

양검은 견훤의 둘째 아들이고 용검은 셋째였다. 아들을 2명이나 보냈고 거기에 재상급인 능환까지 온 것이다.

술사 종훈은 아마 나처럼 여러 잡다한 일을 해결하라고 보낸 것 같았다.

어쨌든 그 사람들도 대 위로 올라와서는 관혜에게 절을 했다. 역시 우리와 같은 의도로 관혜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다.

‘젠장 내가 유긍달도 데려오자고 했잖아!’

아무래도 능환까지 온 백제 쪽 중량감이 더 커 보여서 나는 왕무를 살짝 째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백제 쪽 사람들은 덜렁 절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백제 쪽 사람들의 대표로 양검이 나서더니 말했다.

“오늘 화엄종의 종정이신 관혜 대사를 뵙게 됐는데 그것을 기념해서 작은 선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 곁에서 이찬 능환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십 명의 백제인들이 장내의 사람들에게 꾸러미를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힐끗 우리 쪽을 바라보던 술사 종훈이 능환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능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제인 한 명을 불러 뭐라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 백제인이 우리 일행 쪽으로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꾸러미 하나를 바쳤다.

최지몽이 어두운 안색으로 그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 꾸러미 겉에는 종이 한 장이 끈에 꿰여 매달려 있었다.

-백제 국왕이 부석사에서 화엄종 종정 관혜 대사께 존경의 의미로 바칩니다.

꾸러미를 여니 찻잎과 향, 그리고 두 되쯤 되는 쌀이 들어 있었다. 지금 견훤은 화엄종의 민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푸는 것이다.

지금 부석사에 모여 있는 사람들 숫자가 적지 않았다. 백제인들은 그 사람들에게 다 선물을 돌릴 기세였다. 견훤이 진짜 큰맘 먹고 돈을 쓴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냥 덜렁 몸만 와서 절만 한 고려 쪽과 너무 대조되는 준비였다.

‘이 선물 자체의 가치에 화엄종 신도들이 흔들린다기보다 이곳까지 이 엄청난 물자를 보낼 수 있는 견훤의 위엄에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다. 거기에 작년 말 공산전투의 패배부터 근 7~8개월은 고려가 패배만 했으니.’

그리고 선물이 골고루 돌아가고 나자 남악파의 승려가 장내를 향해 외쳤다.

“우리 화엄종단의 미래도 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악파의 사형제들도 어느 쪽이 우리 종단에 이로운지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우리 모두 조사당으로 갑시다. 명법 사형은 어쩌실 것입니까?”

남악파 승려들은 모두 일어나 조사당 쪽으로 갈 기세였다. 북악파 승려들은 의기소침해서 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낙산사 주지 명법 대사도 수정염주 보퉁이를 든 채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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