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50화
50. 부석사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함께 말을 달리는 지명 스님 쪽으로 가서 물었다.
“무차대회는 언제 열리는 것입니까? 견훤이 9주에 흩어져 있는 화엄종 신도들을 최대한 모아서 그 앞에서 관혜를 종정으로 선출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견훤과 남악파가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모아야 하니 기한을 넉넉하게 정했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의 말이 맞습니다. 종정을 선출하려면 명주 낙산사의 주지 스님은 꼭 오셔야 합니다. 이 외에도 남악파는 전국 화엄 사찰에 연통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모이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무차대회 날까지는 아직 17일이나 남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급해서 해인사에서 그 연통을 받자마자 바로 이리 달려왔습니다.”
지명 스님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말을 몰아 왕무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
또 말을 걸면 나를 귀찮아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왕무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다행히도 왕무는 말을 모는 속도를 약간 늦추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지금 아무 대책이 없으신데 바로 부석사로 달려가봤자 무얼 하겠습니까? 거기다가 분명 폐하께서 명지성의 왕충 장군과 합류한 뒤 부석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명지성에서 왕충 장군의 병력이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잠시 이 인근에서 머무르며 생각을 하고 가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 내가 보기에는 왕건도 그렇고 왕무도 그렇고 초조해서 지나치게 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우선 당장은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부석사에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시간을 끈다고 해서 뭔가가 나올지.”
왕무는 어느 정도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침착하게 고민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난국을 타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왕무에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비밀통로에서처럼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대는 그때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석문을 찾아냈지. 그럴 수 있는 그대가 부럽군.”
왕무는 내 말을 듣고 약간의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갑자기 첫 만남 때 이야기를 하는 왕무를 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어색해졌다. 그래서 말을 못 잇는데 왕무가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우선은 쉬며 식사를 하고 간다.”
* * *
왕건은 지명 스님이 당도해서 급보를 전한 당일 왕무를 수행할 30인을 뽑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에 우리들을 출발시켰다.
지글지글
‘새벽에 출발하느라고 아침도 못 먹고 나왔어.’
나는 눈앞에서 익고 있는 노루고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왕무는 고기라도 먹으며 생각을 할 작정인지 직접 몇몇 군졸들과 사냥을 해서 노루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리고 군졸들을 시켜 손질해서 열심히 굽고 있었다. 나는 밥 위에 노루고기 몇 점을 얹어서 먹기 시작했다.
내 곁에는 임연객이 역시 앉아서 밥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영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안 먹어?”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차피 실패할 게 뻔할 일에 휘말려서 그런지 입맛이 없다. 아무리 연우 너라고 해도 이번 일은 장난이 아니야. 견훤이 이번에 화엄종을 반드시 장악하려고 할 텐데.”
임연객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오라버니 출세길에 지장이 있을까 봐?”
“나야 연우 네 덕도 보고 내가 뛰어서 공을 세워놔서 걱정이 없다. 그런데 정윤 전하가 걱정이지. 참 어쩌자고 이 일을 맡으셔서. 정윤 전하가 망신당하실 것을 내 두 눈으로 볼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임연객은 그리 말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왕무와는 어색하긴 해도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라서 정말 그리되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도 왕무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며 늦장을 부렸다.
‘내 말대로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고 여유를 가지려는 모양이군. 다행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 쪽으로 다가갔다. 왕무는 최지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왕무가 말했다. 내가 슬며시 최지몽을 바라보자 최지몽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줬다.
“제가 대책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폐하께 청해서 잡찬 어른도 불러 달라고 하십시오. 잡찬 어른과 함께 간다면 정윤 전하께서 이번에 부석사에서 실패하셔도 그 책임을 나눠서 질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된다.”
왕무는 그러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요?”
그 단호한 태도에 내가 물었다.
“잡찬과 나는 매우 어색한 사이다. 서로 마음을 합할 수 없어. 나와 잡찬이 함께 가면 될 일도 안 된다. 잡찬을 부른다는 것은 애초에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부석사에 가는 것이야. 그것은 나를 믿은 폐하에 대한 도리가 아니야. 또한 희랑 대사께도 예가 아니고.”
왕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대에겐 미안하군. 기껏 나를 위해 꾀를 내줬는데 거부만 하고. 그러나 나는 그게 옳다는 생각이 드니 어쩔 수가 없어.”
왕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전하의 뜻을 이해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보통 사람 같으면 왕무의 이 답답함에 속이 터졌겠지만 나는 담담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정윤 왕무는 즉위하고 나서 동생 왕요, 왕소와 호족들에게 엄청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해. 그런데 죽기 전까지도 자신을 그리 괴롭힌 동생 왕요, 왕소를 보호하고 오히려 손을 내밀지.’
힘이 없긴 해도 어쨌든 국왕이 된 왕무가 전력을 다해 왕요, 왕소를 공격했다면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무가 그런 식으로 나왔으면 고려라는 나라가 아예 박살 났겠지. 왕무가 마지막 순간에 그런 식으로 양보를 해서 고려가 이어졌지.’
결국 왕무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사익보다는 국가의 공익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역사를 보다 보면 종종 이런 사람이 등장하긴 한다.
‘지금은 왕무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제시한 꼼수를 받아들일 리 없지.’
미래에서 온 덕에 왕무의 그런 진정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는 왕무의 답답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왕무 곁에 있으면 고생길은 훤하다. 혼사를 파토 내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정윤파에서 잘 이탈해야 해.’
왕무를 바라보며 나는 새삼 그런 결의를 다졌다.
“정말 나를 이해해 준다니 고맙군.”
왕무는 내 속내도 모르고 감격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왕무의 얼굴을 보고 약간 양심에 찔렸다.
‘이번만큼은 그러니 전력을 다해 왕무를 도와야지. 그게 내 이익에도 부합하고.’
그런 각오를 다지는 내 뇌리에 문득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왕무에게 물었다.
“그럼 폐하의 군영에 연락을 해서 잡찬 대신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은 괜찮습니까?”
“누구를 말인가?”
“제가 유금필 장군의 군영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부석사에서 희랑 대사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왕무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약간의 희망이 있다는 것이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와봐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 *
내가 왕무와 함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시간을 흘러갔다. 어느덧 명지성의 왕충이 병력을 이끌고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명지성 원보 왕충입니다.”
우선 왕충이 정윤 왕무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 곁에서 부장으로 보이는 장수 역시 예를 갖추었다.
“파평현에서 온 윤선지입니다.”
파평현은 명지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 인근이었다. 왕건의 직계라 할 수 있는 호족 윤신달의 근거지였다.
윤신달은 아들 윤선지를 왕충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그대들이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다. 우리들이 샛길을 통해서 부석사까지 갈 수 있도록 엄호를 부탁한다.”
“백제의 무리들이 부석사 인근까지 세력을 뻗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정윤 전하께서 꼭 가셔야겠습니까?”
왕충이 난감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폐하의 명이시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하시면 바로 몸을 빼십시오.”
왕충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 * *
그리고 왕충과 합류한 그날 왕무를 필두로 한 일행은 그대로 소백산맥을 넘었다.
“아이고 괜히 샛길이 아니네. 헉헉.”
나는 산맥을 넘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길이 좁고 험했다. 대군이 쓸 수는 없는 길이었다. 거기에 일행은 무거운 짐까지 운반해야 해서 고생이 극심했다.
“그래도 유사시에 적에게 쫓기거나 할 때 이 샛길에 들어오기만 하면 안전이 확보되지. 적도 대군으로 우리 뒤를 쫓을 수는 없을 테니.”
임연객이 병부의 관리다운 식견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샛길을 이용해 소백산맥을 넘자 지명 스님이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제 정말 무차대회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차대회가 열리기 전에 스승님을 만나 의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충도 기다리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시일이 많이 소요되긴 했다. 지명 스님의 말이 옳았다.
일행은 전력을 다해 부석사 쪽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부석사 인근에 이르자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절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다 화엄종의 사람들인가요?”
내가 약간은 감탄하며 물었다.
“연통을 받은 각 사찰이 대표로 승려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가의 교도들도 사벌주, 강주, 양주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왔을 것입니다.”
지명 스님이 대답했다.
‘사벌주, 강주, 양주는 모두 견훤이 집어삼키려는 주들이다. 그곳 평신도들 앞에서 자기 위세를 보여주겠다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입맛이 썼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일행은 부지런히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부석사 앞에 도착했다.
부석사의 스님들은 계속 몰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명 스님이 거기로 달려가 수소문을 하더니 일행에게 돌아와 말했다.
“스승님과 북악파의 사람들은 이미 부석사에 도착해서 객사에 머물고 계십니다. 정윤 전하께서 당도하셨다는 말을 전하라 했으니 스승님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제가 가면 되는 것을.”
왕무는 그리 대답하며 일행을 이끌고 부석사 경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온 희랑대사를 만날 수 있었다. 희랑 대사의 얼굴을 보고 나는 상당히 감탄했다.
‘내가 현대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군.’
나는 현대에서 희랑 대사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희랑 대사의 목상이 진짜 현대에도 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학도인 나는 그 목상도 당연히 봤다.
“정윤 전하께서 소승의 문제 때문에 이리 먼 길을 오셨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희랑이 왕무에게 정중히 합장하며 말했다.
“대사께서 왕실과 조정을 위해 해주신 일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자 우선 멀리서 오셨으니 차나 마시며 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희랑은 왕무와 나를 비롯한 일행을 보며 말했다. 희랑이 머무는 방에 왕무, 나, 최지몽, 임연객이 들어가서 차를 대접받게 됐다.
“이제 내일 무차대회가 열릴 것입니다. 혹여 대사께서는 이에 대해 따로 대책이 있으신지요?”
최지몽이 조심스럽게 희랑에게 물었다.
“관혜 사형이 이번에 기세를 타고 사람들을 이 부석사에 모았으니 맞설 방법이 없습니다. 내일 일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북악, 남악으로 나누어 다투던 종단이 하나가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희랑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
그러자 주변의 북악 제자들이 놀라서 외쳤다. 그런 희랑을 바라보던 나와 일행은 서로 눈짓을 했다.
그리고 최지몽이 말했다.
“대사의 뜻은 알겠습니다. 어쨌든 내일 무차대회 날 우리들도 최선을 다해 대사를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