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9화 (4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9화

49. 함정

왕건뿐만 아니라 부석사의 무차대회 소식을 들은 고려의 장수들은 모두 동요했다. 견훤의 의도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물리적으로 희랑을 죽일 수가 없으니 무차대회를 열어서 희랑의 영향력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화엄종의 중심이 되는 절이었다. 유명한 전설까지 있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의상을 짝사랑한 여인 선묘가 있었다. 나중에 이 선묘는 죽어서 용이 되어 의상을 지켜줬다.

이 의상이 절을 세우려고 하자 인근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를 막기 위해 의상을 괴롭혔다.

이때 용이 된 선묘가 거대한 바위를 띄워서 이 사람들을 쫓아내서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다. 부석(浮石)이란 이름도 이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은 이 전설적인 부석사에 대대적으로 화엄종의 신도들을 모아 무차대회를 열어서 자기가 미는 남악파의 고승 관혜를 종정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번에 견훤이 왕건을 상대로 또 대승을 거두었다. 승려들은 몰라도 화엄종의 평신도들은 이 상황에서 많이 흔들릴 것이다.

백제가 대세라고 생각하고 견훤이 미는 남악파의 관혜를 미는 것이 종단에 좋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러면 왕건이 지지하는 희랑은 화엄종 내에서 모든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견훤 입장에서는 희랑을 굳이 죽이지 않고 일을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희랑 대사께서 지금 위급한 상황인데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유긍달이 왕건의 곁에서 말했다.

“나도 어떻게든 희랑 대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엄종을 그대로 견훤이 장악하면 민심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나마 견훤이 덕을 잃어서 내가 버티고 있는 건데. 그런데 방도가…… 유 장군. 무슨 방법이?”

왕건은 이제 자신이 의지하게 된 유금필을 바라보며 물었다.

“희랑 대사의 일은 군사일이 아니라서 소장도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견훤이 이겨서 그 승세를 타고 이러는 건데. 우리가 나중에라도 태세를 잘 정비해서 이기고 그때 희랑대사를 다시 밀면 됩니다. 어쨌든 견훤도 희랑 대사를 감히 죽이거나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유금필이 약간은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유금필이라도 비군사 분야의 일까지 능통하지는 못했다.

“어허.”

유금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왕건이 입맛을 다셨다. 결국 유금필의 말은 이번에는 방법이 없으니 외면하자는 말이었다.

“우리가 패했고 죽령의 길이 막혔으니 부석사에 영향을 끼치기도 힘듭니다. 아마 이번에 남악파의 관혜가 화엄종 종정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는 별개로 최선을 다해 희랑 대사를 돕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희랑 대사를 그냥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가 민심을 크게 잃을 것입니다.”

그런 왕건 곁에서 유긍달이 입을 열었다.

“잡찬의 말이 옳다. 희랑 대사가 나한테 해준 일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궁지에 몰린 자신을 끝까지 지지해 주는 희랑을 생각하며 왕건이 유긍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정윤 전하를 이번에 부석사로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애초에 견훤이 자신의 왕자를 부석사에 보내는 것도 관혜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여서 힘을 실어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고려에서 폐하를 제외하고 가장 존귀한 정윤 전하께서 가신다면 희랑 대사께 적지 않은 힘이 되긴 할 것입니다.”

유긍달이 진지한 표정으로 왕건에게 조언했다.

‘어어,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 이건 누가 봐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을 정윤 왕무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거잖아.’

지금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부석사에서 고려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큰 패배 직후기도 하고 죽령이 끊긴 것이 큰 문제였다.

부석사는 죽령 인근에 위치한 절이었다. 그런데 죽령이 끊겼으니 고려가 대규모 인원과 물자를 부석사로 보내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견훤은 아마도 많은 물자를 보낼 거란 말이야. 무차대회가 일종의 축제인데 평신도들을 모아 음식이며 선물을 나눠주겠지. 괜히 무차대회를 연 게 아니야. 그런 식으로 민심을 사려고 한 거지.’

이러면 또 화엄종 평신도들의 마음은 견훤에게 기울게 된다. 정윤 왕무가 홀몸으로 덜렁 가봤자 이런 상황에서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정윤 왕무는 아무 잘못도 없이 그저 패전처리에 동원되는 거고 위상에 타격을 받지. 거기에 이 제안을 한 사람이 유긍달인데 누가 봐도 의도가 뻔하지. 자기 외손자들을 위해 정윤을 흔들겠다는 거 아니야?’

유긍달의 속내가 뻔히 보여서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 또 불안해지기도 했다.

‘유긍달의 음흉한 속내는 보이는데 또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니. 이거 참.’

“흐음.”

왕건은 또 유긍달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왕건에게 희랑은 도저히 그냥 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서 이러는 것이다.

“폐하의 다른 태자들은 모두 어리고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정윤 전하 외엔 없습니다.”

유긍달이 그리 말했다. 이것도 사실 맞는 말이었다. 견훤의 나이가 왕건보다 위라서 견훤 밑에는 장성한 아들들이 많았다.

그런데 왕건 같은 경우에는 지금 다 큰 아들이 왕무 뿐이고 다른 태자들은 어린아이였다.

“죽령이 끊어졌는데 정윤 전하께서 부석사까지 가시면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임희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혼사는 피하려고 하지만 임희는 정윤파와 가까운 사이라 슬쩍 정윤 왕무를 도우려는 것이다.

“죽령이 아니더라도 부석사까지 갈 수 있는 다른 샛길은 많습니다. 그 길을 타고 가면 됩니다. 또한 지금 견훤도 부석사 인근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 아닙니다. 상산백께서 그 샛길을 모르시진 않지 않습니까? 왕충이 죽령의 백제군을 견제하며 샛길을 따라 가는 정윤 전하를 엄호하면 안전하게 갔다 오실 수 있습니다.”

유긍달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대로 확실히 부석사까지 갈 수 있는 다른 샛길이 있어서 문제였다.

‘그 샛길들이 없으면 그냥 못 간다고 하고 안 가면 되는데. 그런데 말 그대로 샛길이라 대규모 물자나 군사는 못 가는 길이야. 정윤 왕무가 그냥 홀몸으로 부석사에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돌아오기 좋게 말이야.’

나는 내심 장탄식을 했다.

“…….”

임희도 유긍달의 말을 듣고는 대답을 못 했다. 유긍달의 말이 다 타당했기 때문이다.

‘이게 정치력이란 건가? 그동안 내가 혼사를 피하려고 미래지식까지 이용해서 별별 쇼를 다해도 일이 잘 안 됐는데. 유긍달은 그냥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한방에 자기 뜻대로 정세를 움직이니. 역시 정치는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

너무나 쉽게 자기 뜻을 이루는 유긍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종의 부러움마저 느꼈다.

“음.”

왕건은 많이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왕건은 일이 돌아가는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것이다.

그때 정윤 왕무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지금 우리 고려를 끝까지 지지하고 돕던 희랑 대사께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부석사에서 희랑 대사께서 큰 치욕을 당할 위기입니다. 그 위기를 막아내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고려에서 누구라도 가서 희랑 대사와 함께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제가 정윤으로서 부석사에 가겠습니다. 가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매만졌다.

‘그냥 끝까지 못 간다고 했어야지. 그러면 결국 가게 되더라도 가는 대신 뭔가를 얻어낼 수 있었는데. 저리 대뜸 간다고 하면.’

내가 그리 생각하는데 왕건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정윤이 부석사에 간다니 안심이 된다.”

“정윤 전하의 희생을 보니 확실히 그릇이 다르십니다.”

옆에서 냉큼 유긍달도 그리 거들었다. 왕건은 한결 부담을 던 얼굴로 장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많이 어렵긴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든 희랑 대사를 지켜드려야 해. 최선을 다하면 길이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고려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우야. 너도 좀 부석사에 가거라.”

자기 아들인 왕무를 보내는 결단을 내릴 때는 차마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왕건도 나를 보낸다는 말은 시원스레 잘 꺼냈다.

“예? 어찌 제가 그런 중대한 일에 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서리를 쳤다.

“연우 너는 뭐랄까? 정통은 아니라도 잡꾀가 많다고나 할까? 어쨌든 여러 곤란한 일에 부딪치면 어떻게든 용케 잘 빠져나가지 않느냐? 모두가 졌다고 생각한 최승우와의 대결 때도 수를 냈고. 이번에도 뭘 해봐라.”

왕건이 기대가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그냥 꾀가 많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잡꾀는 도대체 뭐야? 아예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놓고. 아니 무엇보다 나더러 이런 패전 처리를 하러 같이 가라니.’

나는 분기탱천했다.

“최승우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저도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가기 싫은 내가 하소연을 하는데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일말의 변수를 줄 수 있으니 연우 너는 가는 거고. 사천관! 그대 역시 천문에 밝고 아는 것이 많으니 이번에 정윤을 보좌하도록.”

왕건은 최지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왕건이 이 일에 진지한 심정인 것은 확실했다. 왕건이 많이 아끼는 최지몽도 이번에 부석사에 보내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력을 기울이려는 의지가 보이기도 했다. 나도 보내고 최지몽도 보내고 왕건은 또 무슨 방도가 없나 열심히 장내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인데 전력을 다해도 희랑을 구하겠냐고. 지금 웃는 사람은 유긍달밖에 없어.’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뭔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임희가 재빨리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더 이상 나서는 건 손해라는 신호였다. 이번 일에 대한 왕건의 결의가 굳어서 더 뻗대면 노여움을 살 수도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 * *

왕건은 고려 군영에서 나, 최지몽을 비롯해 꾀가 많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 30명을 뽑았다. 이 사람들을 정윤 왕무에게 딸려 보낼 작정이었다.

“이젠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가거라. 우선 왕충의 군영에 가서 상황을 보고 그대로 샛길을 넘어서 부석사에 가라. 어떻게든 희랑 대사를 도와라.”

왕건은 왕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폐하.”

왕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너무 엄청난 속도로 진행돼서 잘 적응이 안 됐다.

그런 내 곁에서 임연객도 침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여행을 갈 때 확실히 오라버니인 임연객이 있으면 편하기에 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정윤 왕무와 일행은 그대로 부석사를 향해 출발했다.

급보를 전한 지명 스님도 길 안내를 위해 일행들 사이에 꼈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승마에 익숙해졌다. 말을 타고 서경도 가고 여기저기 달리다 보니 실력이 늘었다.

나는 말을 몰아 선두의 정윤 왕무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서 물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이번 일에 어떤 묘책이 있어서 나서신 것입니까?”

무슨 생각으로 이 일에 자원한 건 지 궁금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묘책이 있겠나? 다만 희랑 대사를 외면할 수 없기에 정윤으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다. 그대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무대책인 왕무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 착하다. 그리고 너와의 혼사는 기필코 피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그 표정을 보니 더 기대할 것이 없어서 나는 최지몽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무슨 대책이 있냐고 물었다.

“그런 게 있으면 제가 최승우도 이기고 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희랑 대사의 체면을 그냥 세워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최지몽도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으, 뭔가 수를 내야 하는데. 이번에 유긍달의 의도대로 정윤이 패전처리만 하고 위상이 하락하면 내 혼사도 그대로 진행된다. 아예 뭔가 수를 내서 판을 뒤집어야 해. 그래서 나와 왕무가 콤비로 움직이면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걸 유긍달이 느끼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야 혼사를 파토 내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