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8화
48. 화엄종
“그러냐?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꿨다고?”
왕건이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건 본인도 원래 이 후삼국 시대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뛰어난 무장이었다.
해전에도 능하고 젊을 때는 육전에서 여러 호족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런 실력자인 왕건도 최종국면에 들어서자 견훤에게 크게 밀리는 것이다. 왕건의 심정도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최승우를 꺾은 연우 아가씨의 말씀이 신통하긴 합니다. 유금필 장군의 꿈도 그렇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웬 꿈 이야기인가 해서 당황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아마도 신령이 천명을 받으신 폐하를 돕기 위해 나선 모양입니다. 폐하는 정말 놀라우신 분입니다.”
하지만 곁에서 듣고 있던 인근 호족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다. 이 시대 호족들 중 임희나 유긍달처럼 중앙정치에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뛰는 사람은 소수였다.
대다수 호족들은 그저 자기 지역을 돌보며 이기는 쪽에 붙어서 자기 땅만 지키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중앙의 정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유금필의 꿈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는 풍수며 점술 같은 것이 유행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거기에 최승우를 꺾었다는 나까지 곁에서 끼어들어 꿈 타령을 하자 긴가민가하면서도 호족들은 속아 넘어갔다.
논리적으로는 내가 서예대결에서 최승우를 꺾었다고 해서 내 꿈 이야기까지 들어맞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막연히 그 똑똑한 최승우를 이긴 내 말은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가?”
인근 호족들의 반응을 본 왕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유금필의 처세술이 대단하긴 하군. 유금필이 곧이곧대로 왕건이 삼년산성 공격에 실패할 것이고 궁지에 몰리면 청주에 갈 거라고 말했어 봐. 지금 인근 호족들은 모두 유금필을 우러러볼 거고 왕건의 마음은 몹시 불편하겠지.’
물론 왕건의 성격상 그렇다 해도 자신의 장인어른이기도 한 유금필을 숙청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유금필을 전투에 적극 동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전투 때마다 유금필이 자신의 지략을 자랑하며 호족들의 인심을 얻으면 왕건 입장은 곤란해진다.
그런데 유금필이 꿈 타령, 도인 타령을 해서 왕건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왕건이 패배했음에도 도인이 유금필의 꿈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곁들어지자 신령의 도움을 받는 왕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유금필의 웃으면서 나에게 눈짓을 했다. 고맙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엣헴. 뭐 내가 곁에서 끼어들어서 유금필의 이야기가 더 그럴듯해진 것은 맞지.’
유금필 같은 거물의 감사인사를 받자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지금 백제의 무리들이 잠시 물러나긴 했으나 다시 이곳 청주로 몰려올 것입니다. 충주까지 후퇴해야 합니다. 소신이 충주에 준비를 해뒀으니 물러나십시오.”
한쪽에서 유긍달이 왕건에게 말했다. 유긍달 역시 왕건을 따라서 삼년산성 공격에 참전했다가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초췌한 기색이었다.
“유 장군의 생각은 어떤가? 괜찮을 거 같은가?”
유긍달의 말을 들은 왕건이 유금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왕건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주는 유금필을 믿고 그 말대로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하긴 견훤에게 한두 번 패한 것도 아니고 왕건도 뭔가 새로운 출구가 필요하긴 하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금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찬의 말이 옳습니다. 우선 충주에 가서 그곳을 굳게 지키며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자. 유 장군도 내 뒤를 따르라. 상산백도. 모두 충주로 간다.”
왕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명을 내렸다.
* * *
고려군이 충주 쪽으로 이동하면서 당연히 나도 그 사이에 껴서 움직였다.
‘분위기가 참 암울하긴 하군.’
공산 전투 이후 근 1년 가까이 연전연패하는 중이라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한참 더 이어질 텐데. 참 단순히 역사서를 읽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르긴 하구나.’
미래 역사를 아는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견훤은 정말 막강한 사람이라 고려는 계속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암울한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갑갑하긴 했다.
어쨌든 고려군이 충주까지 가는 도중에는 경계를 철저히 하고 가서 그런지 별일이 없었다.
충주는 유긍달의 본거지라 안전하기도 하고 큰 도시라 군량도 풍부했다.
여기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겨우 좀 푹 쉴 수 있었다.
나 역시 나름 대접을 잘 받았다. 충주 객사의 한 방을 배정받고 하인들이 식사를 가져다줬다.
고사리며 미나리, 달래 같은 산나물이며 연근과 토란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였다. 다섯 가지나 되는 반찬을 준비한 것이다.
쩝쩝.
나는 맛나게 식사를 하며 푹 쉬었다.
“아이고 나도 딱히 한 것은 없는데 왜 이리 힘드냐?”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침상에 드러누웠다. 유금필의 꿈 타령을 거든 거 말고는 별일도 안 했는데 몸이 피로해서 침상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역시나 먼 거리를 행군하고 실제 전투를 본 여파가 있긴 있는 것 같았다.
똑똑.
그때 조심스럽게 임희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연우야. 들어간다.”
“예.”
임희가 들어온다니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임희가 말했다.
“서둘러 함께 가자꾸나. 폐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다. 너와 연객이도 회의에 나와서 내 뒤에 서 있거라. 너와 연객이를 회의에 참석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 네가 뭐 유금필 장군의 일을 돕고 있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 * *
‘에휴 다리가 아프다.’
나는 회의장에서 눈치를 보며 다리를 두드렸다.
회의를 열면서 왕건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만 의자에 앉고 부장들이나 일을 보조하는 문관들은 다 그 뒤에 시립하고 있어야 했다.
나 역시 아버지인 임희의 보좌로 회의에 참석한 것이라 서 있어야 했다.
‘하긴 여기 들어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지위는 상승한 거라고 봐야 하는데. 그래도 힘드네. 왕무 쟤는 정윤이라서 앉아 있구나. 부럽다.’
나는 한쪽에 앉아 있는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무 역시 왕건을 따라서 이번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하긴 나주원에서 만났을 때 출전 준비로 바쁘다고 했으니. 왕건을 따라왔겠지.’
물론 아직 나이가 어린 왕무는 회의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오가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만 있었다.
회의 분위기는 몹시 좋지 않았다. 왕건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 패배의 뒤처리를 해야 하니 당연히 힘들 것이다.
“견훤이 휘하 장수 관흔을 보내서 죽령의 길을 봉쇄했습니다.”
정찰의 보고를 받은 유긍달이 그런 소식을 전했다.
“흐음 죽령이 막히다니. 충주에서 군사들을 빼야 하나?”
왕건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지금 왕건과 견훤은 신라 땅을 누가 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지금 신라에 남은 땅은 사방이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상도 일대뿐이었다.
이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갯길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 통로 중 하나인 죽령을 관흔이 막아버린 것이다. 이러면 고려군이 신라령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졌다.
진짜 구 신라령이 그대로 견훤 손에 다 들어갈 위기상황이었다.
“견훤의 수하들인 김훤, 애식, 한장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인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충주의 군사를 빼면 그들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후방의 군사를 동원하십시오.”
곁에서 유금필이 그리 말했다.
“명지성의 왕충에게 원군을 이끌고 오라고 하라. 관흔이 마음대로 못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왕건은 한숨을 쉬며 유금필의 말을 따랐다. 지금 견훤 본인은 계속 사벌주를 공격하면서 부하들만 보내서 왕건과 고려군의 주력을 붙들어놓고 있었다.
후방의 병력까지 다 짜내서 동원해야 하는 판이니 왕건이 힘든 상황이긴 했다. 명지성이면 오늘날 경기도 북부에 있는 포천시였다. 충주와는 거리가 꽤 먼 곳인데 거기에서 군사를 불러와야 하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그래도 왕건은 유금필의 조언을 들어가며 군사를 이리저리 보내서 뒷수습을 하긴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부장 하나가 들어와서는 유긍달에게 뭐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유긍달이 왕건에게 말했다.
“폐하. 지금 화엄종의 지명 스님께서 급보를 전하기 위해 이 충주까지 달려오셨습니다. 바로 폐하를 만나 뵙고 싶어 합니다.”
“지명 스님? 들어본 이름인데?”
왕건이 중얼거리는데 곁에서 최지몽이 입을 열었다. 나이가 젊은 최지몽은 종군 문관으로 이 자리에 따라와 있었다.
“지명 스님은 희랑 대사의 제자이십니다. 폐하께서 희랑 대사를 접견하셨을 때 함께 만나보셨습니다.”
“그래. 그렇지. 서둘러 모셔라. 분명 희랑 대사께서 보내셨을 텐데. 허어.”
왕건은 갑갑한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문지르며 말했다. 큰 패배 직후라서 지금 왕건에게 들어오는 소식 중에 좋은 것이 없었다.
왕건은 급보를 전하기 위해 지명 스님이 왔다고 하자 몹시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곧이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흙투성이가 된 스님 하나가 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소승 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래 희랑 대사께서는 어떠십니까? 나는 항상 대사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먼저 희랑의 안부를 진지하게 물었다.
희랑은 화엄종의 고승이었는데 화엄종은 이 당시 세력이 막강한 불교 종파였다.
화엄종은 의상 대사가 교단을 수립했다. 의상은 원효의 친구로 수천 년이 지난 현대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진 고승이었다.
이 시대에는 더욱 존경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의상은 신분에 신경 쓰지 않고 평민들도 대대적으로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 시대 화엄종은 의상이 창건한 이래 200년 넘게 이어 온 뿌리 깊은 종파였다. 또한 교조인 의상의 뜻을 받들어 수백 년 동안 꾸준히 평민들도 계속 제자로 받아왔다. 그래서 그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물론 신라 말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화엄종의 세력이 주춤하긴 했으나 예전만 못하다는 거지 전국 수준의 조직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화엄종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전국 곳곳에 화엄종의 사찰이 있고 그 제자들이 있었다.
당연히 왕건이나 견훤이나 이 막강한 화엄종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다.
왕건과 견훤이 국가 차원의 힘을 동원해서 화엄종에 압력을 가하고 화엄종 내부의 교리 논쟁도 있어서 결과적으로 화엄종도 북악파와 남악파로 분열됐다.
북악파의 고승들은 왕건을 지지하고 남악파의 고승들은 견훤을 지지했다.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고승이었다.
희랑은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러 있었다. 해인사는 오늘날의 경남 합천에 있는 절이었다. 이때쯤 해서 경남 지방은 사실상 견훤 손에 거의 들어갔다.
희랑은 지금 견훤의 세력권 안에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왕건을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게 가능한 것은 견훤이 궁예의 사례를 본 덕이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궁예처럼 명망 높은 고승을 쳐 죽이면 결과가 불행하다는 것을 직접 봐서 견훤도 물리력을 쓰지 않고 참고 있었다.
그래도 견훤 땅 한가운데서 왕건을 지지하는 희랑의 용기가 대단하긴 했다.
그런 희랑에 대해 왕건은 고마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희랑 대사께서는 무사하십니다만 지금 교단 내에 난리가 났습니다. 남악파의 무리들이 견훤을 믿고 부석사에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모아서 무차대회를 열려고 합니다. 그 무차대회에 견훤이 자신의 왕자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남악파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 관혜를 이번 무차대회에서 종정으로 밀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북악파는 그걸 알면서도 손 쓸 방도가 없어서 이리 폐하께 달려왔습니다.”
지명이 얼마나 다급한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관혜는 남악파의 고승으로 견훤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놀란 왕건이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지명의 말대로 관혜가 화엄종의 종정이 되면 그 조직이며 세력이 그대로 견훤에게 넘어갈 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