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7화 (47/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7화

47. 패배

나처럼 비전투원이면서 참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왕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을 할 때는 여러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나 이번에 유금필은 탕정군에 성을 쌓으러 갈 작정이라서 돌을 다루는 석공들이 대거 동원됐다.

망치며 정 같은 도구를 짊어진 석공들 수십 명이 유금필 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외에 목수며 의원, 스님 등등 온갖 사람들이 행군에 동참했다.

나는 임연객과 함께 그 사이에 껴서 남하했다.

‘유금필의 능력이 놀랍긴 하네.’

행군을 함께 하면서 나는 새삼 그것을 느꼈다.

상당한 규모의 인원이 움직이는데도 별다른 사고나 지연 없이 유금필군은 그대로 탕정군에 도착했다.

그리고 탕정군 인근에서 나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허허허. 너희들이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오는구나.”

미리 전갈을 받은 임희가 군사들을 이끌고 유금필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

나와 임연객은 반가운 표정으로 임희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에 대해 임희에게 모두 설명했다.

“그래 연객이와 연우가 유금필 장군 곁에서 일을 보게 되었구나. 잘 됐다. 안 그래도 내가 상산 군사들을 이끌고 유금필 장군 휘하에 들어가게 됐으니 네가 연락책을 맡아다오. 상황이 복잡하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힘을 모아서 반드시 백제군을 몰아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임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와 임연객은 힘차게 대답했다.

* * *

그리고 탕정군에 군영을 차린 유금필과 임희는 군사들을 동원해 성을 쌓아 주변을 방비하고 군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유금필 곁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았다.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석공, 목수, 인부들의 숫자를 계산하고 그들에게 공사에 대해 설명하기 좋게 그래프를 그렸다.

또 임희가 거느린 상산 군사들과 유금필 사이에 연락도 도맡았다.

‘어쩌면 이 시대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막중한 행정업무를 맡아보는군. 임연객이 있어서 다행이다.’

병부낭중으로 일하고 있는 임연객은 이런 업무들을 척척 해결해냈다. 참 정말 처음으로 임연객이 든든해 보였다.

‘나도 이 시대에 일하는 방법을 익혀놔야지. 알아두면 좋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유금필의 지시대로 그래프를 그리며 곁눈질로 임연객이 일을 처리하는 요령같은 것을 잘 살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나는 문리가 드디어 완벽하게 트였음을 느꼈다.

‘현대에서 공부를 할 때는 그렇게 안 트이던 문리가 어느 순간 이리되다니.’

물론 이전에도 나는 한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술술 읽지 못하고 더듬더듬 생각을 하며 읽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 후삼국 시대에 떨어져서도 꾸준히 책을 읽고 또 한문 문서들로 일을 처리하는 환경에 떨어지니 문리가 트인 것이다.

‘단순히 한문을 읽는 것을 넘어서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이전과는 달리 편해졌다.’

현대에 있을 때는 한문을 그럭저럭 읽기는 해도 한문 문장을 쓰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의 노력 덕인지 이제는 일상적인 한문 문장은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이 능력을 가지고 그대로 현대로 돌아가면 좋겠다. 현대에서 이랬으면 그냥 아무리 힘들어도 박사는 따고 나왔을 텐데.’

나는 나의 능력치를 약간이나마 올렸다. 유금필과도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나는 그 명에 따라 그래프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물론 일 얘기 외에 사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다만 딱 한 번 유금필이 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연우 아가씨는 삼국사를 읽어보셨습니까?”

“예.”

학관에서 공부할 때 교재로 쓰기 때문에 당연히 읽었다.

“이 부분의 해석이 어려운데 한번 읽어주십시오.”

유금필의 삼국사를 펼치더니 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 태종이 요동성을 포위하자 요동성주가 추모왕의 사당의 무녀에게 점을 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무녀가 요동성을 지킬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그 부분을 해석했다.

‘유금필이 무장이지만 삼국사는 능숙하게 읽을 텐데. 무엇보다 설사 모른다 해도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나? 학자나 스님에게 물어도 될 것을.’

“좋습니다. 허허허. 요동성주가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유금필은 웃으면서 그리 평하고는 곧바로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유금필과 임희가 탕정군에서 순조롭게 성을 쌓고 군량을 모으자 왕건은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왕건은 군사들을 모아 개경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왕건이 이끄는 고려의 대군은 계획대로 삼년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폐하께서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직접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지만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유금필은 임희를 비롯한 인근의 여러 호족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사실 유금필이 개경에서 끌고 내려온 병력만으로는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주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이리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나와 임연객도 아버지인 임희를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와 임연객은 임희의 뒤에 서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호족들은 일제히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이를 위해 지금 군영에 있는 기병들은 모두 따로 모아 편성을 해야 합니다. 이 기병들을 청주 인근에 보내 대기시킬 것입니다. 또한 척후병의 숫자를 10배로 늘려서 청주를 샅샅이 살펴야 합니다. 이 외에 삼년산성의 상황이 어떤지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도록 계속 전령을 보낼 것입니다. 제장들은 내가 명만 내리면 청주 쪽으로 출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유금필은 태연한 표정으로 군령을 내렸다.

다만 유금필이 이런 명령을 내리자 장내에 약간 소란이 일었다.

“유 장군님. 지금 폐하께서 삼년산성을 치고 계시고 우리들은 탕정군을 지키고 있습니다. 굳이 아무 일도 없는 청주 쪽에 전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명은 이 탕정군을 굳게 수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 군사를 함부로 빼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호족 한 명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 시대는 여러 호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참전하는 것이었다.

말은 명을 받든다고 했지만 주장이 명령을 내려도 납득이 안 가면 군사들을 안 움직이려고 했다.

“내가 꿈을 꿨는데 산신인지 도인처럼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서 청주 쪽에 큰일이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그리 배치하는 것입니다.”

유금필이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 말을 듣고 질문을 던진 호족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웅성웅성.

그리고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쟁 와중에 대장으로 내려온 장수가 그런 말을 하니 당황한 것이다.

임희마저도 기겁을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유금필의 모습을 보고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유금필이 출전하면서 나한테 한번 도와달라고 했었어. 그리고 일부러 삼국사의 그 부분을 물어본 것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대뜸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비슷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고귀하게 차려입은 부인이 나타나서 청주 쪽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못 이뤘습니다.”

내가 끼어들자마자 유금필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이 아가씨가 바로 개경에서 백제 예부령 최승우를 서예로 꺾었습니다. 또한 서경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사건을 해결했습니다. 이런 술수에 능한 아가씨입니다.”

“상산백의 따님? 총명하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아니 그래도 이 무슨?”

질문을 던진 호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음, 나는 유 장군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상산 기병들을 내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운용하십시오.”

임희는 힐끗 내 쪽을 바라보더니 침중한 표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상산백?”

질문을 던진 호족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쨌든 장내에 모인 호족들 중 임희의 세력이 가장 크고 지위도 높았다.

이런 임희가 군말 없이 유금필의 말을 따르자 다른 호족들도 어쩔 수 없었다.

어물쩍 유금필의 뜻대로 군사들이 배치되었다.

“아버님.”

나는 회의를 마치고 나서는 임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임희에게는 내가 왜 그랬는지를 설명할 요량이었다.

“음, 괜찮다. 나중에 말해다오. 내가 지금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인듯하구나.”

그러나 임희는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그리 말했다. 임희도 뭔가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 * *

유금필은 기병들과 함께 청주 인근에 주둔했고 나와 임연객 역시 그런 유금필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시일이 흐른 뒤 유금필이 삼년산성으로 계속 보내는 전령 하나가 달려와서 보고를 올렸다.

“우리 군사들이 결국 삼년산성을 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봤을 때 군사들을 물리려고 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유금필은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명을 내렸다.

“기병들은 나와 함께 당장 출병한다. 다른 호족들에게도 보군을 이끌고 서둘러 내 뒤를 따라 청주로 오라고 일러라.”

“예.”

유금필의 명을 받은 군졸은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유금필은 나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아마 이번에는 진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내가 아가씨는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 함께 갑시다. 같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병부낭중은 싸움에 끼지 말고 연우 아가씨를 지키시오.”

나와 임연객에게 그리 말한 유금필은 지체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청주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유금필은 청주에 매우 가깝게 기병들을 배치시켜 놨다. 그리고 10배로 늘린 척후들이 청주의 길 곳곳을 정탐해놔서 행군 속도도 빨랐다.

순식간에 유금필의 기병들은 청주에 당도했다. 나 역시 그 사이에 껴서 말을 달리고 있는데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

수천 명의 군사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이 전투를 바라보고 있기에 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백제 군사들이 지금 고려군을 에워싸고 있어.’

“왕건을 죽여라! 고려군을 섬멸하라!”

수천 명에 달하는 백제군이 외치는 함성소리가 멀리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렸다. 내가 이 시대에 떨어진 지 오래됐지만 수천 명의 대군이 격돌하는 전투는 처음 봤다.

‘진짜 상상 이상으로 시끄럽다.’

그리고 멀리서 보기는 해도 사람들이 진짜 죽어 나가는 광경을 보니 정신이 혼미했다.

“병부낭중. 그리고 너희들은 아가씨를 지켜라. 후방에 대기하고 있어라.”

그런 나를 살피며 임연객과 10기의 기병들을 남긴 유금필은 나머지 300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대로 고려군을 구하기 위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또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유금필이 가한 돌격의 위력은 엄청났다. 백제군은 고려군을 포위한 상태라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숫자가 적긴 해도 유금필이 직접 이끄는 기병이 뒤를 치자 크게 흔들렸다.

궁지에 몰려 있던 고려군도 함성을 지르며 유금필에게 호응했다.

그리고 한 시진쯤 지나자 보군을 거느리고 있는 다른 호족들도 속속 당도했다. 유금필의 전갈을 받고 달려온 것이다. 그 선두에는 임희가 있었다.

“아버님!”

나와 임연객은 반갑게 외쳤다. 이들의 등장은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안 그래도 후방에서 가해진 유금필의 공격으로 고전하고 있던 백제군은 고려의 또 다른 부대가 도착하자 매우 당황한 것 같았다.

백제군은 속속 징을 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 * *

유금필, 임희 등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겨우 위기에서 빠져나온 고려군과 합류했다. 당연히 나와 임연객도 함께했다.

“이번에는 진짜 큰일 날 뻔했다. 견훤이 청주 쪽에 군사들을 보내서 우리를 급습했어. 그대들이 때맞춰 오지 않았다면 포위를 뚫지 못했다.”

왕건은 군영에서 지친 기색으로 우리를 맞이하며 말했다. 수십 일 동안 삼년산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습까지 당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유금필이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시간에 맞춰 왔나?”

왕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꿈에서 도인이 나타나서 청주가 심상치 않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연우 아가씨도 비슷한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와봤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금필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꿈은 무슨. 유금필은 이미 왕건이 거느리고 있는 전력으로 삼년산성을 떨어뜨리지 못할 것을 예상했다. 거기에 왕건이 힘이 다하면 청주 쪽으로 후퇴할 것까지. 그리고 백제의 견훤이 이를 예상하고 청주에서 요격할 것까지 예상했어. 인근 지리를 잘 알았겠지.’

다만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꿈타령을 하는 유금필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개경의 비밀통로에서 제가 잠들었을 때 나타나 제 생명을 구해준 그 부인께서 나타나 청주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예 살까지 붙여가며 이야기를 했다.

‘결국 이 일전으로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왕건을 압도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왕건은 감도 못 잡고 삼년산성을 쳤는데 견훤은 왕건이 모든 행동을 예측하고 직접 나서지 않고 부하들만 보내서 왕건을 제압해 버렸다.

견훤이 세긴 센 것이다.

‘그런 견훤이 짠 수를 간파한 게 유금필인데. 결국 유금필의 능력이 왕건보다 뛰어나다는 거지.’

다만 그게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호족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퍼지면 곤란했다.

애초에 왕건 역시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유금필의 능력이 왕건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여러모로 불편해지는 것이다. 왕건의 마음이 많이 불안해질 것이다.

‘그래서 유금필은 모든 것을 예상했으면서 호족들에게는 어이없는 꿈 이야기만 한 거지.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소문이 퍼져야 유금필이 왕건의 의심을 피할 수 있으니. 굳이 나를 데려온 것도 그래프 그리기를 시키는 것을 넘어 이런 데 써먹기 위함이고.’

그리고 나는 유금필의 이런 움직임에 호응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기회에 이렇게 유금필에게 빚을 지워두면 나중에 써먹을 날이 올 것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