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6화
46. 탕정군
어떻게든 나를 전장으로 보내려는 왕건의 모습을 보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동양원 부인에게 빠져서 립밤을 빨리 마련한 일이 이리 돌아올 줄은. 졸지에 전쟁터에 나갈 판이군.’
물론 유금필을 따라 전장에 나가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탕정이면 최전선은 아니다. 삼년산성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실제 기록에서도 왕건은 유금필을 탕정에 보내 후방을 튼튼하게 한 뒤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지.’
이 무렵 충청도 지방에서 내 아버지인 임희나 충주의 유긍달은 확실하게 왕건 편을 들고 있었지만 나머지 호족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충청도의 나머지 호족들은 고려와 백제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건으로서는 자신이 가장 믿는 유금필을 탕정에 보내서 자기가 뒤통수를 안 맞게 사전작업을 해놓고 출진할 작정이었다.
‘확실히 유금필과 함께 가면 내 안전은 확보된다. 이 시대 유금필은 불패의 명장이니 나를 무조건 지켜줄 거야. 그리고 이번에 유금필과 함께하면 그와 친해질 수도 있고. 유금필과 친해지면 다른 호족들도 나를 경계하며 정윤과의 혼사를 방해하려 할 거야. 그리고 왕건도 이번에는 나를 방해하기 어렵다.’
왕건은 이번 삼년산성 공격에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공산 전투 이후 몇 달간 연전연패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번에 반드시 이겨서 상황을 반전시킬 각오였다.
그래서 유금필이 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하자마자 나를 딸려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전장에 나선다고 손해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이리 심란한 것은 개경을 떠나면 기껏 친해지려고 하는 동양원 부인과 헤어지기 때문이겠지.’
내가 지금 동양원 부인을 완전히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이 제일 잘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지금 내 처지에서 동양원 부인에게 어떤 마음을 품든 간에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원 부인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미적거리는데 문득 곁에서 유금필이 말했다.
“이미 연우 아가씨의 부친이신 상산백께서 상산에 내려가 계십니다. 연우 아가씨께서 저와 함께 탕정군으로 내려오신다면 상산백께서도 아가씨를 돌보기 위해 탕정군으로 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러면 좋겠군. 유 장군이 상산백과 함께 탕정군에 주둔하며 뒤를 막고 군량을 대주도록 하게. 연우야 너도 간만에 상산백과 만나고 좋지 않으냐?”
왕건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 곁에서 유금필 역시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유금필의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유금필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걸 눈치채는 순간 나는 동양원 부인에 대한 생각을 잊을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나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미약한 힘이라도 폐하와 유 장군님이 유용하다고 느끼신다면 즉시 따르겠습니다.”
내가 더 이상 발을 빼지 않고 나서자 왕건도 흐뭇한 기색이었다. 그 곁에서 유금필이 청을 올렸다.
“서둘러 탕정군으로 내려가야 하니 준비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연우 아가씨를 제 군영에 불러서 즉시 일을 맡기고 싶습니다.”
“흐음. 지금 군사일이 급하니 그대로 연우를 쓰도록 하시오. 연우야. 앞으로 학관에 나올 필요도 없고 한림원에 올 필요도 없다. 하하하. 공부 쉬니 좋지?”
왕건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최소한 사람이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주고 일을 시켜야지. 바로 이러면.’
내가 비록 탕정군으로 가는 것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 전에 동양원 부인도 만나고 이래저래 마음의 준비를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왕건이나 유금필은 그럴 짬도 안 줄 태세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그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분위기가 도무지 그렇게 개길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왕건은 이번 출정에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을 하긴 해도 그게 나한테도 느껴지고 있었다.
“예.”
그래서 나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엄청난 양의 서류뭉치가 쌓였다. 그 앞에서 유금필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탕정군으로 내려가 후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성도 쌓고 군량을 비축할 창고도 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거느린 군사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백성들도 동원해야 합니다. 촌주들이야 글을 알지만 그 밑으로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연우 아가씨가 말갈족들을 깨우칠 때처럼 그림을 그려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곁에 함께 서 있던 임연객을 노려보았다. 임연객은 재빨리 고개를 떨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유금필의 군영에 오니 이미 임연객이 와 있는 상태였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유금필에게 말했다.
“이걸 굳이 제가…….”
“병부낭중이 힘써 그림을 그려보기는 했으나 역시 연우 아가씨의 그림만 못했습니다. 말갈족들을 깨우칠 때의 그 느낌이 아닙니다. 그러니 연우 아가씨가 힘을 써주십시오. 병부낭중도 이번 출정에 함께 할 것입니다. 아가씨도 오라버니인 병부낭중과 함께 하면 든든할 것 아닙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유금필은 나에게 그렇게 일거리를 맡기고 바로 내 막사를 나섰다. 상당한 규모의 군사들을 탕정군까지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쁜 것 같았다.
그리고 유금필이 나가자마자 임연객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경에서 네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걸 숨기라고 나에게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유금필 장군에게 그걸 말해버렸어. 네 부탁을 들은 이후에 개경에 와서는 모두에게 내가 그렸다고 했다고. 일부러 네 부탁을 안 들어준 것은 아니야.”
임연객은 내가 그려준 그래프를 들고 가서 유금필을 만날 때 모든 진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괜히 유금필이 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립밤 사건도 그렇고 이미 임연객이 그래프를 가지고 갔을 때 나를 써먹을 마음을 품은 것 같았다.
“그래, 알겠어.”
나는 뭐라 화를 낼까 하다가 기력도 없고 임연객이 서경에서 유금필을 만나기 전에 경고하지 못한 내 책임도 있어서 관두었다.
“너 괜찮아?”
“근데 왜 굳이 서경에서 유금필 장군에게 대뜸 진실을 말한 거야? 나는 오라버니가 그 그림을 직접 고안한 것처럼 내세워서 유금필 장군의 총애를 얻을 줄 알았어.”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그야 뭐. 이런 특이한 것들을 내가 고안할 능력도 없는데 내가 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 나한테 또 일을 떠넘길 거 아니야? 그래서 유금필 장군에게 솔직하게 말했지.”
임연객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삶의 지혜가 있는 것은 임연객이었군. 나도 진작 임연객처럼 저런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종이 위에 그릇을 대고 원을 깔끔하게 그렸다. 유금필의 요구사항대로 그래프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나도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울게.”
임연객이 나섰다.
‘그래도 이번 전쟁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유금필의 휘하에 편제되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히려 일이 많은 것이 잘됐다는 생각도 했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마음도 진정될 것이다.
나는 현대에서 수년간의 대학원생 생활로 단련된 솜씨를 이용해 그래프며 표를 그리며 유금필이 놓고 간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역시 연우 아가씨의 손끝이 야무집니다. 이 정도면 탕정군에 내려가서도 회의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입니다.”
유금필은 내가 작성해서 올린 그래프를 보며 흡족한 기색으로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 외로 준비가 빨리 끝나서 내일 개경을 출발할 것입니다. 오늘 푹 쉬어두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예를 갖추며 물러나려고 했다. 유금필에게 내일 떠나니 오늘 개경에서 상산부인이나 나주 왕후, 동양원 부인 같은 지인들과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부탁은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유금필은 그걸 허락 안 해줄 테니까.’
유금필의 군영에서 그래프를 그리면서 유금필과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됐다.
유금필은 매우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군영 내의 기강을 엄격하게 잡았다. 나는 군인이 아니라 비전투원으로 종군하게 된 몸이었지만 유금필의 군영에 든 이상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도무지 출정 전에 아는 사람 좀 만나고 오겠다고 부탁을 할 분위기가 아니란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릴 때 문득 유금필이 입을 열었다.
“연우 아가씨가 공산전투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상산백께 폐하를 구하기 위해 사벌주로 가자고 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투의 향방을 예측하신 것입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개경에 오기 전에 폐하를 한번 알현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이제 내 재주를 다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 나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나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이 좋은 사람은 전투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유금필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나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역시 장군께서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다음 말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유금필은 이미 왕건이 삼년산성 전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야 미래에서 역사서를 보고 와서 안다지만 유금필은 자신의 순수한 군사적 능력으로 짐작하고 있다.’
내가 그것을 느낀 것은 왕건 앞에서 유금필이 나를 군영에서 쓰게 해달라고 부탁한 날이었다.
유금필은 내 아버지인 임희를 거론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는데 나는 그 의미를 눈치챘다.
내가 유금필의 군영에 종군하면 자연스레 임희도 나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유금필 휘하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면 임희와 상산 군졸들은 패배가 예정된 삼년산성의 전투에서 자연스레 발을 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빨리 유금필 자신을 따르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삼년산성에서의 패배 이후 곤경에 처한 고려군을 수습한 것이 유금필이기도 하고. 거의 미리 준비하고 있은 듯한 움직임이었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유금필이 은근히 보내는 신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아가씨께서 생각하시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에 관해서는 지금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년산성의 전투가 채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패배를 운운하는 것은 대역죄로 몰릴 수도 있었다. 입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폐하를 말리시는 것이.”
나는 유금필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폐하는 마음의 여유를 많이 잃으셔서 누가 나서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느니 지금처럼 움직이는 것이 맞습니다. 아마 그때 가서는 연우 아가씨의 도움이 한 번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금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군께 무슨 도움을 드릴지 알 수는 없으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한 유금필에게 협조하며 그 신임을 얻는 것이 나에게 가장 상책이라 나는 순순히 그리 말했다.
“허허허.”
그런 나를 보며 유금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당황해서 묻자 유금필이 말했다.
“내 딸아이가 아가씨께서 순진하고 지켜줘야 할 면이 많으니 잘 돌봐달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이미 연우 아가씨의 지혜로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데 딸아이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
“아, 동양원 부인께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나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동양원 부인도 내 걱정을 하긴 했구나. 유금필에게 따로 청을 한 거 보면.’
그 생각을 하니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