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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4화 (4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4화

44. 인연

나는 내 선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동양원 부인과 유금필의 눈치를 살폈다.

동양원 부인은 이번에도 판단을 자신의 아버지인 유금필에게 미루는 것 같았다. 동양원 부인이 유금필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유금필은 한 걸음 나서며 쟁반 위의 립밤을 집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유금필이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 이 연고를 바르면 입술이 트지 않습니까? 재료가 뭡니까?”

“예, 장군. 밀랍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겉에 공들인 나무 조각이야 생략해도 된다지만 연고의 재료가 밀랍이라면……. 밀랍은 값싼 재료가 아닌데 이걸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장졸들에게 다 나눠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유금필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갑자기 유금필 몸에 대학원 교수님이 빙의했나?’

좋게좋게 넘어가면 될 일을 또 예리하게 파고드는 유금필에게 나는 좀 당황했다.

“그야 모든 군졸들에게 나눠주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으로 내리면 됩니다. 군사일을 하다 보면 애매한 공을 세운 사람이 나옵니다. 비단이나 곡식을 주기는 그런데 또 아무것도 안 줄 수는 없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격려차 내리면 됩니다. 또 밀랍이 싼 재료는 아니지만 이걸 만드는데 밀랍 양이 또 엄청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반쯤 횡설수설하며 대답했다.

“허허허.”

유금필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동양원 부인이 나서더니 말했다.

“뜻깊은 선물을 준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역시나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미리 예측한 반응을 보여주는 동양원 부인을 보니 나는 마음이 놓였다.

“예, 그럼.”

나와 오지수는 동양원 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오지수가 투덜거렸다.

“저 할어버지는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여태까지 다른 사람이 선물을 줄 때는 별말 없이 죄송하다고만 하다가 우리가 선물을 주니 괜히 시비를 걸고 있어요.”

“어허 그게 무슨 무례냐?”

그 소리를 들은 나주 왕후가 오지수를 꾸짖었다. 그리고 들릴 것을 걱정하는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연우 언니 덕에 사람들이 감탄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저도 연우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이 연고를 이미 봤는데 왠지 색다르게 보였어요. 장자라는 책도 있나 보죠. 연우 언니는 그 책을 다 읽었나요?”

오지수는 그래도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나주 왕후의 꾸짖음에도 웃으면서 물었다.

“절대 아니야. 그냥 그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만 읽었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현대에 있을 때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 재밌는 이야기만 골라 만든 교양서를 반쯤 읽다가 말았다.

‘장자는 한문으로는 엄청 어려운 책이라고. 괜히 읽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물으면 곤란해.’

어쨌든 내 뒤로도 몇몇 사람들이 선물을 바치고 또 퇴짜를 맞는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선물주기 행사가 끝나자 동양원 부인이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시녀들이 푸짐한 음식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시간이 온 것이다.

‘빨리 먹고 가자. 다 먹으면 돌아갈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 * *

동양원 부인의 생일 잔치도 끝나고 나는 나주원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이제는 이틀만 있으면 상산저로 돌아가는구만.’

왕건이 처음 나에게 한 달에 일주일은 나주원에서 지내라고 했을 때는 별것 아닌 명령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상산저와 나주원을 오락가락하며 살려니 보통 귀찮은 게 아니었다.

‘오락가락할 때마다 짐을 싸야 하니 이거 원. 이 책들은 그냥 여기에 남겨두고 갈까?’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또 와야 할 나주원인데 모든 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별로 안 중요한 짐은 그냥 나주원에 놓고 가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히 짐을 싸다가 몸이 찌뿌둥해서 산책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정원을 걷고 있는데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봄이 슬슬 다가오네.”

내가 서경에 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이 1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오니 2월 중순이었다.

이때는 음력으로 계산을 해서 양력으로 치면 3월이었다. 또 이 시대는 현대보다 약간 따뜻한 편이라서 슬슬 꽃이 피고 있었다.

“이 꽃 이름이 뭘까?”

나는 현대인이라서 사실 꽃을 봐도 그 이름을 잘 몰랐다. 사실 한문 공부를 하려면 꽃의 이름이나 그 특성에 대해서 알아놓긴 해야 했다.

한시나 한문 문장에 꽃을 비유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꽃 이름이나 꽃들의 특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현대인으로서 현대 식물학자들의 연구성과 같은 걸 간편하게 볼 수 있으니 꽃들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 시대 사람들보다 더 해박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 꽃을 보면 이름을 잘 모르니. 억지로 사진을 보고 외운다고 외워지는 게 아니라서. 주입식 교육의 한계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걸을 때였다.

“저 꽃의 이름은 수선화다. 이것은 목련이고 저것은 수국이고.”

한쪽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왕무였다.

‘갑자기 왜 쟤가 여기에. 하긴 원래 나주원이 왕무 집이었지.’

간만에 자기 집에 돌아온 모양이다.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무슨 화보 같았다. 왠지 모르게 기가 죽은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오래간만에 집에 왔는데 그대가 동양원 부인의 생일 때도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유금필 장군은 내가 특별히 존경하는 분인데 항상 그대의 도움만 받는군.”

왕무가 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서경을 오가는 여정에 저와 오라버니가 전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동양원 부인의 생일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왕무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애매하게 친해져 버려서 너무 문제야. 할 말이 없어도 같이 있을 때 말이 없으면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 다른 꽃 이름이라도 물어봐야 하나 생각했을 때였다.

“내가 군무가 바쁜데 잠깐 어머님을 뵙기 위해 나주원에 온 것이라…… 아무래도 조만간 출전이 있을 것 같다. 조정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심상치 않아.”

왕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말했다. 확실히 조만간 왕건이 삼년산성 쪽으로 대공세를 펼칠 것이니 그 준비를 해야 하긴 할 것이다.

“아, 그러면 일을 보셔야죠.”

그 생각에 내가 입을 여니 왕무 역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래서 이만.”

그러더니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왕무는 그대로 멀어져갔다.

‘아니 이럴 거면 왜 온 거지?’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산책을 계속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식사를 하는데 오지수가 울상을 지었다.

“이제 내일이면 연우 언니가 떠나네요. 언니, 그냥 나주원에서 계속 지내시면 안 돼요?”

삶은 돼지고기를 먹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목에 걸릴 뻔했다.

‘여기에 계속 살기 싫어서 여태 애를 쓴 건데. 물론 나주 왕후나 오지수가 싫어서는 아니고. 혼사가 파토나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지수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한 달에 일주일만 지내라고 하셔서 도리가 없네요.”

“그럼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언니가 한 달 내내 여기 있으라고 부탁드릴게요.”

오지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얘가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네.’

적당히 왕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오지수의 이런 반응에 허를 찔린 내가 머뭇거릴 때였다.

시녀 하나가 황급히 다가오더니 나주 왕후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나주 왕후는 내쪽을 보더니 말했다.

“연우야. 동양원 부인이 너를 따로 만나고 싶다는구나. 동양원에서 사람이 와서 전갈을 전했다. 언제 시간이 되니? 시간에 맞춰 준비를 해놓겠다는구나.”

“아 그러면 오늘 학관 끝나고 가능합니다.”

나는 순간 계산을 마치고 냉큼 대답했다.

‘동양원 부인과 연결이 되면 자연스레 유금필과도 가까워지는 건데. 그러면 또 한 번 정세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왕건이 설마 이것도 파토 내지는 못하겠지.’

거기에 최언위가 나에게 휴가를 꽤 길게 줘서 학관이 끝나고 바로 동양원에 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 그러면 그리 전하마.”

나주 왕후가 내 말을 듣고 시녀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날 오후 학관 수업을 마친 나는 바로 나주원으로 돌아와서 옷차림을 정돈하고 동양원으로 향했다.

나주 왕후가 붙여준 시녀와 함께 동양원 앞에 당도하자 미리 말이 되어 있는지 바로 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동양원 부인이 정원 한쪽에 세워진 정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 아가씨.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니 반가워요.”

“동양원 부인을 뵙습니다.”

내가 공손히 예를 표하는데 동양원 부인은 가볍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연우 아가씨가 꾀가 많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내 생일날 그 소문이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예? 놀라다니.”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동양원 부인이 말했다.

“아버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날 깜짝 놀랐을 거예요. 남이 건넨 선물에 손을 대고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묻는 모습이라니. 나도 정말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아 그랬나요?”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평소 유금필의 모습을 모르니 알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그러면 립밤이 통한 건가?’

그때 동양원 부인이 나에게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그리고 나도 정말 고마웠어요. 모든 사람들이 내 생일인데 아버님의 취향과 비위만 고려해서 선물을 바치니. 어차피 받지 않을 선물이라도 서운하죠. 내 생일선물로 보검을 가져오는 사람들 생각은 이해가 안 가요. 그런데 연우 아가씨 선물은 나도 생각해 준 거니까요. 입술에 바르면 윤기가 난다고 했죠. 아버님이 아닌 나를 봐준 사람 중에 연우 아가씨가 있네요.”

그리 말하는 동양원 부인의 어조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동양원 부인은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순간 뜨끔했다.

‘나도 어차피 유금필만 생각하고 동양원 부인은 미처 생각 못 했었는데.’

그 생각에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동양원 부인께서도 참 아름다우시고 또…….”

나는 뭔가 동양원 부인의 칭찬을 더 하려고 했는데 아는 게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서로 친분이 없으니 외모 말고는 칭찬할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문득 동양원 부인 같은 미녀가 내 손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동양원 부인이 무릎을 살짝 굽히더니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 쪽에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내가 아름답다니. 칭찬 고마워요.”

“예.”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동양원 부인이 또 웃으면서 손짓을 했다.

“여기 앉아서 대화를 해요.”

정자에 준비된 탁자와 의자에 나와 동양원 부인은 앉았다.

“오늘 내가 연우 아가씨를 초대한 이유는 아버님의 부탁 때문이에요. 아버님은 정말 연우 아가씨가 고안한 연고가 마음에 드신 것 같아요. 군사들의 사기 진작용으로 우선은 100개 정도를 원하시나 봐요. 다만 선물이 아니라 제값을 주고 사기를 원하세요. 우리가 선물을 못 받는 이유는 연우 아가씨도 아시겠죠?”

동양원 부인이 차분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아 100개나요?”

나는 기뻐서 외쳤다. 립밤으로 돈을 벌겠다는 내 구상이 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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