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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3화 (4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3화

43. 동양원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동양원 부인의 생일이 코앞이었다. 유금필 역시 이미 개경으로 돌아왔다.

‘임연객은 돌아온 유금필을 잘 찾아갔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앞의 화로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냄비 안에 쑤셔 넣은 밀랍이 스르르 녹고 있었다.

적절한 시기를 맞춰 녹아내리는 밀랍에 향기가 나는 기름을 떨어뜨렸다.

“와! 저도 해볼게요.”

오지수가 신이 나서 외쳤다. 이런 립밤 만들기 같은 활동이 이 나이대 소녀에게는 재밌긴 재밌을 것이다.

‘내가 립밤 만들기를 해보고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도 봉사활동 가서 학생들이 만드는 것을 도와줘서 그렇지.’

나는 그때 기억을 되살리며 오지수를 도왔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한동안 밀랍을 이 막대기로 계속 저으세요.”

“예.”

내 지시에 따라 오지수가 움직였다. 그 뒤에 향기가 나는 녹은 밀랍을 미리 준비한 틀에 넣어서 굳혀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애초에 립밤 만들기는 간단해서 내가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틀에서 굳어진 립밤을 나는 목수가 만들어 바친 케이스에 넣었다. 목수가 내 요구대로 아기자기하게 겉에 장식까지 해서 만든 케이스였다. 그 안에 립밤을 넣으니 고급 장신구 같았다.

“와아아아!”

오지수는 자기 손으로 만든 립밤을 손에 쥐고 탄성을 질렀다.

“공주님이 만드신 건 공주님이 가지세요.”

재료값은 내 돈이었지만 나는 그리 인심을 썼다.

“이런 기물은 정말 처음 봐요. 동양원 부인의 생일에 이런 건 처음일 거예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 진짜 입술에 바르면 되나요?”

오지수는 자신의 입술에 립밤을 발라보았다. 메마른 입술에 윤기가 돌았다.

‘어느 정도 미용의 기능도 있는 게 립밤이고 딱 알맞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말했다.

“동양원 부인의 생일 전까지는 비밀이 유지돼야 하니 학관에는 가져가지 마세요. 동양원 부인의 생일날 저와 나주원이 함께 준비한 선물이라고 하고 건네면 될 거예요.”

원래 나는 서경에서 내 현대 지식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선보이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이걸 고안했다고 말하며 이를 빌미로 유금필에게 접근하고 돈을 벌어야 다른 세력들이 나와 상산을 두려워하며 혼사를 방해해 주지. 아니 무엇보다 왕건을 보면 오지수가 이걸 고안했다고 거짓말을 쳐도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그냥 시원하게 내가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 * *

이윽고 동양원 부인의 생일 당일이 되자 궁 안이 떠들썩해졌다. 수많은 왕실 사람들이 동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동양원 부인은 고려 제일의 장수라고 할 만한 유금필의 딸이기에 그 생일이 되자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나주 왕후와 오지수와 함께 동양원으로 향했다.

“예,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끊임없이 몰려오는 손님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시녀가 우리를 안내했다.

‘동양원도 소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주원보다는 훨씬 낫군.’

나는 건물 규모나 장식을 보며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시녀가 안내한 자리에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진짜 다 미녀들뿐이군.’

멀리서 충주왕후와 유설란, 황주왕후와 황보인혜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 한쪽에는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정주왕후 역시 나와 있었다.

이 외에도 왕건의 여러 부인들이 하나같이 상석에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미모가 대단했다.

‘왕건이 단순히 정략결혼이 아니라 미모도 보는 사람이니 여러 호족들이 집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들을 보냈을 것 같아.’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나는 울분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유금필을 비롯한 여러 왕후며 부인들의 부모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긍달은 왕건의 명을 받아 충주로 내려가 있어서 없었지만 다른 유력자들은 유금필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추 사람들이 다 자리에 앉고 혼란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가장 상석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동양원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씬하면서도 키가 크고 나른한 눈매를 한 미녀였다.

“오늘 제 생일에 이리 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목소리도 정말 시원시원했다. 나는 그 모습에 취할 것 같았다.

“동양원 부인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또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신 유금필 장군 역시 축하를 받으십시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외쳤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몸을 먼저 일으켰다. 얼굴이 눈에 익었는데 다름 아닌 대내학사 김악이었다.

“폐하의 명을 받아 동양원 부인을 축하하기 위해 이리 왔습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입니다.”

아무래도 왕건은 일도 바쁘고 아내도 워낙 많으니 자신의 측근 김악을 대신 보내 축하하고 선물을 보낸 것이다.

‘하긴 왕건이 직접 다니면 일 년에 몇 번 다녀야 할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하인들이 쟁반에 정교하게 세공된 청자들을 올려놓고 가져왔다. 왕건의 선물인 모양이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동양원 부인은 왕건의 선물이 당도하자 상석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며 그것을 받았다. 유금필 역시 딸과 함께 나와서 예를 표했다.

‘왕건의 선물은 받나 보네. 하긴 그걸 안 받으면 이상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약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왕건의 선물을 시작으로 여러 왕후며 부인들이 선물을 주기 시작할 게 뻔했다.

나도 내가 만든 립밤을 선물로 바치며 그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생각을 하니 떨리긴 떨렸다.

내 생각대로 여러 부인들부터 어마어마한 선물을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뭐 기본이 금으로 만든 것이군.’

한가락 하는 호족들이 유금필에게 호의를 보인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준비를 한 선물이니 대단하긴 했다.

진귀한 금세공품도 나오고 기이한 모양의 수석, 정교한 자수가 놓인 비단옷 등 별별 선물이 다 나왔다.

“죄송합니다.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동양원 부인은 사과를 하며 선물을 거절했다. 유금필 역시 선물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의미로 예를 표했다.

사람들은 이에 익숙한 듯 선물을 거절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선물을 가져온 사람들도 동양원 부인을 보기보다는 장내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자신들이 준비해 온 선물을 자랑했다.

어떻게 이 선물을 구해왔는지 구구절절 장내에 설명하며 자신들의 부와 수완을 선보이려는 의도가 역력히 보였다.

‘립밤을 선물이랍시고 가져왔는데 이게 잘한 걸까? 적당히 꾸며댈 명분은 잘 준비해 왔는데. 그냥 남들처럼 적당히 금으로 뭐라고 만들어 왔으면 됐나? 상산의 힘으로 그 정도는 가능한데.’

온갖 호화찬란한 선물을 보고 있자니 나는 기가 죽었다.

그리고 어느덧 황주원 쪽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선물을 선보일 차례가 되었다. 황보인혜가 대표로 나왔다.

그런 황보인혜 뒤에서 하인들이 보자기로 덮어 놓은 길쭉한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 있던 한 듬직한 체구의 중년인이 문득 외쳤다.

“오늘만큼은 아무리 청렴한 유금필 장군이라도 이 선물을 받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오.”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였다.

“황보제공 공께서 저리 말씀하실 정도면 뭔가 엄청난 준비를 한 모양이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바로 황보제공!’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나는 얼굴을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그사이 동양원 부인의 앞에서 황보인혜가 보자기를 펼쳤다.

그 안에서 고풍스러운 보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었다.

“이 검은 바로 열박검입니다. 더 이상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동양원 부인께 이 보검을 드리니 받아주십시오.”

황보인혜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 역시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박검! 저게 정말 실존하는 검이었나?’

열박검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젊은 시절 수련을 위해 열박산에 들어가 사용했다는 보검이었다. 그 검이 등장했다니 현대의 사학석사인 나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정도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보 형. 아니 열박검을 무슨 수로 구했습니까?”

한쪽에 앉아 있던 평주 호족 박수경이 놀라서 외쳤다.

유명한 무장이자 호족인 박수경도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낸 상태라 오늘 참석했는데 열박검을 보고 놀란 것이다.

“김유신의 후손들이 몰락한 뒤 열박검은 그를 안타깝게 여긴 한 고승이 관리했는데 난세라서 흘러흘러 우리 황주의 손에 들어온 것이오. 우리에게 검을 건넨 고승은 분명 저것이 열박검이라고 했소. 한 번 저 검을 보면 모두가 열박검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황보제공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황보인혜가 열박검을 뽑아 들었다.

어떻게 연마를 했는지 검광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황보인혜가 두꺼운 책 한 권 위에 검끝을 올려놓고 그어내렸다.

사락-

그러자 책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대단한 예리함이었다.

“오오오.”

주변에서 감탄성이 일었다. 꼭 진품 열박검임을 확신할 수 없더라도 엄청난 보검인 것은 틀림없었다.

동양원 부인은 열박검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친인 유금필 쪽을 바라보았다. 유금필에게 선물을 받을지 말지 정하란 의미였다.

“황보 공께 죄송하지만 받기 어렵습니다.”

유금필이 담담하게 예를 갖추며 황보제공에게 말했다.

“유 장군은 과연 욕심이 없습니다. 하하하. 나는 사실 유 장군이 열박검을 받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황보제공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황주원은 냉큼 열박검을 거두어들였다.

황보제공도 진짜 열박검을 내줄 마음은 없었고 황주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오늘 검을 선보인 것이다.

황보제공에게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곁에 몰려들었다. 이때는 후삼국의 난세라서 여러 호족들도 거의 무장이었다.

김유신의 열박검이 출현하니 그쪽으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궁금해서 열박검을 한번 보러 가셨을 거야. 근데 하필 나주원이 황주원 다음 차례라니.’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니.”

오지수 역시 내 소매를 잡으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나는 오지수와 함께 쟁반에 립밤을 담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우리가 나서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비웃는 걸까? 아니면 그냥 생일 잔치니 기뻐서 웃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쟁반 위에 놓인 립밤 10개를 바라보았다. 목수가 정성을 들여 세공한 립밤 케이스지만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작아 보였다.

그리 생각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는 것처럼 느꼈다.

온갖 잡념에 시달리며 겨우 동양원 부인 앞에 선 나는 립밤 하나를 집어 들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일찍이 장자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연고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한 나그네가 그 연고를 만드는 비방을 비싼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수군을 운용하며 군사들의 손이 트는 것을 걱정하는 오나라 왕에게 가서 그 연고를 바쳤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왕은 그 나그네를 장군을 삼았습니다. 저와 나주원 역시 그 고사를 떠올리며 이 연고를 만들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러면서 나는 립밤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고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것을 바르면 추운 겨울날 군사들의 입술이 터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바르면 입술에 윤기가 나서 용모에도 도움이 됩니다. 오늘 동양원 부인의 생일을 축하하며 이 연고를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나는 정중히 동양원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주변 반응을 살피니 사람들이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다.

‘싼값에 구색은 맞췄다. 역시 장자의 고사를 끌어들여서 입을 털어서 다행이야.’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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