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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42화 (4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2화

42. 생일

내가 립밤을 동양원 부인의 선물로 택한 것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이번에 서경에 다녀왔을 때 추위로 고생하는 군사들이 많다는 말을 얼핏 들었어. 추우면 입술이 터지게 돼 있는데 립밤이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거야. 닭 문제가 터진 것도 강풍으로 기온이 떨어져서 그런 거고.’

나도 김선우였던 시절 군대에 있을 때는 립밤 같은 것을 꽤 사용했었다.

처음에 훈련소에 가게 될 때 주변 사람들이 무슨 립밤이며 썬크림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겨줄 때는 신경질만 났다.

안 그래도 군대 갈 생각에 심란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챙겨줘도 고마운 줄 몰랐다.

거기에 원래 내 생활습관은 그냥 비누로 세수만 하고 얼굴에 그 어떤 것도 안 바르고 다니는 거였다.

‘그런데 막상 군대에 가고 나면 그런 몸을 좀 보호해 주는 사소한 물품들이 요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립밤 같은 것도 별게 아닌 것 같아도 없으면 입술이 터져서 갈라져 버린다. 그러면 안 그래도 힘든데 수습이 안 된다.

‘사실 더 요긴한 것은 썬크림이지만 그건 만들 줄을 모르고. 아쉬우나마 립밤을 만들어야지.’

유금필 역시 북방에 오래 주둔하며 군졸들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봤으니 립밤을 보면 솔깃하긴 할 것이다.

‘물론 유금필은 이 선물도 안 받겠지. 그동안 안 받다가 뭐 하나라도 받으면 난리가 나는 상황이니. 그러나 내가 군졸들을 생각해서 이 립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을 그날 사람들에게 알리면 얼마나 생색이 나겠어? 나주원이나 오지수의 체면도 서고. 무엇보다 나중에 이 립밤을 더 만들어서 팔기 위해 좋은 홍보를 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나는 이번에 그냥 덜렁 립밤 하나를 만들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처음 나주원에 들어올 때 임희가 많은 예물을 준비했다. 가난한 나주원의 사정을 고려해서 그리 한 것이다.

‘그런데 상산에서 한도 끝도 없이 나주원을 먹여 살릴 수는 없고 자체적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해야지. 이 립밤 같은 것을 이용해 돈을 좀 끌어와야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가 혼자 너무 오래 생각한 것 같았다.

“언니, 저 노인이 함께 물건을 보러 가자고 하는데요?”

생각을 하느라 잠시 멍하게 있는 나를 향해 오지수가 말했다.

“어, 그래. 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왕 노인의 뒤를 따라 물건들이 보관된 창고로 향했다.

“밀랍은 여기 있습니다.”

왕 노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전부인가요? 양이 좀 더 필요한데.”

나는 립밤을 많이 만들어 팔 생각이어서 밀랍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을 생각이었다.

“더 필요하시면 중국 쪽과 교역을 해도 되고 시일만 주시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왕 노인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더 구해주세요. 그리고 기름도 보러 가죠.”

립밤을 만들 때 향기가 나게 기름을 좀 섞어줘야 했다.

“여기에 여러 기름들이 있습니다.”

왕 노인은 선반에 놓인 여러 개의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주 마마. 공주 마마 취향에 맞는 기름을 한번 골라주세요.”

나는 오지수를 보며 말했다. 어느 기름이든지 상관이 없었기에 오지수에게 맡기기로 했다.

“잘 고를게요.”

오지수는 눈을 반짝이며 신중하게 기름병 마개를 하나하나 열어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3개쯤 되는 기름을 골랐다.

그사이 나는 왕 노인에게 말했다.

“정교한 세공이 가능한 목수를 한명 소개해 줄 수 있나요?”

립밤을 넣을 케이스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케이스를 좀 예쁘게 만들어야 선물의 가치가 있지. 그리고 립밤 장사를 할 때도 그렇고.’

나는 호족들을 상대로 립밤 장사를 할 작정이었다.

‘사실 밀랍 가격만 해도 너무 비싸서 서민들에게 저렴하게 팔아서는 도무지 수지타산이 안 맞아. 호족들 상대로 비싼 돈을 받고 팔아야 좋다. 케이스에 공을 들여서 아기자기한 장신구 느낌도 줘야 해.’

왕창근의 상단이 커서 그런지 목수도 상단 내에 상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왕 노인은 그리 말하고 나가서 잠시 뒤 한 사람을 데려왔다. 옷에 톱밥도 묻어 있고 누가 봐도 목수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걸 만들 수 있나요? 한두 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많이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도면 하나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립밤을 만들겠다고 미리 생각하고 온 만큼 케이스 도면도 그려온 상태였다.

유심히 도면을 살펴보던 목수가 말했다.

“처음 만들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만큼 족히 이틀은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만드는데 속도가 좀 날 것입니다.”

“좋아요. 그대로 진행하죠. 이틀 후에 완성품을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수는 내가 건넨 도면을 소매 속에 넣고는 연신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필요한 물건은 다 구하셨습니까?”

왕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예, 이제는 정산을 하죠.”

나는 내 소매 속에 있는 은병 토막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희가 용돈도 그간 풍족하게 주고 나주원에 들어올 때 무슨 일이 있으면 쓰라고 은병을 내주었다.

거기에 한림원 직원으로서 녹봉까지 받고 있었다. 당장 쓸 돈은 넉넉했다.

‘한림원 직원으로 일하느라 서경까지 다녀오고 힘들었지만 이럴 때는 또 녹봉을 받는다는 것이 든든하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왕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종이에 뭔가를 쓰며 계산을 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생각 외로 내가 구입한 물건들의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나는 시원스레 은병으로 값을 지불했다.

“아가씨께서 밀랍도 더 구해 달라고 하셨지요? 혹여 기껏 구해놓았는데 마음이 바뀌시면 저희 상단이 곤란해집니다. 여기 향후 상단에서 구해온 밀랍을 구입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이후 왕 노인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죠.”

계약서를 살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밀랍 양은 충분히 소화가 가능할 듯싶었다.

나는 계약서 한쪽에 가볍게 서명을 했다. 왕 노인은 그 서명을 유심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얼마 전 백제에서 온 최승우를 서예로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분이 맞습니까?”

“예, 맞아요. 우리 언니가 그랬어요. 그 소문이 여기까지 났군요.”

곁에서 오지수가 기쁜 기색으로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그 덕에 나는 곁에서 잔잔한 미소만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개경에서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소문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 상단에서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왕 노인은 나와 오지수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자주 오겠습니다.”

나는 왕 노인에게 그렇게 말해주며 상단을 나섰다. 앞으로 립밤 재료를 더 구할 때도 그렇고 이 상단의 신세를 많이 져야 할 것 같았다.

왕 노인의 일처리도 신속하고 깔끔했다.

상단 밖에 나오자마자 오지수는 곁에서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와. 언니 너무 멋있어요. 일하는데 정말 놀랐어요. ‘이제는 정산을 하죠’하며 소매 속에서 은병을 꺼낼 때도 그렇고. 엄청 노련해 보였어요.”

“그게 별게 아닌데요?”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지수는 그동안 궁 안에서만 지내서 그런지 별거 아닌 거래에도 흥분한 모양이었다.

“우와 지금은 더 멋있어요.”

그런데 머리를 긁적이는 내 모습을 보고 오지수는 더 흥분한 기색이었다.

‘어쨌든 오지수의 기분이 풀렸으니 나주 왕후는 좋아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주원으로 돌아갈 수레에 오지수와 함께 올랐다.

* * *

그렇게 내가 립밤을 만들 준비를 착착 하는 와중에도 역사는 흐르고 있었다.

‘한림원 직원이 돼서 힘든 점도 많지만 좋은 점도 있네.’

학관 수업을 마치고 한림원 한쪽 구석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왕건은 상당히 신중한 표정으로 학사들에게 명을 내리고 있었다.

“삼년산성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찾아서 베끼도록. 사소한 것들이라도 모두 다 베껴서 내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라. 아 그리고 김헌창의 난과 관련된 기록들도 필요하니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아.”

“명을 받듭니다.”

학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사방으로 흩어져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 그 사이에 껴서 책을 펴서 살폈다.

책을 보다가 삼년산성이나 김헌창이란 단어를 보면 그 부분을 옮겨 적기만 하면 됐다.

‘이 시대는 인터넷이 없으니 뭔가 자료를 찾으려면 이렇게 수많은 학사들을 부려서 검색을 해야지. 그건 그렇고 지금 자료수집을 하는 걸 보니 왕건이 조만간 삼년산성을 칠 계획이군.’

사벌주, 오늘날의 경상북도에서 견훤에게 연전연패한 왕건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충청도 쪽으로 방향을 바꿔 대공세를 펼친다.

오늘날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역사서에 남을 만한 큰 전투였다. 미래에서 온 나는 이 전투의 결과도 알고 있었다.

‘왕건이 여기에서도 대패하지.’

그러고 보면 이리 자주 패배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는 게 신기하긴 하다.

어쨌든 나는 왕건의 패배를 알고 있었지만 이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왕건의 명을 받아 몇 차례 일을 해결하긴 했어도 이런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는 일에 끼어들 짬은 아니었다.

‘나 같은 어린 소녀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을 거고 괜히 설치다가는 오히려 함부로 군무에 개입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거기에 나는 혹여 내가 왕건의 군사작전에 잘못 끼어들어 역사를 뒤틀어 버릴까 봐 걱정이 돼서 관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엄청난 패배를 많이 당하긴 하지만 왕건은 끝내 삼한을 통일해 낸다. 괜히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나비효과라도 일어나서 역사가 변하면 곤란해.’

나는 그런 계산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군사 쪽 일에게 안 끼어들 생각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왕건이 지금 노리는 게 삼년산성이면 현대인인 나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삼년산성은 현대에도 남아 있는 성이다. 사학과인 나도 답사 겸 한번 가봤다.

그런데 꼭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삼년산성에 한번 가보면 이 성이 막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현대 지식이 있어도 삼년산성 같은 성을 깨뜨릴 방법은 없어. 화약 같은 걸 쓰면 몰라도.’

그런데 사학석사인 나도 화약을 만드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전근대에 화약을 만드는 과정은 너무 복잡했다.

그쪽 관련 전공을 하면 몰라도 고려사를 전반적으로 연구한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뒤지고 있을 때 왕건이 최언위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김헌창의 반군이 삼년산성을 장악하자 신라 조정의 군사들이 여기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음 좋아. 이때 기록을 좀 집중적으로 찾아와.”

왕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학사들이 바친 기록들을 읽으며 지시를 내렸다.

‘김헌창의 난 때랑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른데. 어쨌든 왕건의 표정을 보니 어차피 말려도 소용없겠군. 무조건 삼년산성을 한 번 칠 작정이야. 이미 아버님과 유긍달 등 충청도 쪽 호족들을 그쪽으로 보내놓은 것도 그렇고.’

나는 다만 패배가 확정된 이 전투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열심히 궁리했다.

‘그냥 패배가 예정된 전투니 발을 빼고 있는 게 상책이지. 안 엮이는 게 제일 이득이야.’

그리고 곧 나는 그런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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