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39화 (3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9화

39. 귀경

‘임연객은 왜 이리 안 와?’

나는 내 처소에서 혼자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임연객은 점심을 먹기 전에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가지고 달려 나갔다.

그런데 저녁 때가 다가오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거 참.’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임연객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임연객이야 서경 안에서 돌아다니는데 별일이 없겠지. 다만 내가 그린 그래프가 지금 시대 장수들에게도 그 효용성을 인정받을지 정말 궁금해.’

이 호기심 때문에 나는 잠도 안 왔다.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유금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임연객이 말했는데. 설마 아직도 유금필을 못 만나고 줄을 서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한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상기된 표정의 임연객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됐어?”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유금필 장군이 내가 가지고 온 그림을 보고 정말 감탄하셨어. 이 정도 그림이면 휘하의 말갈 족장들도 쉽사리 이해시킬 수 있겠다고. 나보고 기다리라고 한 다음 유금필 장군을 호위하며 여기까지 온 말갈족들에게 직접 그 그림을 보여줬어. 말갈족들도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하니 감을 잡더라고.”

임연객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통했구나. 어쨌든 오빠 소원대로 유금필 장군 눈에 들었겠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물었다. 역시나 그다지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지도 않은 내 현대 지식이 이리 효과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뭐 그렇지. 그 뒤에 유금필 장군이 직접 나와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셨어. 그리고 식사를 같이하며 이것저것 물으시더라고. 유금필 장군이 나더러 함께 북방에 잠시 머무르자고 권유까지 하셨지. 그런데 나는 어명을 받고 이곳에 온 거라 개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아쉬워하시더라. 으하하하. 그러더니 유금필 장군이 조만간 개경에 갈 거라고 그때 꼭 찾아오라고 당부하셨어. 그러면서 이런 명첩까지 주셨네. 이 명첩을 들고 오면 바로 유금필 장군을 만날 수 있대.”

임연객이 품속에서 자신이 받은 명첩을 꺼내 보여주며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유금필이 슬슬 남부 전선에 투입되려나 보군. 하긴 왕건이 견훤에게 이리 몰리고 있으니. 왕건이 지닌 최고의 패인 유금필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임연객에게 말했다.

“잘됐네. 그건 그렇고 오빠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뭐든지 말해.”

임연객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내가 이 그림들을 그렸다는 것을 개경에 가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 오빠가 고안한 것처럼 하라고. 별거 아니지? 어차피 유금필 장군한테도 오빠가 공을 세운 것처럼 자랑했을 거 아니야?”

나도 나름 이 후삼국 시대에 떨어진 이후 내 행동에 대해 많은 것을 반성했다.

‘그동안 내가 지닌 재주를 너무 드러냈다. 이번에 왕건에게 찍혀서 이 서경까지 오게 된 것도 결국 그거 때문이고. 그러니 슬슬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앞으로는 임연객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뭔가를 선보여야겠어.’

이러면 내 재주를 어느 정도 숨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도 베푸는 격이었다.

“……어 굳이 개경에 가서도 그러라고?”

내 말을 들은 임연객은 약간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응, 근데 왜 이리 말을 더듬어?”

“그야 생각해 보니 내가 누이인 너의 공을 가로채는 셈이 되니까 그렇지. 정말 내가 고안한 것처럼 해도 된다고?”

“어 제발 그렇게 해. 어차피…….”

나는 슬며시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나도 다른 사람이 발견한 현대지식을 가지고 내가 고안한 것처럼 하는 거니. 상관없지.’

“네가 정 그렇다면 알았어.”

임연객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이제는 정말 돌아갈 때가 다가왔다. 유금필과 개경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잡아놓고 모든 소원을 성취한 임연객은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짐을 다 싸놔. 나는 군졸들과 함께 말을 준비할게. 서경에서 개경으로 가는 상단이 없으려나? 그 사람들과 좀 함께 가면 안전하고 좋은데. 어쨌든 밖에서 준비를 마치면 부를게.”

나에게 그리 말하며 임연객은 개경까지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진짜 개경에 돌아가면 상산저에서 좀 푹 쉬어야겠다.’

이제는 진짜 거기가 내 집처럼 느껴져서 거기에서 자야 피로가 풀릴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마음이 설렜다.

짐을 다 싼 나는 임연객이 나를 부르지도 않았는데 등에 짐을 지고 문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임연객을 기다릴 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밝은 표정의 임연객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나와 가까워지자마자 외쳤다.

“연우야. 정말 잘 됐다. 정윤 전하께서 우리와 함께 개경까지 가주신대.”

그리고 그런 임연객의 뒤로 정윤 왕무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마터면 등에 지고 있는 짐을 떨어뜨릴 뻔했다.

* * *

“전하께서 폐하의 명을 받아서 북방을 위무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변경의 성을 더 살피지 않고 서경까지만 둘러보시고 귀경하시면 혹여 문책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왕무를 걱정해 주는 척 말했다. 물론 속내는 왕무와 하는 여행이 너무 불편해서 하는 말이었다.

‘왕무와는 당연히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임연객에게 따로 말을 안 한 건데. 어쩌다가 일이.’

내 말을 듣고 왕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대 도움이 컸다. 거중기를 여러 대 만들어서 북방의 여러 축성 현장에 보내는 것으로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어. 내가 굳이 직접 축성 현장을 둘러보는 게 이제는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 내가 만나고 가려고 했던 염상, 유금필 두 분 장군이 직접 서경에 오시기도 했고.”

“아, 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굽신거리며 왕무에게 대답했다.

“그럼 출발하지.”

왕무는 그렇게 말하며 서경을 나서기 시작했다. 서경에 올 때처럼 왕무 일행에 끼게 된 나와 임연객도 열심히 말을 몰아 따라갔다.

다만 그런 왕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지난번에 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지키고 있던 창고에 나를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왕무의 행동이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나와 은근히 엮이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 내 착각일까? 아니면 임연객이 엄살을 부려서 같이 가주는 걸까? 설마 왕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말 위에서도 몸을 좀 문질렀다.

“왜? 그렇게 추워? 겨울이긴 하지만.”

곁에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임연객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나는 전생한 사람이라 지금 내 용모를 조금의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내 외모는 전반적으로 평범한데 잘 보면 약간의 매력이 있는 정도. 김선우였을 때 내가 반할 정도의 외모이긴 하지. 그런데 완전 연예인급인 왕무와는 차이가 커.’

왕무의 외모야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잘생겼다.

‘그런데 왕무가 나에게 묘하게 호감이 있는듯하기도 하고. 아니 신례 때 비밀통로에서 만나기도 했고 여러 일을 함께 처리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 그런 건가? 혹은 아버지인 왕건 말을 잘 들어서 혼사를 치르겠다는 의무감?’

내 고뇌는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혼사를 피하려고 애를 쓰는데 왕무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왕무도 나보다 더 강력한 호족 가문과 혼사를 맺으면 기뻐할까? 아니 무엇보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남자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 생각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 이봐. 내 누이가 어디가 아픈 것 같은데. 내가 누이를 살펴보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고 있어.”

그런 나를 살피던 임연객이 곁의 군졸에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행렬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냥 가자.”

나는 이럴 때만 과잉충성하는 임연객에게 손을 저으며 계속 말을 몰았다.

“오늘 정말 이상해 보이는데?”

임연객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나는 정직하게 말해 주었다. 진짜 생각을 너무 하니 괴로워졌다.

‘남자인 내가 같은 남자인 왕무의 심리를 읽지 못하는 건 역시나 내가 평범한 남자였기 때문이겠지. 진짜 왕무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잘생긴 남자였어야 그 심리를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도무지 그걸 알 길이 없으니 갑갑해진 나는 턱을 긁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니? 내가 도와줄까?”

곁에서 임연객이 물었다. 나는 유심히 임연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야. 됐어.”

그러면서 나는 내심 생각했다.

‘임연객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선우만큼이나 모를 거고. 한동안 나 혼자 고민해 봐야지. 설마 왕무가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거면 실로 큰일인데.’

내 속내는 복잡했지만 몸은 확실히 편했다. 왕무가 거느린 50기의 병력들이 대소사를 다 처리해 주었다.

나와 임연객은 식사시간이 되면 편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군졸들이 해주는 밥만 먹으면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군졸들이 야영준비까지 다 해줬다.

다만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자 왕무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취사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서경을 떠날 때 서경유수가 나에게 인근의 산나물을 캐온 것을 선물했다. 산나물 같은 것들은 쉬이 상하니 빨리 먹는 것이 좋겠다. 저녁에 조리해서 군사들에게 배급하도록 하라.”

그 명에 따라 저녁에는 산나물과 사냥해서 잡은 사슴 고기가 함께 배급되었다. 나는 임연객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했다.

왕무는 멀리서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군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설마 왕무가 나를 좋아할지 모른다고 의식을 하자마자 왕무가 또 나한테 말을 많이 안 거네. 임연객과 대화를 하면서 나에게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오늘 하루 종일 나 혼자 뻘짓을 한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식사를 마쳤다. 내가 뻘짓을 한 거라면 잘된 일이었다.

* * *

그리고 더 이상은 별사건 없이 나와 임연객은 왕무 일행에 껴서 그대로 개경에 당도했다.

“그럼 이만.”

왕무는 개경에 도착하자마자 작별 인사를 하며 군사들을 이끌고 자기가 갈 데로 가버렸다. 나와 임연객은 우선 한림원에 가서 미리 작성한 보고서를 바쳤다.

“이제 우리도 집에 가자. 폐하께서 보고서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시든지 아니면 그냥 문서로 답을 하시든지 하겠지. 에구 힘들어.”

임연객도 개경에 도착하자 피로가 몰려오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터덜터덜 상산저로 향했다.

“도련님,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우리가 상산저의 대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반가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집안이 시끄러워지더니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얘들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기껏 개경까지 올라왔는데 너희들의 얼굴을 못 봐서 아쉬웠는데. 호호.”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임연객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어머니!”

상산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상산부인이었다. 나와 임연객이 서경으로 간 사이에 무슨 일인지 상산부인도 개경으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임희가 약간은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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