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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38화 (3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8화

38. 전달

염상과 유금필을 환영하는 연회는 일찍 끝났다.

“먼 길을 달려와서 잠이 쏟아집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허허.”

염상이 말했다. 확실히 서경에 도착한 직후 바로 연회에 참석해서 지치긴 했을 것이다.

다른 관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니 그대로 연회는 끝났다.

‘그나마 짧게 끝나서 좋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유수부 안에 마련된 내 처소로 돌아갔다. 임연객도 내 옆 건물에 처소가 있었기에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임연객은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하루 종일 임연객이 하는 행동을 보고 쪽팔리긴 했는데 역시 그러는 게 맞는 거겠지.’

임연객에게는 자기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가가는 저돌성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현대에 있을 때 취업을 제대로 못 한 것도 저런 면이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임연객을 바라보았다.

‘거기다가 저런 임연객에게 당근을 던져주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할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내 뇌리에는 유금필이 연회장에서 한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유금필이 뭔가 말갈족들과 관련해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에 관해서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단 말이야. 뭔가 떠오르면 임연객이 한번 활약을 할 수 있게 해줄까?’

그런 구상이 내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밤이 늦었다. 거기에 유금필과 인연을 맺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이에 관해 생각을 해보고 임연객에게 말을 해주기로 했다.

“그럼 잘 자.”

그래서 나는 그냥 작별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임연객은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자신의 처소로 가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오전이 되자 임연객이 내 처소로 찾아왔다.

“이제는 그냥 개경으로 가야겠다.”

임연객은 약간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유금필 장군이나 염상 장군과 친분을 쌓는다며?”

내가 묻자 임연객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생각이라 수없이 찾아가고 있어. 뭐 어제 수준으로 눈도장을 찍어놓은 것도 나름 성과지. 이제는 연우 네 소원대로 개경으로 가자. 그러고 보니 앗!”

임연객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나도 가슴이 순간 내려앉았다.

“날짜를 보니 우리가 서경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개경에서 열리는 연등회를 놓쳤어. 우리가 서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때 개경에서는 연등회가 끝났을 거야. 연우 너는 평생 한 번도 못 봤지? 그게 진짜 볼만 한데.”

임연객이 너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등회는 고려 조정이 1년에 한 번씩 여는 축제 중 하나였다.

“아니 뭐 그거 가지고. 그거야 내년에 보면 되는 거고. 그래서 어쨌든 유금필 장군 눈에 드는 건 이제 관심이 없어?”

나는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아니 내가 이미 말했잖아. 더 손 쓸 수가 없다고. 근데 너는 내가 이미 말했던 걸 왜 또 물어봐? 어! 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지? 그렇지?”

이런 쪽에는 눈치가 빠른 임연객이 재빨리 반응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내 말을 듣자마자 임연객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근래 연우 네 학문이 엄청 늘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안 믿었거든. 근데 이번에 서경에 같이 여행하면서 나도 그걸 느꼈어. 무슨 곤경에 처하면 귀신같이 빠져나갈 방법을 만들어내니. 거중기도 그렇고 닭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하고.”

“엣헴, 그런데 내 학문이 높다고 생각하는 오라버니가 이번에 여행하면서 내 말을 잘 안 들었단 말이야. 마을에서 좀 기다려보자고 할 때는 빨리 가자고 떼를 쓰고 말이야. 응? 안 그랬어?”

내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아예 이 기회에 임연객이 좀 안 투덜거리고 내 말을 듣게 만들면 좀 좋아.’

그런 생각에 내가 애매하게 말하는데 임연객은 아양을 떨 듯이 말했다.

“그거야 내가 네 실력을 실감하지 못해서 그랬고. 지금이야 다르지. 그래서 유금필 장군과 관련해서 뭔가 계획이 있지? 그렇지?”

“어제 연회에서 유금필 장군이 말갈족들과 말이 안 통한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듣고 뭔가가 떠오르기는 했어. 왜 그리 한탄하시는 걸까?”

내가 물었다.

“그야 지금 유금필 장군이 여러 말갈 부족들을 휘하에 모아 조직하는데 이 사람들이 조직 생활을 안 해본 사람들이야. 행정처리를 하려면 문서작업이 필요한데 말갈족들이 이 문서의 의미를 잘 모르지. 거기에 뭔가 일을 하려고 작전회의 하나를 해도 이해를 시키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거야. 애초에 힘들 수밖에 없어.”

병부에서 일해서 관련된 사정을 잘 아는 임연객이 말했다.

“그에 관해서 유금필 장군께 약간이라도 도움을 드리면 오라버니가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그야 당연하지. 그에 관해서 계책이 있는 거야?”

임연객은 내 말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며 물었다.

“그게 좀 애매하긴 한데. 사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잘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 유금필 장군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직면한 건지 좀 알아 와 봐. 그걸 보면 내 방책이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우 네 계책이야 무조건 통하지. 알았어. 내가 유금필 장군을 따라온 종군문관에게 물어볼게.”

임연객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생각했다.

‘유금필과 우리 상산 임씨가 인연을 만들고 친해지는 게 나에게도 매우 유리하다. 무엇보다 임연객이 안 투덜거리고 내 말을 따르는 건 진짜 처음 본다. 흐흐흐’

애초에 내가 정윤 왕무와의 혼사를 피하기 위해 세운 큰 전략이 상산 임씨의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힘이 커진 상산 임씨와 정윤이 결합될 경우 왕위계승경쟁에서 불리해지는 충주나 황주 쪽 사람들이 오히려 혼사를 훼방 놓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내 미래 지식을 이용해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 쪽과도 인연을 만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려 제일 무장인 유금필 쪽과도 이어지는 게 좋지. 어제 임연객이 열심히 들이대는 것을 응원해 줄 걸 그랬어.’

유금필은 뛰어난 무장일 뿐만 아니라 왕건의 장인이기도 했다. 즉 유긍달, 황보제공처럼 유금필 역시 자신의 딸을 왕건의 부인으로 보냈다.

그러나 유금필은 자기 외손자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금필은 워낙 뛰어난 무장이라 그렇게 설쳤다가는 엄청난 견제와 모함을 받았을 거야. 거기에 유금필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거지 개인 세력이 큰 것은 아니어서 뭘 해볼 수도 없고.’

유금필은 그래서 중앙의 정치 싸움에는 안 끼고 오직 군사 문제에만 몰두하는 성향이었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은근한 다툼에서도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유금필과 간접적인 인연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큰 힘이 된다. 이번에 유금필과 상산 임씨가 연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충주나 황주에서 기겁을 하며 혼사를 막아주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자세한 사정을 알아본다고 나간 임연객은 웬 서류뭉치를 껴안고 내 처소로 돌아왔다.

“알아냈다. 요새 정말 유금필 장군이 힘들긴 하나 봐. 유금필 장군의 용맹으로 말갈족들의 협조를 얻어내긴 했는데 이 복잡한 족속들을 효율적인 부대로 편성시키기 어렵나 봐. 고려에 협조하는 말갈족장들이 모여도 간단한 사실을 전하는 회의만 해도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고. 이건 그에 관련된 서류들이야. 사실 엄청난 기밀은 아니라서 내가 잠시 가져왔어.”

임연객은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상관에게 보고를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알았어. 한번 줘 봐.”

나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임연객이 건넨 서류를 받아 들고 천천히 살폈다.

“그런데 이런 행정에 익숙하지 않은 말갈족장들을 단박에 이해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긴 있을까?”

임연객은 머리를 긁적이며 좀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나는 종이 한 장을 펼치며 붓을 들며 말했다.

“이 서류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그러니 지금 유금필 장군 휘하의 말갈 기병이 4500명 정도야. 이들 중 흑수 출신이 2016명, 달고 출신이 1303명, 철륵 출신이 1181명이지.”

그러면서 나는 종이에 원그래프를 그려서 유금필 휘하의 말갈기병들의 비율을 표시했다. 그릇을 하나 대고 반듯하게 원을 그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염료로 흑수, 달고, 철륵의 색을 다르게 칠했다.

‘이거 하다 보니 대학교 학부 시절에 발표 준비하던 때가 생각나네. 그때 이런 그래프 많이 만들었는데. 대학원 와서 논문 쓸 때도 그래프며 표를 많이 만들었지.’

아주 복잡한 역사기록도 표나 그래프로 하나 만들어두면 얼마나 보기 편했던가?

내가 말갈족들과의 행정적 의사소통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유금필을 위해 해결책으로 내놓으려는 것이 바로 이 그래프였다.

‘이런 그래프 같은 것이 별것 아니긴 하지만 이 고대에는 없었어. 서구에서도 19세기에 활약한 나이팅게일이 이런 그래프를 적극 활용해서 보고서를 올려서 명성을 날렸을 정도니. 10세기인 지금은 진짜 혁신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른 종이를 꺼내서 이번에는 막대 그래프를 그려 나갔다.

여러 말갈 부족들은 고려에 완전히 복속된 것은 아니었다. 유금필의 용맹뿐만 아니라 고려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아서 일종의 용병으로 활약하는 면도 있었다.

나는 먼저 미리 준비해 둔 자를 대고 검은 막대그래프로 각 말갈 부족들이 동원하는 기병의 수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 옆에 흰 그래프로 그들이 받을 곡식의 양을 표시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10여 장의 종이에 그래프와 표를 그렸다.

‘컴퓨터로 하면 금방 하는데 손으로 하려니 힘들어 죽겠네.’

그러나 대학원에 다닐 때 이런 걸 하도 많이 해본 나는 그럭저럭 속도를 내서 일을 해치웠다. 10여 장의 종이에 나는 그래프며 표를 그려 넣었다.

임연객이 가져온 두꺼운 서류뭉치에 담긴 정보 중 핵심 정보는 이 10여 장의 그래프와 표에 다 요약됐다.

말갈족들이 볼 수 있도록 종이에 크고 시원시원하게 그래프를 그렸다.

“어,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하는 일을 곁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임연객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서류뭉치와 내가 그린 그래프를 연신 번갈아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말갈족장들도 이런 행정 작업에 익숙하지 않을 뿐 머리 자체는 좋은 사람들이니 이런 그림으로 표현하면 말귀를 좀 알아듣겠지?”

그래프를 다 그린 나는 붓을 내려놓으며 임연객에게 말했다.

“알아듣다마다. 삼척동자도 보면 이해를 하겠구만. 이, 이건 단순히 말갈족들에게 쓰고 말 게 아니야. 개경에 돌아가서 병부도 이런 방식으로 보고를 하면 이해하는데 시간이 확 줄어들 거야. 아니 조정 전체가 이 방법을 써도 될 듯한데. 연우 너는 어디서 이런 걸 고안해 냈니?”

임연객이 멍한 표정으로 그래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왜 간단하잖아. 그냥 원을 그리고 막대기 모양만 그린 것뿐인데.”

나는 짐짓 별것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야.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연우 너야 한림원 직원이라고는 해도 본격적으로 일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

나름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내가 보여준 그래프의 가치를 깨달은 임연객은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자 그럼 그걸 가지고 유금필 장군을 한번 만나 봐. 눈도장을 확실히 찍겠지?”

“눈도장뿐이겠어? 지금 당장 면담을 신청해야겠다. 그럼 난 간다.”

임연객은 서류뭉치며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챙겨서 후다닥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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