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5화
35. 서경
“그러니 거중기의 이 부분을 이리 바꿔도 작동을 할까?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정윤 왕무가 말 위에서 도면의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그린 도면을 보고 도르래를 여러 개 조합하면 힘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무는 거중기를 조금씩 고치고 있었다.
군사일을 경험해 봐서 축성에 대해 잘 아는 왕무가 성을 쌓는데 더 적합하게 개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 곁에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중기를 만들고 또 북방의 여러 곳에 전파하는 일을 같이하다 보니 어설프게 친해져서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군대에 가도 처음에 자대 배치받고 난 후에는 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티나 하고 막막하다. 서로 어색한 사이일 때는 말을 안 하는 게 편하다.
그런데 서로 고생을 같이하고 또 힘든 업무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말을 트게 된다.
‘그러면 둘이 있는데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정말 어색하고 불편해. 대화를 꼭 해야 하는 사이가 되지.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별것 아닌 내 과학상식으로 만들어낸 거중기를 주변 사람들이 치켜세워주고 또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신이 나버렸다.
그래서 거중기를 북방의 축성현장에 몇 대씩 보내려는 정윤 왕무를 도와 이런저런 일을 함께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나와 왕무는 계속 대화를 나눠야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된 것이다.
‘정말 이게 내 단점이야. 주변에서 감탄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서 행동하는 점이. 최승우 때도 그랬고.’
왕무와 말을 트게 된 것도 혼사를 피해야만 하는 내 처지에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어찌 상황에 휘둘리다 보니 이리됐다.
어떻게든 왕무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임연객의 모습이 보였다.
“앗, 정윤 전하! 저기서 오라버니가 저를 부릅니다. 잠시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살짝 왕무에게 고개를 숙인 나는 임연객 쪽으로 말을 몰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보고 임연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네가 왜 여기와? 너가 여기 있으면 정윤 전하가 뭘 물어보려고 이쪽으로 오실 수 있고 덩달아 나까지 휘말리게 되잖아. 넌 저기로 가.”
그러나 나는 임연객의 말을 무시하고 그 옆에서 말을 몰며 말했다.
“같이 좀 살자.”
“쳇.”
임연객이 혀를 차는데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서경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나와 임연객은 닭 문제를 해결하라는 왕건의 명을 받고 서경에 가는 것이다.
‘즉 서경에 도착하면 왕무와 떨어질 수 있다는 거지.’
“별로 안 남았어.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아마 서경이 나올 거야. 뭐 그래도 연우 네가 거중기를 고안한 덕에 마음 편하게 서경에서 좀 쉬다가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긴 했어. 그 암탉인지 수탉인지 하는 문제는 애초에 해결이 안 되는 문제였어. 그냥 백성들이 워낙 삶이 고단하니 그런 말이 나온 거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거중기를 개발했다고 보고서를 올리면 깔끔하지. 으하하하. 그래. 그 공을 봐서 선심 썼다. 내 옆에 있어도 돼.”
임연객이 무슨 엄청난 특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해서 나는 아니꼬워졌다. 그래도 나로서는 한숨 돌리긴 했다.
행렬 앞쪽에서 도면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린 왕무는 굳이 임연객과 대화를 나누는 내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임연객의 말대로 다음 날 일행은 서경에 당도했다.
* * *
“이게 서경!”
나는 서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예전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이곳이었다.
‘너무 허접한데.’
중요한 곳은 돌로 보루를 쌓았지만 중간중간 성을 다 못 쌓아서 목책을 쳐놓은 곳도 많았다. 사람들은 꽤 많았고 시장도 보였지만 행색들이 초라했다.
무슨 개척민 마을 수준이었다.
‘하긴 고구려가 망한 뒤 평양은 250년 넘게 방치됐으니. 신라의 중심지는 남쪽이라 굳이 평양을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나도 머릿속 지식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초라한 평양의 모습을 눈으로 보니 놀랍긴 했다. 그러나 내 곁에서 임연객은 오히려 감탄하고 있었다.
“10년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는데 그사이에 이 정도로 도시가 살아나다니. 과연 서경유수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군.”
임연객의 그 말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서경유수는 왕건의 사촌동생 왕식렴이다. 왕건의 친척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긴 하지.’
아무것도 없는 평양을 재건한 것은 확실히 역사에 남을만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수십 년간 주둔하며 만든 막강한 세력을 바탕으로 충주의 유긍달과 힘을 합쳐서 고려 정종을 지원했다. 즉 정윤 왕무와는 정적이란 것. 실제 역사에서도 왕무가 왕이 됐을 때 지원도 안 하고 오히려 흔들었고.’
그런 생각을 하며 서경을 둘러보니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역시나 왕무는 막강한 적이 많아. 정말 어떻게 해서든 왕무와의 혼사는 피해야 해.’
새삼 그런 다짐을 하는 사이 일행은 서경 관아에 들어섰다.
* * *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서경유수 왕식렴은 정윤 왕무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나중에 왕식렴이 정윤 왕무의 반대파가 되는 것은 왕건이 죽고 난 이후 훗날의 일이었다.
당연히 지금은 그런 티를 안 내고 정윤을 존중하고 있었다.
“왕 유수,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서경의 군민을 위무하기 위해 이리 왔습니다.”
왕무 역시 의젓하게 왕식렴을 응대했다.
나는 처음 왕식렴을 봤을 때 무슨 고려와 연관 있는 말갈족 족장이 나온 줄 알았다.
왕식렴은 추위를 많이 타는지 두꺼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수염도 덥수룩해서 순간 착각했다.
“요 근래 강풍이 불어서 군사와 백성들이 추위에 시달리고 입술이 터지고 손발이 부르트는 사람도 많습니다. 밤이면 특히 더 심합니다. 정윤 전하께서도 몸을 따뜻하게 하십시오.”
왕식렴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와 임연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임연객은 어쨌든 왕건의 특명을 받고 온 사람들이라 왕식렴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상당 기간 동안 병부에서 관료 생활을 해서인지 눈치가 빠른 임연객은 왕식렴이 입을 열기도 전에 품속에서 공문을 꺼내 바치며 말했다.
“서경 유수께서 서경과 북방 여러 고을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생겼다고 올린 상소문을 보시고 폐하께서 우리들을 이곳까지 보내셨습니다.”
공문을 받아들며 왕식렴이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고? 아, 내가 그런 상소를 보냈던가?”
‘우와 이 시대 높은 사람들은 왜 이리 잘 까먹어?’
그런 왕식렴의 모습에서 나한테 일을 안 시킨다고 해놓고 자기가 그런 말을 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최언위가 떠올랐다.
그사이 공문을 꼼꼼하게 살핀 왕식렴은 서경의 관리를 불러 자신이 올린 상소문의 사본을 또 봤다. 그리고 곁에서 서경의 관리도 말했다.
“실제로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이 됐다고 백성들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내가 그리 썼군. 허허. 이거 참. 폐하께서 이걸 보고 또 며칠 잠을 못 이루셨겠어. 나 때문에 임 낭중이 해결이 안 될 임무를 떠맡게 됐군. 그래 누이도 함께 오셨고.”
왕식렴이 약간은 미안한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해 볼 작정입니다.”
임연객이 왕식렴 앞에서는 진중한 척하며 말했다. 서경까지 오기 싫어서 나를 원망했던 임연객의 모습을 아는 나로서는 참 가소로웠다.
“백성들에게 위로의 의미로 식량과 면포를 좀 건네면 다 좋게 해결될 것이오. 내가 식량과 면포를 좀 내드리지. 그래도 폐하의 명이 떨어졌으니 살펴는 봐야 할 일이고. 한번 둘러보고 다시 오시오. 내 폐하께 올릴 좋은 상소문도 내드릴 테니. 문제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적어주겠소.”
왕식렴은 그렇게 말하며 관리 하나를 불러 우리들을 안내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정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윤 왕무와 의논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와 임연객은 가볍게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 * *
그리고 나와 임연객은 즉시 안내하는 관리의 뒤를 따라서 닭 사건이 일어난 마을로 향했다.
“길게 끌 것도 없이 바로 사건이 터진 마을만 둘러보고 돌아가자. 그래도 서경유수는 도리도 아시고 일처리도 시원시원하셔서 다행이야. 여기까지 온 우리들을 위해서 상소도 써주신다니. 그걸 가지고 돌아가면 책임도 다 피하겠지. 잘 됐다. 거중기를 고안한 공도 있고.”
임연객은 웃으면서 나한테 말했다.
“그건 그래.”
잔뜩 긴장하고 왔던 서경행이 간단히 끝나는 것 같아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마을에 이르러 우리를 안내하는 관리가 어느 집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집에서 겁먹은 기색의 농부 하나가 나와서 굽신거렸다. 갑자기 관리들이 몰려오니 놀랄 만도 했다.
“자네 집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고 하지 않았나? 개경의 폐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직접 사람을 보내서 그 사건을 살피라고 하셨어.”
관리가 그리 말하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우리들이 있는 집으로 속속 몰려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구경하러 온 것이다.
“아이고 뭐 그런 일로 이 먼 곳까지. 원래 그 닭을 잡아서 먹을까 고민했었는데 이리 오시다니. 안으로 드십시오. 마당에 그 닭이 있습니다.”
나와 임연객은 마당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아 있는 닭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힘이 없어 보이는 닭이었다.
유심히 그 닭을 살피던 임연객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암탉인데?”
그리고 임연객은 농부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예, 원래 암탉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풍이 불고 난리가 났을 때 수탉이 됐는지 알을 안 낳기 시작했습니다.”
“음.”
임연객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내 거중기를 못 믿었던 것도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랬나?’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주변에서 구경하러 온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 말이 맞습니다. 어느 날부터 암탉들이 알을 안 낳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뿐만 아니라 마을의 여러 집이 겪은 사실이죠. 대표로 이 집에서 관아가 가서 아뢴 것입니다. 겉만 암탉이지 수탉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임연객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폐하께서 그대들에게 식량과 면포를 내리신다고 했다. 뭐 그걸로 다른 닭을 한 마리 사면 해결될 일이고. 폐하의 은혜에는 감사하겠지?”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임연객이 그리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자 농부와 마을 사람들은 기쁜 기색으로 절을 하며 식량을 받을 채비를 했다. 그때 내가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식량을 나눠주는 것은 나눠주는 거고. 이 닭을 가지고 뭔가 실험을 하나 해보고 싶은데. 뭔가 감이 잡혔어.”
그러면서 나는 축 늘어져 있는 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이상한 일들도 과거 사람들이 거짓말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이론이 있지. 이번에도 수탉으로 변했다는 게 알을 못 낳아서 그런 거라면 내가 짚이는 게 있다.’
이즈음 해서 서경에는 강풍이 불었고 기온이 떨어졌다. 닭도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닭들도 요 며칠간은 사람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닭들이 햇볕을 많이 받아야 알을 잘 낳는다고 들었어. 양계장 주인들이 그래서 전구를 켜놓기도 하잖아.’
그래서 나는 닭들을 좀 모아서 따뜻한 환경에 두고 횃불도 비춰주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학석사 모드가 발동된 나는 내 이론을 검증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