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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34화 (3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4화

34. 지식

한동안 성을 쌓는 공사장에서 머물기로 한 정윤 왕무의 결정에 따라 나 역시 공사장에 있게 됐다.

그리고 나는 내 처소에 있는 서탁 앞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우, 너는 정말 눈치를 안 보는구나?”

그사이 내 처소에 슬쩍 들어온 임연객이 문득 그리 말했다. 임연객의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왕무는 직접 군졸들과 함께 공사판에서 뛰고 있었다. 임연객도 그 사이에 껴서 일을 하다 온 모양이다.

“뭔 소리야?”

내가 날카롭게 묻자 임연객은 약간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뭐 정윤 전하마저 돌을 지고 나르는데 너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

“내가 그 공사판에 껴서 돌을 날라봤자 얼마나 나르겠어?”

내 말을 듣고 임연객도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건 네 말이 맞긴 맞아. 한 50명쯤 되는 군졸들이 며칠 도와줘도 한계가 있지. 뭐 정윤 전하의 힘이 세서 몇 사람 몫을 하긴 하더라. 그래도 의미가 없긴 하지. 이런 공사판이 한두 곳도 아니고.”

“오라버니는 그리 생각하면서 왜 고생을 하고 있어?”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정윤 전하가 나서시니 당연히 좀 돕긴 해야지.”

“그럼 내 처소에 왜 왔어?”

“좀 쉬려고. 에구구, 무거운 돌을 지고 날랐더니 너무 힘들다. 내 처소에 가 있으면 찾으러 올까 봐.”

임연객은 두 눈을 굴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휴, 좀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지. 내가 나름 생각해 둔 것들이 있으니 조금만 쉬고 대장장이를 찾아가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본적인 대책이라니?”

“이게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해 봤어.”

그러면서 나는 내가 나름대로 그려본 도면을 서탁 위에서 들어서 보여줬다.

조선시대에 정약용이 만들었던 거중기를 참고해서 내 나름대로 그린 도면이었다. 나는 사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망설이긴 했다.

‘왕건이 놀란 것에서 보듯이 짧은 기간 안에 내 미래지식을 너무 많이 드러냈어. 그래서 오히려 지금 처지에 몰린 건데. 이 거중기까지 내가 고안한 것처럼 되면 앞으로 더 곤란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그냥 모른 척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하필 힘겹게 무거운 돌이며 나무를 나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약간의 미래 지식을 이용해 거중기를 만들어낸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내 입장만 따져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왕건이 내린 수탉이 된 암탉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고. 뭔가 다른 성과를 내놔야 하는데 거중기를 성과로 내놓는 거지. 이런 기계로 백성들의 민심을 좀 달래보자고.’

나는 결국 거중기의 도면을 그리기로 결단을 내렸다.

“아니 이런 게 있어?”

임연객은 깜짝 놀라서 도면을 받아 유심히 살폈다.

“상당한 도움이 될 거야. 오라버니가 병부낭중이란 지위를 이용해 공사감독관에게 말해서 대장장이를 동원해 이대로 만들라고 부탁을 좀 해줘.”

나도 한림원 직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앙관서의 병부낭중이 나서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나는 그리 말했다.

군사용으로 짓는 성이라서 장수가 파견 나와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병부에서 일하는 임연객의 말이 반드시 통할 것이다.

“이건 그냥 도르래를 여러 개 사용하는 것뿐인데 무거운 돌을 들 수 있다고?”

임연객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여러 개의 도르래를 이용하는 게 핵심이야. 도면에 그린 것처럼 잘 조합하면 무거운 걸 들어 올릴 때도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아.”

현대에서는 중학교 때만 해도 배우는 과학상식이라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시대에도 물론 도르래 자체는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개를 조합하면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니? 도르래를 여러 개 쓴다고 그런 일이 생긴다고? 상산에서 해봤니?”

“……어 해봤어. 틀림없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안 해봤다고 하면 임연객이 내 말을 안 믿어줄 것 같았다.

임연객이 나를 못 믿는 건 내 잘못도 컸다.

‘원리를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하는데 주입식 과학공부만 익숙해져서.’

물론 예전에 과학선생님은 친절하게 원리에 대해서도 다 알려줬다.

그러나 나는 과학 시험을 볼 때 도르래가 이 모양으로 조합되면 힘을 조금 써도 된다는 식으로 외워서 시험을 봤다.

그리고 사학도로서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의 도면도 본 적이 있어서 그럭저럭 도면은 그렸는데 원리 설명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진짜? 상산에서? 그러면 아버님이 이 기계를 반드시 이용해서 상산의 성들도 지으셨을 텐데. 내가 왜 못 들었지?”

임연객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계속 머뭇거렸다.

“제발 나를 좀 믿고 같이 공사감독관에게 가서 부탁을 하자고.”

나는 그런 임연객의 두 어깨를 떠밀며 밖으로 나섰다. 나에게 억지로 밀려서 공사 감독관이 있는 쪽으로 가면서도 임연객은 연신 투덜거렸다.

“지금 여기 공사판은 엄청 바빠. 대장장이들이며 목수들도 각자 맡은 일이 있어서 시간이 안 날걸?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이런 걸 만들어 달라고 하자고? 거기다가 병부낭중은 그리 높은 관직이 아니라고. 참 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가 민망한데.”

내가 그린 도면을 안 믿는 임연객은 이걸 진짜 만들었다가 망신을 당할 거라 생각하는지 발을 빼려고 했다.

“내 말 믿어. 여기 사람들이 이리 힘든데 이걸 만들면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내 말을 안 믿는 임연객에게 내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임연객을 억지로 끌고 갔다.

그래서 겨우 공사감독관의 처소 앞까지 왔을 때였다.

“그래. 내가 내 패를 줄 테니까 너가 그 패를 들고 공사 감독관에게 부탁을 해. 내 이름을 빌려도 되고. 나는 변소가 급해서.”

임연객은 끝까지 이렇게 나왔다.

“아 좀.”

나와 임연객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무와 그 곁에 있는 공사감독관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나와 임연객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아니 병부낭중. 갑자기 함께 일을 하다가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가 했는데 여기 있었군. 그런데 왜 자리를 비운 것인가?”

왕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험험, 정윤 전하. 제 누이가 갑자기 이 도면을 좀 봐달라고 전갈을 보내서 일을 하다가 누이에게 온 것입니다. 누이가 나름 머리를 써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나 봅니다. 뭐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그럴듯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임연객이 눈을 굴리더니 천연덕스럽게 그리 말했다.

“정말인가? 그게 가능하다고?”

왕무는 반색을 하며 임연객이 들고 있던 도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왕무는 유심히 도면을 바라보다가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가 이걸 고안한 것이 맞는가?”

이번 여행에서 만난 뒤 처음으로 왕무가 나에게 질문을 한 것 같았다.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좋아. 이 도면대로 한번 만들어보지. 감독관. 동원가능한 대장장이들과 목수들을 부르게.”

정윤 왕무가 시원스럽게 그런 명을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공사감독관은 진짜 군말 없이 왕무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다른 일을 하다 말고 대장장이와 목수들이 속속 달려 나왔다.

‘정윤 자리가 좋긴 좋네.’

내가 일이 처리되는 속도에 놀랄 때 임연객이 옆에서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효과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망신을 당할까?”

임연객이 그리 입방정을 떠는 사이 왕무가 건넨 도면을 받아든 대장장이 하나가 말했다.

“도르래는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라 미리 만들어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것들을 목재틀에 붙이면 되니 이 기구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속히 시행하라.”

왕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목수들과 대장장이들이 협력해서 내가 그린 거중기를 그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전문가들이 힘을 합치니 순식간에 뭔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지금 고려가 쌓는 성은 아주 거대하고 높은 성은 아니었다.

작은 성을 수축하는 거라 아주 큰 거중기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2시진쯤 지나자 미리 만들어둔 도르래를 활용한 거중기가 완성되었다.

“자 그럼 한번 실험을 해봐야 하는데.”

왕무가 그리 중얼거리자 내가 한 발자국 나섰다.

“제가 이 거중기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보이겠습니다.”

지금 성을 쌓는데 동원된 노약자들을 위해 고안한 거중기는 힘이 약한 내가 실험을 해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고 왕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서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것을 거중기 아래에 내려놓았다.

“보통 장정들은 혼자 못들 무게의 바위다.”

내가 슬쩍 그 바위 곁에 다가가 밀어보니 미동도 안 했다.

‘전생의 김선우일 때도 이 바위를 못 움직일 거 같다. 확실히 힘은 엄청 세네. 부러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를 향해 말했다.

“우선 이 바위를 밧줄로 동여매야 합니다. 바위와 땅 사이에 틈이 좀 생기게 바위를 약간만 들어주시면 그 사이로 밧줄을 넣겠습니다.”

왕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위를 약간 들어 올렸다. 나는 거중기에 연결된 밧줄을 그 아래로 밀어넣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본의가 아니게 왕무와 약간 가까이 붙게 되었다. 왕무의 땀냄새가 어느 순간 확 느껴졌다.

‘진짜 일을 열심히 했나 보네. 성실하긴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밧줄로 바위를 꽉 묶었다. 그리고 거중기 쪽으로 달려가 그쪽의 밧줄을 쥐고 외쳤다.

“이제 당기겠습니다.”

왕무가 바위 옆에서 살짝 물러섰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힘껏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바위 무게가 무거워서 그런지 팔이 아플 정도로 힘을 쓰긴 해야 했다. 그래도 그 무거운 바위를 내 힘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바위는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오오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 임연객도 입을 쩍 벌린 것을 보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삐걱삐걱.

그러나 확실히 2시진 만에 급조한 거중기라서 그런지 어느 정도 끌어올리자 목재틀에 달아놓은 도르래가 약간 흔들리는 것이 느꼈다.

나는 천천히 바위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공사감독관을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더 단단하게 도르래를 고정시켜야 안전할 것 같습니다. 감독관님. 이 거중기가 공사에 도움이 되겠지요?”

“아! 물론입니다. 성을 쌓는 자재들을 높이 올리는 게 힘들고 사고도 나서 근심이 많았는데 아가씨 힘으로도 이만한 돌을 올릴 수 있다니. 엄청난 도움입니다. 빨리 공사를 마치고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독관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양손을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다름 아닌 왕무였다. 거중기 실험 결과를 보고 기쁜 기색으로 달려온 왕무는 내 양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진짜 이게 통했어. 정말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여기서 며칠 도와도 큰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아서 근심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왕무는 감격에 겨워했다.

‘이거 힘이 세서 내 손을 뺄 수도 없고. 젠장 뭔가 다른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뛸 듯이 기뻐서 이러는 것 같으니 조금만 참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바로 앞에 있는 왕무의 얼굴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공사감독관에게 뭐라고 말하는 임연객의 모습이 보였다.

‘쳇 내 말을 안 믿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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