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3화
33. 북방
집에서 내 형 아니 오라버니인 임연객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연우야. 진짜 그런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맡지 말았어야지. 아, 연우 네 덕에 나마저도 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일을 떠맡게 됐구나.”
왕건의 명에 따라 갑자기 수탉이 된 암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와 떠나야 하는 임연객은 서글픈 표정이었다.
“어허. 너도 그만하거라.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 빠져나갈 수 있었겠느냐? 너는 정신을 차리고 누이를 잘 호위해서 서경에 다녀오거라.”
곁에 있던 임희가 나 대신 나서서 그리 말하며 임연객을 달랬다. 졸지에 슬하의 자녀들을 모두 서경에 보내게 돼서 임희도 직접 나와서 일을 살피고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폐하께서도 이 문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셔. 해결을 못 해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조사를 해보라고 하셨어.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은근히 나를 원망하는 임연객에게 말했다.
“어허. 최선만 다하면 된다는 폐하의 말을 설마 믿는 거니?”
임연객이 나에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셨어.”
“나도 병부에서 일하며 출전하는 장수들에게 항상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진지하게 말해줘. 마음 편해지게. 그러고 나서 만약 장수들이 지고 돌아오면 왜 진 건지 엄격하게 감찰해서 책임을 물어.”
임연객이 나에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예 실마리도 안 잡히는 일인데? 폐하께서도 설마 그러시겠어?”
나는 그런 말을 하며 아버지 임희 쪽을 바라보았다.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서였다. 그런데 임희는 약간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연우 너를 서경으로 보내셨으니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한다. 그냥 최선을 다했다고 하고 돌아오면 큰일 난다.”
“…….”
임희마저 그리 말하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생각해 보니 임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최언위만 해도 나에게 직원이 돼도 별다른 일이 없을 거라고 해놓고 일을 시키지 않았는가?
‘젠장 사회 생활을 고려 시대 와서 처음 하다 보니.’
나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아무리 미래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이런 사회생활의 노하우가 없으니 이런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거 봐. 내 말이 맞잖아. 이번 일에 아무 성과를 못 내고 돌아오면 병부에서 여태 승승장구하던 내 경력에 흠이 생기는데.”
곁에서 임연객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르짖었다.
“걱정 마. 내가 무슨 수를 마련할 테니.”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대한민국 석사까지 딴 내가 이런 일 하나 수습 못할까 봐. 닭 문제는 손을 못 쓰더라도 뭔가 다른 쪽에서 성과를 하나 적당히 만들어 오면 되겠지.’
* * *
다음 날 나는 임연객, 그리고 이번 일을 위해서 왕건이 붙여준 군졸 2명과 길을 나섰다. 개경을 벗어나자 임연객도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표정도 진지했다.
“패서 지역은 안전하지만 장새를 넘어 그 북쪽은 말갈의 무리들도 돌아다니고 위험할 수 있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연우 너도 바람막이로 얼굴을 가려. 검도 하나 차고.”
임연객이 그리 말했다. 나는 군말 없이 임연객의 말대로 했다. 이 무렵은 난세라서 치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북방 지역은 황폐한 상태에서 말갈족들도 오락가락하고 하는 상태였는데 지금 한창 왕건이 군사를 보내 개척하는 지역이었다.
여행을 할 때 진짜 조심해야 했다. 임연객도 가벼운 갑옷을 입고 활이며 검으로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젠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왕건이 달랑 군사 2명을 붙여주다니.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임연객의 표정을 보니 나는 또 덜컥 겁이 나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너무 근심을 할 필요는 없어. 서경까지 역참을 군데군데 설치해놔서 공무를 보는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하면 되니까.”
또 내가 너무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임연객은 그런 말을 했다.
‘아니 뭘 어쩌란 거야?’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어쨌든 서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서경으로 여행을 하며 나는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군대에서 훈련받던 그때가 떠오른다.’
진짜 그 정도로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전생한 뒤 처음 상산을 떠나 여행을 했을 때는 100명에 달하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밥 먹는 거며 막사를 짓는 거며 많은 군졸들이 다 해줬는데.’
근데 이 여행은 나 포함 달랑 4명이 가는 거라 나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이 있는 곳을 찾고 장작을 줍고 불을 피워서 솥에다 밥을 지어 먹는 게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뿐만 아니라 잠도 역참에서 자면 괜찮았는데 한 번은 노숙을 해야 했다. 역참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생긴 일이었다.
“내가 개경에 돌아가면 북방의 도로에 있는 역참은 좀 더 조밀하게 짓자고 건의해야겠어.”
임연객이 일하는 병부에서 이런 역참을 관리했다. 임연객은 그래서 이런 말을 하며 노숙을 준비했다.
노숙을 할 때는 또 4명에서 불침번을 서야 해서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딱 3일 여행했는데 나는 상당히 지쳤다.
‘에구. 온 삭신이 쑤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곁에서 말을 몰고 있던 군졸 하나가 외쳤다.
“저 앞쪽에 상당한 수의 군사들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족히 50기는 됩니다.”
“흐음. 웬 군사들이. 저건 군기를 보니 개경의 군사들인데. 의심할 여지가 없어.”
임연객은 병부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깃발이며 군사들의 갑옷을 보더니 그리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면 오늘 하루는 좀 신세를 지면 어떻겠습니까?”
역시 적은 인원으로 하는 여행에 지친 군졸들이 임연객에게 말했다.
“좋아. 가까이 가서 어디로 향하는 군사들인지 물어보자. 우리 역시 공무로 여행을 가는 중이니 신세를 져도 되겠지.”
임연객 역시 반색을 하며 일행을 이끌고 앞쪽에서 나아가는 군사들의 행렬에 다가갔다. 그리고 품속에서 자신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문서를 꺼내 들고 외쳤다.
“나는 병부낭중 임연객이다. 공무를 위해 서경으로 가는데 그대들의 대장은 누구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임연객의 외침을 들은 군사들 사이에서 군관 하나가 달려 나와 임연객이 든 문서를 확인하더니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군사들 사이에서 갑옷을 걸친 장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장수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왕무잖아! 왜 또 여기에?’
* * *
“정말 정윤 전하를 도중에 만난 것이 천행입니다. 그동안 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그래서 정윤 전하께서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임연객은 싱글벙글 웃으며 정윤의 막사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의 사정을 들은 정윤 왕무가 군말 없이 우리를 받아들여 막사에 초대한 것이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서경과 인근에 성을 쌓는 장수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감독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오.”
왕무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것참 잘 됐습니다. 우리 역시 서경까지 가는데 정윤 전하의 뒤를 따라도 되겠습니까?”
임연객은 수다스럽게 물었다.
“병부낭중 역시 공무 때문에 길을 나선 것이니 우리 군사들과 함께해도 무방하오.”
나는 막사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왕건이 괜히 군졸을 2명만 붙여줘서 우리를 고생시킨 것이 아니군. 또 시간차로 이걸 노리고 나를 보낸 거야.’
어떻게든 왕무와 나를 엮으려는 왕건의 집념이 새삼 느껴졌다. 다만 왕무와의 혼사를 극력 피하고 있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같이 가기로 했다.
‘어휴. 4명이 여행하는 건 진짜 너무 힘들어. 많은 군사들과 함께 좀 움직여야 낫지.’
거기에 왕무는 처음에 나를 보고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를 하고 나서는 계속 임연객과 대화를 했다.
‘연객이가 수다스러운 편이라서 다행이야. 나는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으니.’
쿡.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임연객이 태연하게 왕무와 대화를 나누면서 소맷자락 아래로 나를 찌르는 것이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임연객이 계속 내 옆구리를 찌르든지 말든지 무시하고 있는데 왕무가 말했다.
“병부낭중과 일행들이 피곤한 듯하니 오늘은 한쪽 막사에서 쉬시오. 내일부터는 강행군을 할 테니 체력을 비축해 두시오.”
“예.”
나와 임연객은 그런 왕무의 말에 예를 갖추고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막사를 나오자마자 임연객이 말했다.
“연우. 너는 참 지독스럽다. 어떻게 정윤 전하가 앞에 계시는데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니? 곁에 있던 내가 다 민망하더라. 왜 내가 신호를 줘도 가만히 있었어?”
“병부낭중인 오라버니의 관직이 더 높으니까 대표로 정윤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야지. 일개 직원인 내가 뭘 끼어들어?”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데 임연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참 너와 같이 살 정윤 전하가 다 불쌍해진다.”
“흥.”
나는 코웃음을 치며 더 이상 임연객과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정윤 왕무와의 혼사를 피하기 위해 여러 일을 꾸미고 있었지만 아버지인 임희에게만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혼사를 피하려고 획책하는 구체적인 계획들이 널리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서 임연객에게 숨기고 있었다.
임연객은 어느 정도는 나와 정윤 왕무 사이의 혼사가 결국 성사될 거라고 믿고 저러는 것이다.
‘왕무와 내가 같이 살 리는 없으니 불쌍해할 필요도 없어. 이제 거의 다 끝났는데.’
* * *
어쨌든 왕무의 군사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여행이 많이 편해졌다.
거기에 확실히 장새를 넘어서자 털가죽 옷을 입은 말갈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험상궂게 생긴 말갈족들이 한 7~8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려를 따르기로 약속한 말갈족들이 식량을 사기 위해 허가를 받고 고려 영내로 들어온 것이다. 왕건은 말갈족들을 기병으로 써먹기 위해 이런 혜택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허가를 받은 말갈족이라고 해도 덜렁 4명이서 여행하다가 마주치면 좀 쫄았을 것 같아.’
다행히도 왕무의 군사들과 합류하면서 주변에 50명의 군졸들이 있으니 말갈족들을 만나도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말갈족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놀란 기색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더 북쪽으로 나아가자 여기저기서 성을 쌓고 있는 공사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경 인근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광경은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정윤 왕무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여인들과 어린아이, 노인들이 성을 쌓고 있군.”
왕무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노인들과 여자들이 힘을 합쳐 힘겨운 표정으로 거대한 돌을 끌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나무토막이며 잔돌들을 옮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장정들은 모두 징발되어 백제와의 전선에 나가 있거나 거란의 무리들을 견제하기 위해 동원됐습니다. 불과 2년 전에 발해가 코앞에서 망했습니다. 사정이 급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임연객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역사서에서 발해가 멸망했다는 것을 읽은 현대인이야 그냥 놀라고 말지만 이 시대 고려인들은 엄청나게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거란이 고려까지 밀고 들어올까 봐 전력을 다해 북방에서 성을 쌓고 있었다.
‘솔직히 모든 인력을 동원해 이러는 게 옳다. 아무 대비가 없었다면 거란이 한번 고려를 찔러봤을 수도 있으니. 다만 직접 이런 광경을 보니 마음이 아프군.’
특히 어린아이들이 잔돌들을 바구니에 가득 넣어 뒤뚱거리며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왕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애초에 내 목적은 성을 쌓는 백성들을 돕는 일이니 며칠이라도 이곳에 머물러야겠다. 다만 병부낭중은 다른 공무로 왔으니 꼭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좋다.”
왕무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그리 말했다. 자기도 당장 공사판에 뛰어들 기세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임연객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맡은 일은 기한이 정해진 일은 아닙니다. 정윤 전하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아무래도 영 어수선한 북방에서 달랑 4명으로 움직이기엔 부담이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