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32화 (3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2화

32. 괴변

‘역시 공짜로 뭘 준다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됐는데.’

어쩔 수 없이 최언위의 뒤를 따라서 한림원 쪽으로 가며 나는 내심 그리 투덜거렸다. 나 자신이 약간은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냥 아무 시키는 일 없이 녹봉만 준다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잖아. 역시 내가 사회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깜빡 넘어갔군.’

그래도 한림원에 들어선 순간 나는 감탄했다. 난세이긴 해도 한 나라의 한림원답게 수많은 책들이 서가에 가득했다.

군데군데 수많은 지도들도 쌓여 있었고 귀해 보이는 그림들도 걸려 있었다.

그 사이를 황색 관복을 입은 관원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무슨 연구를 하는지 책상에 앉아 뭔가를 베끼는 관원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것들을 다 현대로 가져가면 가치가 얼마나 될지.’

최언위만 아니면 잠시 멈춰서 도대체 무슨 책이 있는 것인지 제목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계속 빠르게 걸어가니 그럴 수도 없었다.

최언위는 한림원 중앙에 위치한 전각으로 들어갔다.

‘한림원령인 최언위와 고위 학사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곳이군. 왜 나를 이곳까지?’

나는 묘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을 시켜도 일개 직원인 나는 한림원 외곽의 서가에서 뭔가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에 내가 주춤거릴 때였다.

“자. 이쪽으로.”

최언위는 전각의 문을 열며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계속 독촉했다. 그리고 내가 전각 안에 발을 내딛자마자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연우야. 드디어 왔구나!”

다름 아닌 태조 왕건이 학사들 사이에 앉아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덜컥!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왜 왕건이 한림원에 있는 거야? 하긴 왕건도 한림원에서 일을 볼 때가 있겠지. 그런데 왜 나를 또 부른 거지?’

왕건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삼한을 통일한 사람답게 학문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학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거기에 국정을 운영할 때 전문적으로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 때는 한림원 학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항상 왕건을 따라다니는 대내학사 김악의 모습도 보이고 내봉경 최응도 한쪽에 앉아 있었다.

‘내가 이 사이에 낄 처지가 아닌데.’

최승우와의 대결 때야 내가 잔꾀를 써서 나서기는 했지만 김악이고 최응이고 원래는 학문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현대 사학 석사가 뭘 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었다. 내가 눈치만 보고 머뭇거리는데 최언위는 아예 한쪽의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의자에 앉으십시오. 한림원 내에서는 폐하 앞이라도 굳이 밖에서처럼 엄격하게 예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암암. 그렇고말고. 그래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왕건이 맞장구를 쳤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이럴 때 아버님이 계셔야 하는데.’

아버지인 임희 없이 왕건이며 고려의 여러 학사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나는 약간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허허허. 우리 연우가 많이 긴장했구나. 괜찮다. 괜찮아. 긴장을 풀어라. 너는 이 사이에 낄 자격이 충분하다. 보렴. 김악 같은 사람도 내 곁에 앉아 있지 않니?”

왕건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저는 갑자기 왜?”

한쪽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김악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김악 때문에 나는 예전에 죽을 뻔했다. 옛날에 환선길 그 나쁜 놈이 나를 암살하려고 졸개 50명과 함께 쳐들어왔을 때였어. 그때 나는 김악과 몇몇 사람들과 앉아서 지금처럼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지. 곁에 시위하는 군사들도 없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쳐들어온 거야.”

왕건이 태연하게 말을 잇는데 곁에서 김악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매를 휘저었다.

“폐하, 그때 일은.”

“그러니 겉으로는 안 무서운 척해서 환선길이를 쫓아내서 내가 살았다. 그래서 내가 표정관리를 하며 환선길을 꾸짖는데 옆에서 김악은 표정을 못 숨기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어.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나마 환선길이가 관찰력이 부족해서 내 얼굴만 보고 어떻게 저리 태연한가 하고 놀라서 물러났지. 김악 얼굴을 봤으면……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땀이.”

왕건은 소매를 들어 진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폐, 폐하. 어찌 연우 아가씨한테도 그 얘기를.”

김악이 당황해서 한탄했다.

“어떠냐? 연우야. 그런 김악도 내가 여전히 데리고 다니고 여기 당당히 앉아 있는데 최승우를 꺾은 연우도 여기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안 그러냐?”

“이런 자리에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나는 조심스레 그런 대답을 했다. 아마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김악과의 옛이야기를 꺼낸 듯싶었다.

확실히 김악이 그 얘기를 하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을 구르는 바람에 장내의 분위기가 풀리긴 했다.

나도 한결 위축된 마음이 풀리긴 했다.

“그래서 내가 연우 너를 내가 오늘 부른 이유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왕건은 나를 보며 말했다.

“하문하십시오.”

“혹시 연우 네가 어렸을 때 주름살이 많은 노승 한 분을 만나지 않았니? 키는 여기 한림원령과 비슷하고 항상 미소를 띤 얼굴이셨어. 턱쪽이 점이 하나 나 있고.”

“그런 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왕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도선 대사를 만난 적이 없단 말이냐? 내가 어린 시절 도선 대사를 만났을 때는 딱 그 용모셨다. 이름을 숨기셨나?”

그러자 곁에서 최언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도선 대사께서는 연우 아가씨가 태어나시기 전에 입적하셨습니다.”

“도선 대사라면 또 혹시 모르지. 그런데 도선 대사를 만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연우는 어쩜 이리 신통할까?”

왕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약간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연우 아가씨가 열심히 학문을 익히시고 또 좋은 운을 만나서 활약을 여러 번 하신 것입니다. 이미 입적하신 도선 대사를 어찌 거론하십니까? 그런 기이한 생각에 너무 빠지시면 안 됩니다.”

한림원령 최언위가 나를 감싸주며 그런 충언을 올렸다.

“아닐세. 아니야. 그냥 학문을 닦아서 될 일이 아니야. 나는 연우 저 아이를 아주 어렸을 때 한번 보고 3달 전에야 만났어. 그런데 그 3달간 연우에게 4번 놀랐네. 처음 공산에서 빠져나올 때, 저 아이가 학관 신례를 치를 때, 최승우와 대결할 때, 그리고 이번에. 이게 다 우연이라고?”

그러더니 왕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악이며 최응 같은 사람들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뜨끔.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많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미래 지식을 안다고 너무 설쳐댄 건가? 이번에 놀랐다고 하는 건 김순식, 김장명의 일을 말하는 거 같고. 이거 참. 앞으로는 몸을 사려야겠어.’

그런 다짐을 하며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잡학이나 잡기에 능해서 운수요행으로 폐하께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수현한테 했던 것처럼 그냥 촉이 좋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못 빠져나갈 거 같아 나는 잡학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왕건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잡학과 잡기에 능하다니 그것참 잘됐다. 자 내가 이번에 연우 너를 부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서경에서 온 상소다. 한번 읽어 보거라.”

그러더니 왕건은 서탁 위에 놓여 있는 상소문 한 장을 건넸다.

-서경에서 강풍이 불어 민가가 부서지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북방 여러 고을에서 암탉이 갑자기 수탉으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여기에 건축자재들과 군량이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여기 소요되는 목재가 아쉬운 대로 큰 수레 50대 분량. 군량이 2천석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아뢰니…….

나는 상소문을 읽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둘러 서경에 군량부터 보내면 될 문제 같습니다.”

그러자 왕건은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문제라면 내가 왜 연우 너를 불렀겠니? 차라리 상산백을 불렀지. 그거야 개경에서 군량을 실어 보내면 되는 거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암탉이 수탉이 됐다는 소문이다. 그게 혹여 진실이라면 걱정이다. 연우 너는 뭔가 짚이는 것이 없느냐?”

왕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최언위, 최응, 김악이 입을 모아 외쳤다.

“폐하, 그것은 뜬소문일 뿐입니다. 거기에 지존께서 신경을 쓰시면 안 됩니다.”

학자 3명의 표정은 매우 근엄했다.

‘하긴 저 3인은 유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들이니 저런 얘기는 싫어하겠지.’

고려 시대라 해도 유학자들의 성향은 조선 시대와 비슷했다. 고려 시대 유학자도 불교까지는 인정해도 괴이한 이야기는 아예 믿지 않았다.

“연우야. 나는 이 닭 이야기를 듣고 어제 잠도 못 잤다. 이런 신비한 일, 징조 같은 것을 결코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무슨 연유인지 깊이 파봐야 해.”

왕건은 곁에 있는 3명의 학자들의 조언도 안 듣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진심인 표정이었다.

‘하긴 왕건은 풍수지리, 도참 같은 것을 엄청 좋아했으니. 평생 도선 대사를 존경한 것도 그렇고. 괴변이 일어났으니 찜찜하긴 하겠지. 왕건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그런 것들이 매우 큰 역할을 했고.’

왕건의 이런 성향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 나는 이해가 가긴 갔다.

“그런데 제가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힙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이건 무슨 미래 지식을 쓸 수도 없고 나보고 어쩌란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연우 네가 한번 서경에 가봐라. 그리고 괴변이 터진 북방의 고을들도 좀 둘러보고. 잘 살펴보고 좀 내 마음이 편해지게 그 문제를 수습하든지 해봐라.”

왕건이 대뜸 나에게 명을 내렸다.

“폐하. 어찌 그런 유언비어에 휘둘리십니까? 경전을 열심히 읽고 덕을 쌓고 백성들을 다스리면 되는 문제입니다. 학문이 깊으신 폐하께서 어찌?”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최언위가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다.

‘이건 최언위 말이 맞아. 자연재해 때문에 삶이 힘들어져서 헛소문이 생긴 건데 나더러 뭘 어쩌라고. 최언위 말대로 해야지.’

단순히 내가 서경까지 가기가 싫어서 최언위에게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왕건은 그런 최언위의 충언을 무시하더니 말했다.

“봐라. 내가 왜 연우 너를 불렀는지 알겠지? 무장들은 내가 왜 그런 일을 가지고 근심하는지 모를 테고, 문신들은 덕 타령만 하고. 이 문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어찌 된 영문인지 살펴봐야 해. 이런 징조 같은 것들이 백성들의 민심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문무백관들이 있지만 믿을 건 연우 너뿐이구나.”

왕건이 간곡하게 말했다.

“일개 어린 여자아이인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내가 말했잖니. 너는 3달간 나를 4번이나 놀라게 했다. 위기 때마다 빠져나오던 그 재주로 이번 일도 해결해 봐라.”

왕건은 대뜸 그런 식으로 밀어 붙었다.

‘어이없네. 이걸 확.’

나는 순간 분통이 터졌으나 어쩔 방법이 없었다.

“북방은 매우 험악한 곳인데 소녀가 어찌 다닐 수 있겠습니까? 군졸들을 붙여준다고 해도 제가 통솔이나 할 수 있을지.”

나는 그쪽 핑계를 대보려고 했다.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산백의 아들이 마침 병부에 근무하고 있지 않느냐? 말타기가 상당히 능해서 과연 상산백의 아들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어. 이름이 뭐였지?”

왕건이 김악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병부낭중 임연객입니다.”

김악이 약간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자기들 말을 무시하고 괴변에 신경 쓰는 왕건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뜻이 굳어 보이니 다른 학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연우야. 그러니 오라비인 연객이와 함께 북방에 다녀오거라. 나도 내가 내린 명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너희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도 좋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이 문제를 조사해 보거라. 내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그래.”

왕건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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