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7화 (27/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7화

27. 입궁

왕건에게 국서를 전한 최승우는 더 이상 별일을 벌이지 않고 그대로 백제로 귀국했다. 나한테 그 망신을 당했으니 뭘 더 할 기력도 없었을 것이다.

최승우와의 대결이 있고 난 후 학관은 3일 동안 쉬기로 했다. 그 큰일을 치렀으니 바로 학관에서 수업을 재개하기는 어려웠다.

최승우의 대결을 준비하느라고 최언위와 한림원 학사들도 잠도 안 자고 준비를 해서 피로가 극심했다.

학관의 하인들도 고생이 컸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3일간의 휴가가 주어진 것이다.

나도 최승우와 잠깐 대결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긴장감 때문에 몸과 마음이 노곤했다. 그래서 주어진 3일간 푹 쉴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나를 그리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학관을 3일 동안 안 간다니 마침 잘 됐구나. 학관에 안 가서 한가할 때 입궁을 하면 되겠다.”

임희는 잘 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입궁이라니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희가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너에게 학관 입학을 명함과 동시에 한 달에 1주일은 나주왕후 님의 거처에서 지내라고 명을 내리시지 않았느냐? 개경에 막 왔을 때는 적응을 해야 하니 상산저에서 지냈지만 이제는 폐하의 명을 수행해야 한다.”

“아버님 말이 맞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지하게 왕건의 그 명령에 대해서는 까먹고 있었다. 그간 워낙 사건들이 많았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한 직후 혼사를 2년 연기했을 때는 왕건이 몇몇 조건을 내걸어도 너무 좋았는데. 에잇, 왜 하필 나주원에서 일주일을 지내라는 명을 내려서. 그러면 정윤 왕무와도 얼굴을 보게 될 거 아니야. 그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얼마나 어색할지.’

그런데 임희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딸의 심지가 이리 굳은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심지가 굳다니요?”

나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임희가 말했다.

“네가 신례 때 비밀통로에서 정윤 전하를 만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정윤 전하의 외모를 보고 나서도 정윤 전하에 대해 그동안 한 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쉽지 않을 텐데 참으로 대단하다. 최소한 네가 정윤 전하께 마음을 뺏길 일은 없겠구나. 허허허. 나는 그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는 황당한 걱정을 하는 임희가 안심하라고 미소를 지었다.

‘속알맹이가 남자인데 아무리 잘생겨도 왕무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그래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을 유지하거라. 그럼 아예 오늘 나주원에 가자꾸나. 첫날이니 나와 함께 가자. 나주 왕후 마마께 너를 소개하고 인사도 드려야 하니.”

임희는 그리 말하며 나와 함께 상산저를 나섰다. 그런데 뭔가 짐들이 많았다. 나와 임희가 타고 갈 수레 외에도 짐들이 실려 있는 수레가 따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다 뭔가요?”

“나주 왕후께 너를 맡기는 셈인데 빈손으로 갈 수야 있겠느냐? 당연히 예물을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침 네가 신례 때 겪은 사건으로 황주에서 많은 예물을 우리 쪽에 줘서 수월하게 이것들을 준비했구나.”

임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약간은 의아했다.

‘이게 그냥 선물이라기엔 양이 과한데. 쌀이며 면포 같은 생필품까지 있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수레에 올랐다.

“가자!”

역시 수레에 오른 임희는 마부에게 시원하게 명을 내렸다.

* * *

고려시대는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궁중 예법이 까다롭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올해로 건국된 지 이제 겨우 10년 남짓 된 상황이었다. 건국 초였고 10년 내내 백제와 전쟁을 했다.

당연히 예법이며 문물 제도가 모두 정비가 안 됐다. 그래서 남자인 임희가 왕후를 만날 수도 있었다.

“나주원에 가서 내 딸을 맡기며 왕후 마마를 알현하고 싶다.”

임희가 궁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말했다.

“미리 전갈을 받았습니다. 드십시오.”

시위는 냉큼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임희는 나와 예물을 짊어진 하인들과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참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언덕 위에 지어져서 궁에 다니면 은근히 운동 되네.’

그리고 건물들도 질서 정연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임희는 궁 안 지리에 익숙한지 순식간에 길을 찾아냈다.

“다 왔다. 나주원이구나. 잠시 짐 정리를 하고 들어가자.”

무거운 예물을 들고 오는 하인들은 꽤 뒤처져 있어서 임희는 나주원 앞에 멈춰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여, 여기가 진짜 나주원인가요?”

나는 입을 쩍 벌리며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내가 지내는 상산저보다 별로인데. 아니 그냥 거의 서민들이 사는 집 수준 아니야?’

물론 초가집은 아니었다. 나주원은 분명 기와를 올리긴 했고 꽤 넓은 편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좀 사는 중산층의 집이었지 고려의 왕후 중 한 명이 사는 곳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왕궁의 다른 곳도 다 이처럼 초라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 왕궁의 다른 건물이나 전각들은 왕실의 위엄에 걸맞게 웅장했다.

경악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임희는 주변을 한참이나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나주원 바로 앞이니 누가 엿들을까 봐 신중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임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사방에서 들어오는 세금의 8할이 군비에 쓰이고 있다. 나머지 2할로 겨우 왕실의 경비며 관리들 녹봉을 충당하고 있다. 여러 왕후 마마나 부인들의 거처를 지을 비용이 안 나온다. 왕후나 부인들의 거처는 그분들의 친정에서 비용을 대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웅장한 거지. 그런데 나주 왕후 마마의 친정이신 나주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초라한 나주원을 보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쉿쉿, 입조심 하거라. 절대 나주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임희는 계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윤 왕무의 친모인 나주 왕후의 친정은 나주 오씨였다. 나주는 오늘날의 전라남도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 고려 본토와는 육지로 연결된 곳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왕건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타고 나가서 삼한 남쪽 해안에 있는 나주를 점령하고 견훤의 후방을 어지럽혔다.

그때 나주 오씨가 왕건과 혼인을 맺고 왕후까지 배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바다를 통해 왕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야. 나주에서 개경의 왕후에게 뭔가 물자를 보내고 싶어도 쉽지가 않아. 견훤의 압박도 심한 상황이다. 진작부터 나주 왕후는 친정의 지원을 일절 못 받았을 테고. 요즘 같은 시국에는 더욱 힘들지.’

이미 사벌주에서 견훤이 고려군사들을 마구 깨뜨리며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고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나주도 견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실제 역사를 보면 조만간 나주가 결국 견훤 손에 함락된다. 뭐 이걸 아는데 굳이 미래 지식이 있을 필요도 없지만.’

이미 내 아버지인 임희나 고려 중신들은 나주가 오래 못 버틸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나주가 견훤에게 포위당해도 지금 고려는 원군을 보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보내고 싶어도 지금 사벌주에서 연이어 전선이 무너지고 있는데 나주에 보낼 군사가 없었다.

그러면 나주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니 왕건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내가 이리 힘든데 좀 안 보태주고. 하긴 나주원에만 돈을 더 퍼줬다간 다른 10여 명의 부인들이 난리 나긴 하겠지.’

어쨌든 괜히 임희가 거창한 예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나주원의 힘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딸인 내가 나주원에서 지내게 되니 외면하기가 난감해서 생필품이며 돈을 좀 넉넉하게 준비해 온 것이다.

‘쩝, 이거 진짜 정윤과의 혼사는 기필코 피해야겠군. 아니 혼사가 그대로 진행되면 상산에서 나주원까지 다 먹여 살려야 하는 건데. 상산이 무슨 큰 군도 아니고 이게 감당이 안 된다.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겠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왕후 마마께 제 딸을 일주일씩이나 맡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소하나마 예물도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나주원에 들어간 임희는 나주 왕후를 알현하자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그 곁에서 나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대단한 미모다.’

그러면서 나는 슬쩍 나주 왕후의 얼굴을 훔쳐봤다. 사실 멀리서 처음 봤을 때는 나주 왕후가 20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와서 보니 어느 정도는 나이가 든 티가 났다. 약간은 흰머리가 나 있기도 했지만 매우 우아한 모습이었다.

‘왕건이 세력뿐만 아니라 얼굴도 보고 결혼을 한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아들, 딸들이 다 예쁘지.’

그동안 내가 만난 고려 왕실 사람들은 모두 외모가 뛰어난 편이었는데 확실히 그 이유가 있었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평범한 나로서는 좀 위축됐다.

“상산백의 따님은 그 이름을 개경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런 손님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제 어려운 처지를 아시고 이리 상산백께서 도움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주 왕후는 솔직하게 예물을 받은 것을 고맙다고 말했다. 애초에 나주 왕후는 왕건이 왕이 되기 전에 혼인을 했다.

왕후가 될 거라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왕후가 되고 정윤의 어머니가 된 거라 소탈한 면이 많았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어쨌든 그러면 딸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임희는 길게 말을 나누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마요.’

나는 내심 그리 절규했다. 거의 예비 시어머니 격인 사람과 단둘이 있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임희는 냉큼 예를 갖추고는 그대로 나주원에서 물러났다. 혼자 나주원에 남게 된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할 때였다.

“어머니, 이제 제가 나와도 되나요?”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달려왔다. 노란빛이 감도는 소박한 옷차림의 나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소녀였는데 정말 귀여웠다.

‘눈이 진짜 크다.’

내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감탄하는데 나주 왕후가 말했다.

“연우야, 내 딸아이를 소개하마. 이름은 지수란다. 워낙 나이가 어리고 천방지축이라 상산백이 있을 때 결례라도 저지를까 봐 자기 방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저 아이가 연우 너를 보고 싶어서 네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단다.”

‘나주 왕후의 성이 오씨이니 저 소녀의 이름은 오지수겠군. 정윤 왕무에게 여동생이 있었어. 안 그래도 앞으로 학관에서 일을 꾸밀 때 적당한 패가 없어서 난감했는데 딱 알맞은 등장이네.’

나는 오지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추었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지수가 그대로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화끈.

나는 진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임연우의 몸에 빙의한 지도 2년이 지났고 여자 몸에 빙의해서 다른 여성들과 격의 없이 지내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과감한 스킨십을 한 것은 오지수가 처음이었다.

“이 무슨 결례냐?”

한쪽에서 보고 있던 나주 왕후가 놀라서 오지수를 꾸짖었다.

“연우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언니, 정말로 언니가 백제군을 뚫고 폐하를 구하고 학관에서 최승우를 물리쳤나요? 자세히 얘기 좀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오지수는 그대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부드럽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데 나주 왕후는 억지로 오지수를 떼어내며 말했다.

“연우, 네가 나주원에서 지내는 동안 쓰게 된 처소를 준비해 두었다. 그곳을 한번 둘러보고 쉬고 있으렴.”

버둥거리는 오지수의 어깨를 붙들고 나주 왕후가 말했다. 나를 내보내고 오지수를 좀 혼내려는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아쉽긴 했다. 그래도 더 죽치고 있을 수도 없어서 안내하는 시녀를 따라 나주 왕후가 머무는 처소에서 물러났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