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6화
26. 관직
“연우 아가씨,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의 이 승부는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 하나가 지는 것은 괜찮으나 고려를 위해서 이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가씨가 이 무능한 서생을 구해주셨습니다.”
최언위가 내 곁에 다가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나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스승님.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당황해서 그런 최언위를 말렸다.
‘사실 내가 떳떳하게 최승우를 이긴 것은 또 아니란 말이지. 전생이란 꼼수 덕에 이긴 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열광하니 양심에 찔렸다. 그런데 이미 사람들의 흥분은 내가 몇 마디 한다고 가라앉을 수준이 아니었다.
“내 말이 맞지 않소! 상산백의 따님은 기이한 꾀가 많다고. 내가 나서서 한번 겨뤄보라고 말했소. 내가!”
대내학사 김악은 의기양양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자기도 최승우를 꺾는 데 공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그건 어찌 아셨소?”
내봉경 최응이 김악에게 묻자 김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폐하께 들었소. 구체적인 이야기는 군기에 속한 이야기라.”
‘왕건이 김악에게는 내가 계란에 글자를 숨겨 보낸 얘기를 했군. 하긴 김악은 워낙 측근이니.’
나는 이제야 왜 결정적인 순간에 김악이 나를 거들어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왕건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김악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를 밀어본 것이다.
그때 한쪽에 조심스레 서 있던 구족달이 내쪽으로 와서 물었다.
“연우 아가씨께서는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신 것입니까? 정말 어린 시절 개명을 하지 않으셨다면 실로 기이한 일이라 너무 궁금해서 이리 묻습니다.”
서예 명가로서 구족달은 내가 왜 내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종의 체질 같습니다. 특이하게 어린시절부터 그것이 가능했는데 그것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중에나 깨닫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운수요행으로 한번 그것을 써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나는 대충 그리 얼버무렸다.
“매우 특이한 체질이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구족달은 수염을 계속 쓰다듬었다. 서예명인이라 그런지 이쪽에 관심이 너무 많아 보였다.
“오늘 구 학사님의 뛰어난 서법을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저와 최승우의 이름이 적힌 종이 옆에 구 학사님께서 글귀를 남겨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화제를 전환할 겸 그런 부탁을 했다.
‘계속 내가 이름을 어떻게 그리 쓸 수 있었는지 얘기하다 보면 파탄이 날 수 있으니. 그리고 기왕 내가 최승우를 이긴 글씨를 가보로 만들 거면 지금 고려 제일명필이라 할 만한 구족달의 글씨도 받아두는 것이 좋지.’
그러자 구족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패배를 설욕해 주신 아가씨의 글씨 곁에 저의 글씨를 나란히 쓸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그리고 구족달은 붓을 들어 내 이름이 적힌 종이 한쪽에 글을 썼다.
-개경 학관에서 상산 땅의 임연우가 백제 예부령 최승우를 깨뜨려 나라의 이름을 빛내다.
구족달 특유의 굳건한 필체와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저도 남겨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대내학사 김악도 손을 들며 말했다.
‘김악 글씨만 안 받는다고 하면 감정이 상하겠지. 굳이 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언위며 최응, 최지몽 같은 다른 문관들도 모두 붓을 들게 됐다.
그 덕에 나는 가보로 삼을 만한 진짜 멋진 기념품을 얻게 됐다.
‘이제는 슬슬 집에 가고 싶은데.’
나는 글씨가 적힌 종이를 챙기며 정자 밖을 바라보았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흥분한 학관 학생들과 각지의 고승들이며 학자들도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지 정자 주변에 몰려와 있었다.
‘포위당한 거야 뭐야?’
내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그러자 정자 밖의 학생들이나 고승들은 놀라서 물러나며 예를 갖추었다. 사람들의 포위망(?)이 약간 느슨해졌다.
‘기회다.’
나는 이 틈에 재빨리 학관 학생들 사이에 끼어 숨으려고 했다. 은근슬쩍 사람들 사이에 묻혀 집에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왕건은 곧바로 허겁지겁 뛰듯이 정자 쪽으로 달려오면서 외쳤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처음에 졌다는 보고를 받고 내일 최승우 그놈을 접견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는데 우리가 이겼어!”
그러면서 정확히 내 쪽으로 오는 바람에 나는 사람들 사이에 묻힐 기회를 놓쳤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예를 갖추는데 왕건은 기쁜 기색으로 외쳤다.
“또! 연우 네가 고려를 위해 공을 세웠구나. 내가 재암성에서 너를 만난 지 몇 달 안 되는데 몇 번이나 너를 보게 됐어. 우리 연우가 최승우를 깨뜨렸구나. 이제는 내일 최승우 그놈의 얼굴을 보기가 기다려진다.”
“소신이 연우 아가씨가 최승우와 대결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대내학사 김악이 그러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방금 전부터 느낀 건데 김악이 계속 이걸로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야 내가 너한테 연우 얘기를 해줘서 그런 거고. 결국 내가 연우가 학관에 입학하도록 명을 내렸다. 안 그러느냐? 즉 내가 아니었으면 연우가 여기 없었다는 거지.”
왕건이 그리 말하자 주변의 눈치 빠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걸 예상하시고 연우 아가씨를 학관에 입학시키신 폐하의 혜안에 놀랄 따름입니다. 폐하 만세!”
“만세.”
그러자 주변 여기저기서 왕건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건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외쳤다.
“백제 예부령이자 내각대학사, 견훤이의 제일 군사. 참모, 당나라 빈공과 급제자, 당나라 현령을 역임하고……한림원령, 최승우가 또 뭘 했지?”
한참 최승우의 경력에 대해 나열하던 왕건이 문득 최언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나라 명사들과 교류도 하고 백제 내정도 돌보고 그랬습니다.”
최언위가 재빨리 대답하자 왕건은 흡족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그래. 어쨌든 그 대단한 최승우를 우리 고려의 한 소녀가 이겼다. 이게 천명이다. 술도 가져와라, 고승들을 위한 차도 가져와라. 음식도 가져와라. 오늘은 학관에서 연회를 열겠다.”
왕건은 자신이 두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와아아아!”
그러자 학관 학생들이 다시 일어나서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최승우를 이겨서 기쁜 건지 연회가 열려서 기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왕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하인들이 미리 준비한 듯 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만.”
나는 왠지 지금 집에 안 가면 계속 붙들려 있을 거란 예감에 작게 그리 중얼거리며 발을 빼려 하는데 왕건이 나를 불렀다.
“그래 연우야. 네가 최승우를 이긴 그 글씨를 보여다오. 나도 한번 이 두 눈으로 보고 싶구나.”
“예, 폐하.”
빠져나가려다 또 잡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바쳤다.
왕건은 찬찬히 내 글씨와 최승우의 글씨를 살피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아쉽구나.”
“예? 뭐가 아쉬우십니까?”
내가 묻자 왕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연우 네가 관직이 없어서 이 중차대한 대결에서 이름 앞에 덜렁 학생이라고만 적어놨어. 최승우는 앞에 무슨 거창한 관직명을 주렁주렁 멋지게 써놨어. 물론 그래봤자 최승우가 졌지만. 그래 내가 우리 연우에게 관직을 내려주마.”
“예? 관직을 말씀입니까? 소녀는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하는 몸입니다. 최승우를 이긴 것은 그야말로 운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고려에 천명이 있어 생긴 운일 것입니다. 관직이라니 저는 결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리 말했다.
‘관직을 받는 게 유리한 건지 불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왕건이 준다니까 불길해. 그냥 안 받는 게.’
“관직이라고 하지만 명예직에 가깝고 그냥 관직만 가지고 있으면서 이전처럼 공부를 하면 된다. 허허허. 아니 네가 받기 싫어도 어쨌든 최승우를 꺾었는데 관직을 받아야 뭔가 우리 고려 조정의 승리가 되는 것 아니냐? 거기에 여인이 관직에 오른 전례도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누이 연수영이 일찍이 무장이 되어 활약했다. 지금도 난세니 능력이 있는 사람은 쓸 수밖에 없다. 한림원령.”
왕건은 매끄럽게 말하더니 최언위를 불렀다.
“한림원에 직원을 한 명 더 뽑으면 어떻겠소?”
오늘날의 회사 직원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한림원에 ‘직원’이라는 명칭의 관직이 있었다.
“연우 아가씨는 학관에서 공부를 해야 하니 학관 바로 옆에 있는 한림원에서 근무하면 용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직원이라면 많은 일을 줄 필요도 없고 가끔씩만 한림원에 오시면 되니 폐하의 명이 실로 옳습니다.”
최언위 역시 냉큼 그리 말을 받았다.
“자, 연우야 오늘부터 너도 고려 한림원 직원이다. 축하한다. 고신은 조만간 한림원령이 마련해서 줄 것이다.”
그러자 왕건은 나를 보며 그리 선언해 버렸다.
‘받기 싫다고 했는데 관직을 주다니. 근데 전생에서도 이리 일이 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생에는 취업 준비하다가 싱크홀에 빠졌는데. 어쩌면 여기에서라도 공기업에 입사한 것이니 좋게 생각해야 하나?’
나는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관직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감성적으로는 공을 세우고 그걸 인정받아 어쨌든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 기쁘긴 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왕건에게 예를 갖추었다.
* * *
이날 나는 오후 늦게야 겨우 학관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실 왕건은 나를 오래 붙잡지는 않았다.
나에게 관직을 내려주고는 재빨리 삼한 각지에서 모인 고승들이 있는 쪽으로 또 갔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론을 조성할 의도가 역력히 보였다.
다만 내 앞에는 나를 향해 몰려오는 수많은 학생들과 고승, 학자들의 물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후 늦게 아버지인 임희가 달려와서 이 아수라장에서 나를 빼냈다. 내가 학관에서 돌아올 시간이 지나자 임희가 직접 학관까지 왔다.
지난번 신례 때 내가 죽을 뻔한 이후로 내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불안해져서 바로 달려온 것이다.
“그 덕에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나는 임희와 상산군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 오르며 말했다. 임희와 상산군졸들이 갇혀 있는 나를 보고 결사적으로 길을 터서 탈출에 성공했다.
“참 내 딸이지만 놀랍구나. 직접 나서서 최승우를 꺾다니 그래도 정말 잘했다.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지금 그나마 다행이구나.”
임희는 학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소식이라 하시면.”
“사벌주에서 우리 군사들이 또 패했다. 견훤이 우리 군이 장악하고 있던 농지의 곡식을 모두 태워 버려서 지금 군량이 끊겼다. 견훤의 군재가 놀랍구나. 그러니 연우 너의 승리 소식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긴 할 것이다.”
“흐음.”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기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왕건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내 이야기로 아예 여론 물타기를 할 생각이군. 그래서 파격적으로 지금은 여인인 나에게 관직도 내렸고. 최언위가 군말 없이 그 명을 따른 것도 그렇고.’
왕건이 연수영의 전례가 있다고 했지만 그 사람은 몇백 년 전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 여인이 관직에 오른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왕건이 대뜸 명예직에 별일이 없긴 해도 한림원 직원 관직을 나에게 준 것은 사벌주의 패배 소식을 내가 최승우를 이기고 관직을 받은 이야기로 물타기 하려는 수법이지. 좋아. 왕건의 의도가 그것이라면 딱히 관직을 받은 것이 나에게 불리한 것은 아니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흔들리는 수레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