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5화 (25/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5화

25. 자신

“자네 그 무슨?”

최언위가 놀라서 김악에게 외쳤다. 김악이 한마디 거들어준 덕에 장내의 분위기는 좀 바뀌었다.

고려의 거물 문관이 나를 어느 정도 보증해 준 것이다.

“내가 고려 측에 이렇게까지 수모를 주기 싫었는데 그대들이 이리 나오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 승부에서 졌으면 승복을 해야지 어린 소녀를 앞세워 말 같지도 않은 요구를 하는 것이 도리입니까? 고려 측이 이리 망신을 자초한다니 도리가 없습니다.”

최승우는 김악의 말을 듣고 냉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 학사! 어찌 이런.”

최언위는 놀라서 김악을 약간 탓하는 어조로 외쳤다. 확실히 최승우의 말대로 이런 서예명가들 사이에 어린 소녀를 억지로 끼워 넣으면 고려의 위신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최승우는 이미 기분이 나쁜지 대결에 나서서 고려에 더 큰 망신을 줄 기세였다.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최승우가 말했다.

“학생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 못 한 덕에 고려에 더 큰 망신을 주게 됐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고려 왕실에 학생 같은 처자가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 백제국에 크게 이로울 것 같군.”

최승우는 나를 은근히 공격하려고 그런 말을 했겠지만 나는 최승우의 그런 공격이 오히려 반가웠다.

“말씀을 들어보니 예부령께서는 제 이름을 들어보신 것 같습니다.”

분명 고려 왕실에 들어간다고 거론한 것은 내가 정윤 왕무와 혼사가 논의되는 사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고려국은 우리 백제의 적이니 고려 왕실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네. 그러나 학생은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이리 도전하니 매우 유감이군.”

“어찌 됐든 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리 대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예를 갖추는데 최승우는 이제 아예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최승우는 정자 안에 놓인 서탁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글씨를 쓸 태세였다.

“방금 전 예부령께서 우리 고려의 구족달 학사와 대결하실 때 시제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고려 측이 시제를 제시할 차례입니다. 그러니 제가 시제를 제시하는 것에 예부령께서는 동의하시겠습니까?”

“흐흐흐, 나는 구족달과 다르게 모든 서체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다. 시제 제시로 뭔가 이득을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야. 어느 시제든 마음대로 제시하도록.”

최승우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부령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대결에서 예부령 본인의 글씨와 우리 고려 문관들의 글씨를 거두어 서첩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서첩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법입니다. 제가 드릴 시제는 우리 두 사람 각자의 이름을 써서 겨루어보자는 것입니다. 호가 아닌 우리 두 사람의 본명을 써서 서법을 겨루면 좋겠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학생이 아예 서예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군. 우리 두 사람의 본명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생이 나를 이길 수는 없지. 이름이라. 좋아.”

최승우는 매우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내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대고려 학관 학생 상산 임연우(大高麗 學館 學生 常山 林蓮佑)

한 호흡에 글을 적은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이름을 그냥 적는 것이라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최승우 역시 마찬가지인지 붓을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최승우의 표정은 약간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먹물이 마르자마자 학관 하인들은 나와 최승우의 글을 들어 정자기둥에 걸어놨다.

나도 정자 밖으로 나와 최승우가 뭐라고 적었는지 살폈다.

-대백제 예부령 내각대학사 최승우(大百濟 禮部令 內閣大學士 崔承祐)

‘정말 대단한 필력이긴 하다. 나는 상대가 안 돼. 그러나 아무리 최승우라 해도 이번에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자 밖에서 심사를 맡은 고승들 사이에서는 경악의 목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앗!”

“어찌 이런 일이?”

그리고 역시 대결의 결과가 궁금해서 정자 밖으로 나온 최언위 등의 고려 문관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 이럴 수가?”

최언위가 계속 그 말만 중얼거리는데 곁에서 대내학사 김악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이러면 우리가 이긴 건데?”

내 글씨는 사실 필력을 운운할 것도 없었다. 그냥 적당히 학문을 익힌 사람답게 단정하고 정갈한 필체였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런했다.

이에 반해 최승우는 엄청난 필력으로 글씨를 썼다. 자신의 관직명까지는 놀라운 필력을 유지했으나 최승우라는 본인의 이름만은 미숙한 티가 났다.

‘내가 주워듣기로 아무리 뛰어난 서예 명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름만은 쓰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과연 사실이군.’

대개 사람들은 글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쓰는 법을 배운다.

그건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글을 배울 때는 이름 석 자를 가장 먼저 써본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배운 글자라서 이름을 쓸 때만큼은 어린 시절의 나쁜 습관이나 미숙함이 이후 아무리 수련을 해도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 기억이 평생 뇌리에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서예명가가 되려면 그런 습관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 중요한데 이름에 대해서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서예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 미숙함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개 서예명가들은 따로 호를 지어 이름 대신 적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름에는 기묘한 뭔가가 있어서 호도 이름처럼 오래 사용하면 글자를 쓸 때 이상한 기분이 드는 법이다.

그래서 서예가들은 하나의 호가 아닌 여러 가지를 번갈아 가며 서명 대신 썼다.

‘역시 최승우가 서예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군.’

최승우의 글씨는 처음에 놀라운 필력으로 써놓은 관직명에 이어지는 미숙한 서체의 본명 때문에 용두사미의 격이었다.

이에 반해 내 글씨는 필력은 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면 균형이란 면이나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내가 최승우를 이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아가씨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군. 아가씨는 분명 커서 개명을 한 적이 있었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는가? 임연우라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의 본명이 아니지!”

최승우가 나를 바라보며 얼굴이 새빨갛게 돼서 고함을 쳤다.

‘그야 당신 말이 맞지. 나는 2년 전에 확실히 개명을 했어. 김선우에서 임연우로 말이야. 그래서 이름을 쓸 때도 조금의 이상함도 안 느끼고 같은 서체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지금 장내의 그 누구도 내가 그런 식으로 전생을 해서 개명을 한 줄은 알 방도가 없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예부령께서 이미 어린 시절 제 이름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 임연우가 역사에 무대에 등장한 것은 11살 때였다. 그 어린 나이에 나와 정윤 왕무의 혼약이 맺어졌다.

‘구족달의 이름까지 알아낸 최승우의 정보력으로 봐서 아마 내가 정윤과 혼약을 맺은 순간 그 이름을 최승우가 포착했을 것이다. 적국 왕위계승자의 약혼자 이름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지. 거기에 당시 아버님이 병부령이셨으니 최승우가 내 이름을 모를 리가.’

아마 내가 핵심을 찌른 모양이었다. 최승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헤아리더니 중얼거렸다.

“그래 확실히 11세 때도 그 이름이긴 했다. 그러나 혹여 11세 전에 개명을 했다면…….”

그러다가 최승우는 말끝을 흐렸다. 이 시대에는 확실히 개명을 하는 사람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는 굳이 개명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승우는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다른 말을 하려 하는데 정자 밖의 한 고승이 일어나서 외쳤다.

“예부령, 그 소녀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임연우가 맞습니다. 내가 오랜 세월 대목군에 살았는데 상산백과 그 일가의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분명 그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임연우라는 한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정윤과의 혼약소식을 듣고 상산백의 위세가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에 놀란 기억이 납니다.”

대목군은 오늘날의 천안이었다. 상산과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곳의 고승이 나선 것이다.

“백제국에도 웅천주나 그 인근 출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부령께서 돌아가셔서 그들에게 물어보면 상산백의 딸 이름 정도야 손쉽게 알아낼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도 확실히 상산백의 따님은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이었습니다.”

다른 학자 한 사람도 일어나서 거들었다.

상산은 한산주에 속해 있긴 해도 웅천주와도 매우 가까웠다.

그리고 상산백 임희도 인근에서는 손꼽히는 호족이라서 임희와 그 일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백제의 세력이 닿는 웅천주 출신 중에는 많았다.

그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보증하니 최승우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려 측에서 조금만 조사하면 드러날 사실로 거짓말을 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최승우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대내학사 김악이 기쁜 표정을 못 감추고 두 손을 번쩍 들며 부르짖었다.

“우리 고려의 한 학생이 최승우를 이겼다!”

“와아아아!”

그리고 김악의 말이 끝나자마자 멍하니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학관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구경꾼으로 온 고승이며 학자들도 기묘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태어날 때부터 저 이름이라면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뭔가 체질이나 습관이 독특한 것인가?”

“오늘의 일이 이런 식으로 결판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분명 백제 예부령은 오늘의 대결을 준비하며 모든 대비를 다 해놨고 실력도 삼한에서 으뜸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도 개경임에도 백제 예부령이 이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리 풀리다니. 역시 하늘이 고려의 편을 들었다고 할 수밖에는.”

나는 갑자기 학관 정원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니 얼굴이 약간은 붉어졌다.

최승우와 대결을 한창 할 때는 긴장 때문에 오히려 괜찮았는데 지금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래도 이 대결의 마무리는 말끔하게 내야 했다.

나는 정자 기둥에 걸린 내 글씨와 최승우의 글씨를 떼어냈다. 이번 대결은 내가 이겼으니 전리품으로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예부령께서 서첩을 만드실 때 아쉽게도 이름을 쓰는 부분은 빼야 되겠습니다.”

나는 은근히 그렇게 최승우를 조롱했다. 오늘 하루 종일 최승우가 하도 고려 쪽을 비웃어서 가볍게 반격을 해줬다.

그런데 아마 내 말에 최승우는 많이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콰직!

최승우는 서첩을 만들겠다고 오늘 대결에서 자신이 쓴 글과 고려 문관들이 쓴 글을 한쪽에 모아놨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마자 최승우는 그쪽으로 가서는 그것들을 다 찢어버렸다. 그리고 소매를 떨치며 말했다.

“가자! 객사에서 쉬어야겠다.”

최승우는 자신이 데리고 온 백제 사람들과 함께 그대로 인사도 없이 학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허, 저 아까운 것을 저리.”

정자 밖의 구경꾼들은 모두 아쉬움을 표했다. 오늘 대결에서 나온 글씨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작품들이었는데 그걸 최승우가 분에 못 이겨 없앤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종이와 최승우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곱게 말아서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진짜 가보로 물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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