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4화
24. 내가 나선다
‘그래 젊은 시절에 최승우와 친분이 있어서 그 실력을 아는 최언위가 아무 대책 없이 나왔을 리 없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지시를 받고 나왔을 건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최승우는 웃으면서 물었다.
“구 학사! 부탁하오.”
최언위는 그러자 정자 아래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청색 관복을 걸친 한 중늙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관에 찾아오는 고승들을 안내하고 잡일을 맡은 관원이었다. 중늙은이는 침착한 태도로 정자 위에 올라오더니 두 손을 모아 최승우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한림원 학사 구족달이라고 합니다.”
구족달의 모습을 보자마자 최승우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 주머니를 열어주십시오. 그 주머니를 이번에 쓰고 싶습니다.”
그러자 심사를 맡은 고승 중 한 명이 나서서 주머니를 열었다. 혹여 논란이 있을까 봐 심사를 맡은 고승이 나선 것이다.
주머니 속에 꾸깃꾸깃 접힌 종이를 펼친 고승이 큰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나 최승우는 고려 학관에 와서 최언위와 처음에 신라를 어찌 대하는 것이 옳은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벌어지는 고려 사람들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신라를 어찌 대해야 하는가?’를 시제로 제시하겠다. 이러면 이 대결의 처음과 끝이 이어져 가지런히 마무리될 것이다.
별 특별할 것이 없는 말이라서 심사를 맡은 고승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고려 쪽 문관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최언위가 최승우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당, 당신…….”
그러자 최승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주머니 속에 든 내 요구사항이 과연 무리한 것입니까? 내가 방금 한림원령과 대결할 때 한림원령이 시제를 제시했으니 이제는 내가 시제를 제시할 차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맨 처음에 우리가 벌였던 논쟁과도 관련이 있는 시제니 수미상관이 이루어집니다. 자 어떻습니까? 한림원령! 그대는 내 요구를 따를 용기가 있습니까? 이곳이 개경인 것을 믿고 무리라고 억지를 부려도 나는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
최언위를 비롯한 고려 쪽 문관들은 모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최승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시제를 자신이 제시하겠다는 최승우의 요구는 합당했다. 거기에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으니 억지를 쓸 수도 없었다.
한쪽에 서 있던 구족달도 약간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구족달은 최언위 쪽을 바라보았는데 최언위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 태도를 보니 내 말이 맞다고 모두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럼 시작합시다.”
최승우는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구족달 역시 약간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붓을 들었다.
먹물이 마르자 학관 하인들이 정자 기둥에 두 사람의 글씨를 걸었다.
구족달은 수덕막여자(樹德莫如滋)란 글귀를 썼다.
최승우는 탕동멸진(蕩東滅眞)이란 문장을 썼다.
그것을 본 심사를 맡은 고승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구족달? 한 번도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인데 대단하군.”
“놀라운 솜씨다.”
별 이름도 없고 관직도 낮은 구족달의 글씨를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승우와 비견되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능가했다고도 볼 수 있는 놀라운 필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심사를 맡은 고승들은 최승우의 지략에도 놀라고 있었다.
“백제 예부령이 괜히 주머니가 열리면 사람들이 감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것이 아니었군.”
“만만치 않은 강적을 예부령이 지혜로 물리쳤습니다. 허허”
한쪽에 앉아 있는 나도 고승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으며 정자기둥에 걸린 두 사람의 글씨를 보고 비로소 최승우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괜히 최승우가 시제 제시에 집착한 것이 아니었어.”
나도 가볍게 탄식했다. 내 곁에서 배수현도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우리 고려 사람이 쓴 글씨 뜻은 덕을 계속 쌓자는 의미 아니야? 그런데 글자는 잘 쓴 것 같긴 한데 글씨의 위엄이 너무 넘치네.”
서예에 대해 잘 모르는 배수현도 약간은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왕건 치하 고려는 신라에 대해 온건 노선을 취하고 도와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에 구족달은 덕을 쌓자는 글귀를 썼다.
그런데 구족달의 서체는 매우 힘이 넘치고 장중해서 글귀의 내용과 살짝 어긋나는 듯했다.
신라에 대해 부드러운 자세를 강조하는 왕건의 뜻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최승우의 서체 역시 매우 굳건하고 힘이 넘쳤지만 그의 경우에는 동쪽 신라를 치고 진골을 멸하자는 내용이라서 서로 어울렸다.
그리고 최승우는 정자 밖까지 나와서 구족달의 작품을 한참 들여다보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역시나 구 학사의 굳건한 구양순체는 일품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예 명가라 할지라도 모든 서체에 능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구 학사가 김생처럼 모든 서체에 능하면 몰라도 구양순체만 능하니 결국 제 승리 아닙니까?”
최승우의 말을 듣고 심사를 맡은 고승과 학자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구족달의 글씨는 서체와 그 내용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결국 최승우의 글에 미치지 못했다.
억지로 고려 편을 들고 싶어도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결국 예부령께서 이기셨소.”
심사를 맡은 고승과 학자들은 최언위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선포했다.
“그대는 우리 쪽에서 구족달, 구 학사를 내보낼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군.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최언위는 이를 갈며 물었다. 원래 최언위는 구족달의 솜씨면 최승우를 이길 줄 알고 이 모든 일을 꾸몄다.
그리고 처음에 최지몽 등이 질 줄 알면서도 짐짓 최승우와 대결한 것도 자연스럽게 막판에 구족달을 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니 최승우가 모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처음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짐짓 신라와 관련된 주제로 말싸움을 벌인 것까지 다 최승우의 계산이었다.
“내 솜씨를 아는 한림원령께서 선뜻 이 대결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무슨 계획이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조사를 좀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사를 했는지는 안 밝히겠습니다.”
최승우는 견훤의 모사로서 고려 내에 세작들을 보내놓고 정보망도 가동시키고 있었다. 이를 통해 끝내 구족달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번 대결에 나선 것이다.
뿐만아니라 구족달이 강한 기세의 글씨를 쓰는 것은 능하지만 다른 서체는 미흡하다는 것까지 간파하고 꾀를 썼다.
“…….”
최언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정보수집 능력이나 지략에서 이번만큼은 완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승우는 정자기둥으로 걸어서 구족달의 글씨를 떼어내며 말했다.
“내가 이 대결에서도 이겨서 구 학사의 글씨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얻은 가장 값진 전리품입니다. 허허허.”
자신의 글씨를 가져가는 최승우를 구족달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족달로서는 실력으로 패한 것이라기보다는 최승우의 간계에 당한 것이라 몹시 비통했다.
“하아. 이것 참.”
한쪽에서 고려의 대내학사 김악은 끝내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내를 둘러보며 정자 위에 선 최승우가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최승우는 단순히 서예대결을 하러 온 것이라기보다는 고려 내부를 흔들 여론전을 하러 온 것이라 연설까지 하는 것이다.
“뭐 김생이나 최치원이 살아 돌아오면 몰라도 당금 삼한 땅에서 나를 서예로 이길 사람은 없을 것이니 오늘 고려가 패한 것이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백제국은 공산에서 그 무위를 떨쳐 귀국에 보여드렸습니다. 오늘 이곳에서의 한판승부로 백제가 문으로도 고려보다 우위에 섰다는 것을 만천하에 입증했습니다. 그런 만큼…….”
최승우는 신이 나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저런 나쁜 놈! 당장 군사들을 동원해서 끌어내야 해!”
내 곁에서 격분한 배수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려가 서예 대결에서 패하는 것을 본 학관 학생들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심사를 맡아준 고승들이나 학자들도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마 이들의 입을 통해 오늘 있었던 대결은 삼한 전체로 소문이 퍼질 것이다.
결국 백제는 한동안 더 기세를 떨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심경이 복잡했다.
‘어쩌면 지금 이 고려에서 최승우를 서예로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한 명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나선다면 잘하면 최승우를 이길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승우가 꾀를 써서 구족달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문득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만 문제는 내가 나서는 것이 과연 나에게 유리하냐는 건데. 아마 이번에 내가 나서서 최승우를 꺾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단번에 삼한 전체에 내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된다.’
오늘은 대결은 삼한 땅의 고승이며 학자들이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활약하면 그들 사이에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여태까지 내가 몇몇 사건을 해결했다고는 해도 아는 사람만 알았다.
그러나 이 서예대결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큰 사건이었다.
‘내가 이기기만 한다면 일약 고려 내에서 나 자신의 체급을 올리겠지. 그러면 나와 정윤이 연결되는 것을 꺼리는 유긍달과 황보제공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혼사를 막아줄 확률이 높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활약하는 만큼 왕건도 나를 며느리로 만들려고 애를 쓸 거라는 건데. 에잇, 모르겠다. 질러보고 생각하자. 어차피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야. 끝까지 가보자!’
마음속으로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서 나는 벌떡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야! 왜 그래?”
내 곁에 앉아 있던 배수현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저 백제인을 혼내주려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배수현에게 대답을 해주고 성큼성큼 정자 쪽으로 향했다.
한참 신이 나서 연설을 하고 있던 최승우는 갑자기 내가 걸어 나오자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학생이 갑자기 왜 나왔나?”
최승우가 나를 보며 물었다.
“예부령의 말씀 중 틀린 부분이 있어서 지적하러 나왔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디가 틀렸다는 거지?”
“김생과 최치원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예부령을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이 틀렸습니다. 이곳에 예부령을 서예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게 누군가?”
“저요.”
내가 내 가슴을 한번 툭 치며 말했다.
“이보시오. 한림원령. 어서 의원을 부르십시오. 이 추운 날 괜히 학생들까지 동원해 너무 길게 서예대결을 벌인 것 때문에 한 학생의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습니다.”
최승우가 짐짓 호들갑을 떨며 정자 안의 최언위를 바라보며 외쳤다.
“연우 아가씨. 어서 들어가십시오.”
최언위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는 반드시 최승우를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 소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말을 듣고 최승우는 어이가 없는지 나를 보고 물었다.
“상산백의 딸, 임연우라고 합니다.”
“서예 쪽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무지 듣지를 못했는데. 최지몽 등이야 나보다는 못해서 그 학문으로 어느 정도 명성이 있으니 대결을 해준 거고. 학생은 공부나 더 하시오. 아, 여기가 고려땅 이라는 것을 이용해 수많은 고려 사람들이 내가 아예 지칠 때까지 서예 대결을 해서 이기려는 것인가?”
최승우가 상당히 매몰차게 말했다.
“예부령께서 저와 한 번만 대결에 응해주시면 저는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최언위를 비롯한 고려 문관들은 매우 난감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나를 말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내가 워낙 고집을 부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대내학사 김악이 문득 입을 열었다.
“연우 아가씨는 기이한 꾀가 많은 분이라 들었습니다. 예부령께서 한번 대결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