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3화 (2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3화

23. 조계박압

“뭐 무장들처럼 검술을 겨루는 것도 아니니 최지몽 공의 부탁을 들어드려도 무방하긴 할 것입니다. 검술을 겨루면 체력이 소진되지만 서예대결을 할 때는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그래도 내가 고려의 여러 문관 분들과 홀로 대적하는 셈이니 약간은 손해를 보는 셈인데. 나에게도 뭔가 혜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승우가 그리 말하자 최지몽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부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그러자 최승우는 소매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말했다.

“이 안에 내가 바라는 바가 적혀 있습니다. 내가 원할 때 이 주머니 속에 적혀 있는 요구사항 하나를 무조건 들어주면 됩니다.”

최승우의 말을 듣고 최지몽이 약간 난감한 기색으로 최언위 쪽을 바라보았다. 최승우의 요구가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언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걸음 나서서 말했다.

“아니 그 주머니 안에 뭐가 들어 있을 줄 알고 우리가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주머니 안에 나더러 죽으라고 적혀 있거나 혹은 무조건 예부령이 이겼다고 인정하라고 적어놓았으면 어찌합니까?”

“내가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대, 이 주머니 안에는 절대 그런 무리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무리한 요구가 적혀 있으면 들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오늘 이 개경에 온 것은 우리 백제국의 위엄과 지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 주머니가 열리는 순간 장내에 모인 모두가 나에게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최승우가 좌중을 둘러보며 호언장담을 했다.

* * *

“우와! 저 백제인은 말을 잘한다. 무슨 약장사 같아. 저 주머니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저럴까? 학관에 오기 전에 주머니 안에 미리 뭔가를 적어 놓았을 텐데. 그게 뭐길래 저러지?”

내 곁에서 배수현이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졸고 있다가 최승우가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하니 흥미진진한 기색이었다.

“확실히 궁금하긴 하네.”

나도 그런 배수현의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최승우가 주머니 타령을 하니 진짜 궁금하긴 했다.

‘나마저 이런 호기심이 들 정도면 최언위가 최승우의 저 제안을 안 받을 수 없겠군. 이제 와서 저 제안을 거절해 버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최승우와의 대결을 회피하는 인상을 주거든. 다만 최승우가 뭔가 꿍꿍이 속이 있어서 저러는 건데. 저걸 또 받아주기에도 찜찜하고.’

나도 최승우가 던진 제안을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마 최언위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 * *

“흐음.”

최언위는 턱을 쓰다듬으며 몹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뭐 한림원령이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주머니는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굳이 최지몽 공과도 대결하지 않겠습니다. 한림원령과 바로 겨루도록 하지요.”

최승우가 자신의 소매 속에 도로 주머니를 집어넣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앗.”

그러자 주변에서 구경하는 고승들과 학자들이 약간은 안타까운 소리를 내었다. 이 사람들도 최승우가 저 안에 뭐라 적어놓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학관에 초대된 고승들이나 학자들의 여론을 살피며 멋지게 고려의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최언위에게는 부담스러운 반응이었다.

“좋습니다. 예부령의 제안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주머니 안에 무리한 요구 사항이 적혀 있다면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최언위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합시다. 하하하.”

최승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켜 서탁에 놓인 붓을 들었다.

“그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최지몽 역시 긴장된 기색으로 붓을 잡았다.

“최지몽 공이 사천관으로서 고려의 천문을 살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제를 ‘일월성신’으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승우가 불쑥 그런 제안을 했다. 글을 짓거나 시를 지을 때는 어떤 주제로 지을 것인지 시제를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그러나 서예 대결에는 이 시제를 던지는 문제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최지몽은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쓴 글씨의 먹물이 마르자 학관의 하인들이 종이를 들어 정자 기둥에 걸었다.

정자 밖의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최승우는 ‘성회상천(星回上天)’이란 글귀를 썼다. 최지몽이 쓴 문장은 ‘대해낙월(大海落月)’이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본 순간 내 곁에 있던 배수현이 중얼거렸다.

“어떡해! 백제 사람 글씨가 더 잘 쓴 것 같아.”

배수현 같은 소녀가 봐도 고하가 가려질 만큼 최승우와 최지몽의 필력 차이는 명확했다.

“사천관은 우리보다 겨우 2~3살 많아. 당연한 일이지.”

나는 안타까워하는 배수현에게 그리 말했다. 최지몽은 훗날 엄청난 명성을 떨치지만 지금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당나라에 유학까지 가서 학문을 닦은 최승우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심사를 맡은 고승들과 학자들도 한목소리로 판정을 내렸다.

“예부령이 이겼습니다.”

최지몽은 공손히 읍을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하하, 이 대결에서 내가 이겼으니 사천관의 글씨는 내가 전리품 삼아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대결을 기념해서 내 글씨와 고려 문관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하나 만들고자 합니다.”

기세가 오른 최승우는 웃으면서 자신의 글씨와 최지몽의 글씨를 챙겨 자신의 종자에게 건넸다.

그다음으로 나선 사람은 고려의 대내학사 김악이었다.

“저도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번에는 어떤 시제로 글을 쓸 것인지 김 학사께서 제시하십시오.”

최승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지몽과 대결할 때는 최승우가 시제를 제시했으니 이번에는 고려 쪽 차례라는 것이다.

“충효에 관해 써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악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리 말했다. 그리고 최승우과 김악은 역시 일필휘지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김악도 왕건을 바로 곁에서 보좌할 만큼 젊고 실력 있는 학자였다. 하지만 역시 최승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사를 맡은 고승들은 이번에도 최승우의 손을 들어줬다.

“아니 우리 편이 계속 지고 있어. 어떻게 하지.”

흥분한 배수현이 발까지 굴러가며 안타까워했다.

“어차피 스승님과 최승우의 대결이 중요한 거고 그 전에 있는 대결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나는 배수현을 그렇게 달랬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역시나 이 시대는 유학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현대에도 학문을 닦는 데 있어서 유학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그나마 인터넷이며 정보를 구할 경로가 많아서 국내에 있어도 엄청난 노력을 하면 격차를 줄일 가능성이 있긴 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인터넷도 없고 책을 구하기도 힘드니.’

젊은 시절 당나라에 가서 공부한 최승우의 기량을 유학 경험이 없는 학자들이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결국 최언위만이 최승우를 상대할 만했다.

그사이 정자 안에서는 3번째 서예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 내봉경 최응이 최승우와 겨루었다.

하지만 역시나 승자는 최승우였다. 다만 최응의 솜씨에는 최승우도 몹시 감탄한 것 같았다.

“정말 당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내봉경 같은 인재는 진작 유학을 갔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중국의 당나라도 망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전쟁이 계속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공부 좀 하겠다고 유학을 갈 형편이 아니었다.

어쨌든 모두가 예상한 대로 다른 고려 문관들은 최승우에게 모두 패했고 최언위만 남았다. 최언위가 몸을 일으키자 장내가 고요해졌다.

오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학관에 모인 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됐기 때문이었다.

신라삼최로서 수십 년간 명성을 떨쳐왔고 왕건과 견훤을 각각 보좌하는 두 대학자의 대결에 모든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림원령께서 시제를 제시하십시오.”

최승우는 태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제는 고려 쪽이 시제를 제시할 차례였다.

“우리 각자가 모시는 주군의 위업에 관한 문장을 씁시다.”

잠깐 고민하던 최언위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즉시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이윽고 학관 하인들이 두 사람의 글을 정자 기둥에 걸였다.

최언위는 ‘조계박압(操鷄搏鴨)’이란 문장을 썼다.

최승우는 이에 맞서 ‘괘궁어평양지루 음마어패강지수(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라 적었다.

모두 왕건과 견훤의 위업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만 내 곁에서 배수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제 사람이야 서경에 자신의 활을 걸고 말에게 서경의 물을 먹인다는 의미니 광오하긴 해도 견훤을 칭송하는 게 맞긴 해. 서경까지 간다는 의미잖아. 그런데 조계박압은 닭을 쥐고 오리를 때린다는 의미인데 저게 어떻게 우리 폐하를 칭송하는 글이 되지?”

“닭은 신라를 상징하는 동물이고 오리는 압록강을 뜻하는 거야. 압록강의 압(鴨)이 오리 압자잖아.”

내가 곁에서 일러주었다.

그래서 훗날 왕건이 이룬 업적을 기려서 그를 조계박압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왕건은 신라를 굴복시키고 고려 왕실의 후예들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업적을 매우 소박하고 간단하게 비유한 멋진 구절이었다.

“아하. 어쨌든 내용도 좋고 글씨도 다 좋으니. 아마 스승님께서 이기시겠지.”

배수현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최언위나 최승우나 엄청난 서예명가이기 때문에 내 눈으로 봐서는 도무지 그 차이가 안 느껴졌다. 둘 다 엄청난 필력을 가졌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정확한 평을 보려면 전문가들을 봐야지.’

그래서 나는 심사를 맡은 고승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상황이 몹시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정자에 걸린 글씨를 보던 고승과 학자들이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최언위가 이겼으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는데. 아니 이곳이 개경인 만큼 두 사람의 실력이 엇비슷하기만 해도 최언위의 손을 들어줄 것인데. 전문가들의 눈으로 볼 때 그럴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제일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 최승우는 왜 최언위를 상대할 때 주머니를 연다고 하지 않았지?’

나는 분명 최승우가 강적인 최언위를 상대할 때 주머니를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머니를 끝내 열지 않고 최승우는 최언위를 상대한 것이다.

그리고 정자 안의 최승우도 웃으면서 말했다.

“본디 한림원령께서는 젊은 시절 당나라에 공부를 하실 때부터 서예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경전을 읽고 연구하는 것에 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서예로 겨루기로 했으니 내가 이득을 거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자기가 이겼다고 최승우가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장안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우리들이 득난 귀족 자제라 해도 항상 궁핍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대가 붓을 들어 글씨를 써서 팔아서 술을 사 왔습니다. 그걸 또 유학생들이 신나게 나눠 먹었습니다. 그때도 우리 두 사람의 서예 실력에는 격차가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합니다. 허허허.”

최언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우리가…….”

곁에서 그 말을 듣던 배수현이 놀라서 신음소리를 냈다. 학관의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언위의 말은 사실상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스승이 패했다고 하니 학관 학생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승우와 최언위의 대화를 듣는 심사를 맡은 고승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엄청난 차이는 아니었으나 전문가가 보기에는 확실히 최승우의 필력이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최승우는 웃으면서 자신과 최언위의 글을 거두면서 말했다.

“자 그럼 오늘의 대결은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최언위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패하긴 했으나 아직도 우리 고려에는 그대와 겨룰 만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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