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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2화 (2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2화

22. 서예 대결

최승우가 도착하기 전까지 3일간은 진짜 전생, 현생 다 합쳐서 내 기억에 길이 남을 것 같았다.

‘진짜 토할 것 같다. 똑같은 글을 대체 몇 번 읽은 거야?’

학관의 학사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장수왕에게 사로잡힌 개로왕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부분을 반복적으로 낭송시켰다.

독서를 좋아하는 편인 내가 이 정도니 배수현이나 다른 학생들은 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젯밤에는 진짜 개로왕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꿈에 나왔어. 차라리 빨리 최승우가 와서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

배수현이 피곤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것만큼은 나도 동감이었다.

“최승우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어. 왜 굳이 학관에 온다고 해서.”

“맞아. 백제인들은 정말 매사에 도움이 안 돼. 킥킥”

배수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어쨌든 시간이 가긴 갔다. 그리고 최승우가 학관을 방문하는 당일이 되자 분위기가 범상치 않긴 했다.

한림원령 최언위야 원래 학관도 관리하고 있으니 익숙했지만 평소에는 보지도 못했던 고려의 고위 문관들이 속속 학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들어올 때마다 학관 문지기가 그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외쳐서 나는 누가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사천관 최지몽 공이 들어오십니다.”

“내봉경 최응 공이 도착하셨습니다.”

“대내학사 김악 공도 오셨습니다.”

속속 들리는 이름들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도 최승우에게 맞서서 내보낼 수 있는 이름 있는 문관들은 다 보내려고 하는군. 평소에 항상 왕건 곁에 붙어서 자문을 하던 대내학사 김악마저 나왔군.’

아마 왕건이 이번에 반드시 최승우를 꺾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모양이다.

급한 표정으로 학관에 들어온 이들은 한림원령 최언위 쪽으로 달려가 쑥덕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최승우를 상대할 것인지 논의하는 모양인지 표정이 하나같이 심각했다.

거기에 오늘 학관에 들어오는 것은 고려의 문관들뿐만이 아니었다.

최언위와 최승우가 한판 붙을 확률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각지의 고승들이며 학자들도 속속 학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는 승려들도 매우 중요한 지식인들이었다.

언뜻언뜻 들리는 이름이 모두 상당한 명성이 있는 거물들이었다.

‘싸움구경이란 게 확실히 재밌긴 재밌나 봐. 평소 같으면 쉽게 모이지도 않을 사람들이 많이 달려왔군.’

지금 삼한 땅의 유력한 학자, 문인, 고승들의 상당수가 개경 학관으로 속속 들어오는 것이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학관 하인들은 미리 준비된 자리로 그들을 안내했다.

‘옷에 먼지가 묻은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삼한 땅의 거물들이 집결하니 나도 약간은 긴장이 되긴 했다.

‘아버님이 왜 이 대결에 그리 신경을 썼는지 알겠군. 이 사람들 앞에서 고려 측 문관들이 참패하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주긴 할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하인 하나가 뛰어 들어와 교실을 담당하던 학사에게 뭐라고 말을 전했다.

그러자 학사는 긴장된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십시오. 천천히 낭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바로 지난 3일간 연습했던 개로왕이 참수당하는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이걸 읽으라고 시킨다는 것은 곧 최승우가 온다는 의미겠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지금 백제 최고의 학자이자 모사라고 할 수 있는 최승우의 모습을 볼까 싶어 곁눈질로 교실 밖을 내다보았다.

* * *

그리고 곧 몇몇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자주색 관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관복이 미묘하게 고려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최승우다!’

나는 그렇게 한눈을 팔면서도 3일간의 연습 덕에 조금의 흔들림 없이 글을 읽어내려갔다.

* * *

“족하! 실로 오래간만에 이리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언위가 웃으면서 직접 나와 최승우를 맞이했다.

“당나라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허허. 이렇게라도 만나니 기쁩니다.”

최승우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낯으로 최언위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더니 최승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글을 낭송하는 교실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둘러보았다.

나와 학생들은 이미 최승우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들어오자 바짝 긴장한 상태로 글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고려의 학생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살피던 최승우가 최언위에게 말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입니까?”

“뭐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학생들에게 이 부분만 능숙하게 읽을 수 있도록 수없이 연습을 시켰을 것 아닙니까? 그 때문에 학생들이 오히려 학문에 흥미를 잃을까 걱정이 됩니다.”

최승우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예리한 면이 있었다.

고려 측이 일부러 개로왕이 참수당하는 부분을 낭송하는 걸 눈치챈 것이다.

“허허허. 그럼 학생들도 한번 둘러보셨으니 정원에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봅시다.”

최언위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학생들의 낭송을 중단시키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최언위, 최승우 두 사람이 학관 중앙에 있는 정원을 향해 걸어가자 학생들도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 교실을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걸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대결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나나 학생들도 모두 똑같았다.

* * *

개경 학관의 한쪽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유력 호족들의 자제가 다니는 학교인 만큼 공부하다가 학생들이 힘들 때 둘러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정원 한가운데는 정자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최언위와 최승우는 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 정자 안에는 이미 고려의 문관들이 긴장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구경꾼들을 위한 자리는 정자 주변에 마련되어 있었다. 정자 주변에 학관 하인들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는 구경꾼으로 온 고승이며 학자들이 앉아 있었다.

나나 학생들도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스승님이 꼭 최승우의 콧대를 꺾어놔야 할 텐데.”

배수현이 내 옆에 앉아서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그래야지.”

그러나 나도 누가 이길지 확실할 수 없었다. 이 대결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이었다.

거기에 확실히 최승우는 대단한 걸물이라 꼭 최언위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배수현과 잠깐 잡담을 나누는 사이 정자 안에 들어가 착석한 최언위와 최승우는 본격적인 말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백제가 무도한 신라를 방벌하고 삼한 땅을 안정시키려는데 귀국에서 이 큰 이치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바람에 죄 없는 군사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최승우가 먼저 대뜸 입을 열었다.

“신라를 방벌하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나 그대나 한때는 신라를 섬기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백제 군사가 서라벌에 들어가 신라 국왕을 살해하고 그 왕비를…….”

이번에 백제군이 서라벌에 들어가 저지른 만행을 규탄하며 최언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최승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라가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억지로 삼한을 일통한 지 200년. 그러나 신라는 백성들을 위해 덕을 쌓은 것은 없고 오로지 악업만을 쌓았을 뿐입니다. 신라 진골들끼리 백성을 돌보지 않고 서로 내전을 벌인 것이 100여 년입니다. 우리 백제국이 백성들을 위해 그런 신라를 심판한 것뿐입니다.”

“백제국이 신라를 치며 그 무고한 백성들도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1만이 넘는 백제군이 약탈을 했는데 백성들이 상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못 하실 것입니다.”

최언위가 겨우 분을 삼키며 대답하는데 최승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시대를 변하게 해야 합니다. 그대나 나나 결국 신라가 쇠락하고 세상이 변해서 예부령이며 한림원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라가 그대로 있었다면 우리 같은 6두품들이 이리 나라의 대표로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최언위는 약간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확실히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하에서는 최언위 본인도 고려에서 받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최언위가 말싸움에서 그대로 질 수 없어서 입을 열려고 하는데 최승우가 소매를 저어 그 말을 끊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끼리 며칠 동안 토론을 해도 결판을 못 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림원령과 대결을 한다고 소문을 내서 사방에서 이리 고승이며 학자분들이 달려오셨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의 말싸움을 보겠다고 오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 어린 학생들도 우리의 하나 마나 한 말다툼을 들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말싸움은 관두고 시원하게 사람들이 기다리던 대결을 해봅시다.”

최승우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짝짝짝.

“그 말은 확실히 옳소!”

그러자 주변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신라를 두고 최언위와 최승우가 벌인 말싸움이 재미가 없긴 한 모양이었다.

“어 웬 박수소리가? 연우야 벌써 대결이 끝났어?”

그리고 내 곁에서 배수현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입가에 흘러내린 침 자국이 보였다.

‘그사이에 졸고 있었냐? 나만 흥미롭게 들은 모양이군.’

나야 현대의 역사학도로서 최언위와 최승우의 견해 차이가 흥미로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 끝났어. 이제 재밌는 대결이 시작될 것 같아.”

나는 배수현에게 그리 말하며 정자 안의 상황을 살폈다. 사실 고려 상산백의 딸로서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최승우의 기세에 최언위가 밀리고 있다. 단신으로 들어온 최승우가 뭔가 주도권을 잡고 화제를 주도하고 있어. 역시 외부 정세가 불리해서 최언위가 영향을 받는 것인가?’

지금 고려는 공산 전투 이후 백제에게 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이러니 아무래도 고려 문관들은 기가 죽고 너무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묘하게 밀리는 분위기를 최언위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짐짓 호기롭게 최언위가 외쳤다.

“좋습니다. 한번 대결을 해봅시다. 무엇으로 대결을 하려고 합니까?”

“서예의 재간을 겨루어봅시다. 시짓기나 다른 재간을 겨루면 우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누가 이겼는지 판가름하기도 난감합니다. 서예의 필력이야 한눈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각자가 글을 써서 이 정자의 기둥에 걸어놓고 정자 밖의 분들에게 평가를 청합시다. 밖에 계신 분들은 삼한 땅에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니 이곳이 개경이라고 해서 고려의 편을 들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최승우가 시원시원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자 밖에 앉아 있는 여러 고승들이며 학자들을 보면서 말을 했다.

공정한 심사를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예부령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예 같은 대결에 있어서 우리들은 개경에서든 완산주에서든 공평하게 판단을 내릴 것이오.”

정자 밖에서 구경하는 고승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하긴 저 사람들이야 이기는 쪽에 붙으면 되니 속이 편하긴 하지.’

이 시대에는 승려들이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실제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고 나서 백제 지역 고승들도 모두 좋은 대우를 받지. 아마 견훤이 통일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서예 대결의 심판으로 고승들이 나선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승부를 가리기 애매한 수준만 돼도 여기가 개경이니만큼 아무래도 고려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자 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동안 가만히 있던 고려 사천관 최지몽이 벌떡 일어서더니 말했다.

“예부령께서는 백제 땅에 계시니만큼 쉬이 얼굴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소생 최지몽이 먼저 예부령과 한번 겨루어보고 싶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소생의 평생에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서 한번 주제넘게 나서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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