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화
20. 간식
나는 구정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생전 처음 보았다. 거기에 배수현도 나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유명한 저 박술희군.’
우적우적.
박술희는 학생들을 기다리며 쉴 새 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메뚜기를 말려서 튀긴 것이었다.
메뚜기뿐만 아니라 다른 곤충 튀김들도 열심히 먹고 있었다.
‘박술희는 온갖 것을 안 가리고 다 먹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진짜였군.’
진짜 고려시대 역사가들도 너무 신기해서 분명 그것을 적어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박술희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박술희는 또한 지금 고려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장이라 할 만하지. 삼한 통일과정에서도 공이 컸고. 괜히 고려의 날고 기는 호족 자제들이 모여 있는 학관에서 격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야. 문을 한림원령 최언위가 가르치는데 무도 그에 비견되는 사람이 가르치긴 해야지.’
그러나 온갖 곤충이 박술희 입에 들어가는 것을 보다 보니 나는 기분이 이상해서 마침내 그것을 외면했다.
다른 학생들 중에도 몇몇은 나와 같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차마 박술희가 기이한 간식(?)을 먹는 것을 못 보고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많았다.
박술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곤충튀김을 먹으며 말했다.
“격구수업 준비를 군졸들이 하고 있으니 모두 좀 기다리며 쉬도록 하십시오.”
구정 한쪽에서 학생들이 격구 수업을 할 수 있게 군졸들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귀족학교라서 이건 좋군. 아니었으면 우리들이 직접 수업준비를 해야 했을걸.’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배수현과 정윤파 소녀들과 함께 한쪽에 앉았다. 딱 주변을 둘러보니 학관 학생들의 모습이 곧 고려의 축소판 같았다.
‘여자아이들만 놓고 보면 유설란과 황보인혜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소녀들의 숫자가 가장 많고 그 외에도 파벌에 따라 아이들이 나뉘어 앉아 있군. 참 이런 건 귀신같이 반영이 된다는 말이야.’
좀 똑똑한 사람이 오면 학관 학생들이 어떻게 앉아 있는지만 보고도 현 고려의 정치구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렇게 주위를 살펴보는 내 눈에 특이한 모습이 하나 보였다.
‘쟤는 뭐야? 진짜 왕따야? 귀신 취급 받는 내 곁에도 배수현이 있는데.’
웬 소년 하나가 주변에 아무 친구도 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이거야 이 소년이 친구가 없다고 쳐도 옷차림이 참 묘했다.
‘옷차림이 상당히 남루하군. 아니 개경의 학관에서 한림원령 최언위의 가르침을 받을 정도면 보통 가문 사람이 아닐 텐데.’
학관에 자제들을 입학시킬 수 있는 호족은 대개 상당한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력이 미미한 호족들은 아예 받아주지를 않았다.
그런데 혼자 앉아 있는 소년은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가만히 보다 보니 낯이 익었다.
‘그래! 내가 학관에 온 첫날 신발을 뺏겨서 놀림을 받고 있던 그 아이야. 키가 약간 작은 것을 보니 더 확실하게 기억이 나네.’
나는 조심스럽게 내 곁에 앉아 있는 배수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참 나를 정윤비로 간주하고 잘 대해주는 배수현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어볼 데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공주들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 배수현이었다.
“쟤는 대체 누구니? 왜 혼자 있어? 우리라도 끼워줄까?”
내가 슬쩍 말하자 배수현이 손사래를 쳤다.
“김장명 쟤는 혼자 있게 놔둬야 해. 쟤는 명주에서 왔어. 명주도독을 칭하는 김순식의 아들이야. 가까이하면 곤란하지.”
“오호.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눈빛으로 김장명을 바라보았다. 김순식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니 왜 학관학생들이 저 아이를 경원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김순식이라. 이걸 이용해서 한번 판을 흔들어봐?’
지금 상황에서 내가 결혼이란 덫에서 빠져나가려면 나와 상산의 체급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놀란 유긍달, 황보제공 등이 위협을 느끼고 차라리 나와 정윤의 혼사를 파투를 내는 게 이득이라 생각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사이에 이 결혼과 왕위계승 경쟁이란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자는 것이 나와 임희가 세운 큰 전략이었다.
‘그런데 학관에 쓰기 딱 좋은 패가 하나 있었군.’
나는 쓸쓸한 표정으로 혼자 앉아 있는 김장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수업을 시작합시다.”
박술희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장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이라서 그런지 목소리도 진짜 컸다.
어느새 곤충 튀김은 다 먹었는지 박술희 손에는 격구채가 들려 있었다.
* * *
“그럼 나는 저기에서 애들이랑 경기를 뛸게. 너는 연습 잘해.”
배수현이 약간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응. 그래 잘 다녀와.”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격구를 배우는데 학관 학생들 사이에도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박술희는 실력에 따라 패를 나누었다.
진짜 말도 잘 타고 격구에 능숙한 사람들은 마상 격구를 시켰다. 이 정도 수준의 실력자는 학관 내에서도 드물었다.
말은 못 타지만 격구를 좀 해본 사람들에게는 도보격구를 시켰다.
격구란 것이 말을 타고 여는 경기가 가장 인기도 많고 중요하긴 해도 실질적으로 학관 아이들 수준에 가장 적합한 것은 말을 안 타고 하는 도보격구였다.
배수현도 이 도보 격구를 하는 패에 속했고 학관 아이들 대다수가 여기에 들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뭐 여러분들은 제가 직접 봐드릴 겁니다. 사실 군사훈련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머리가 있고 잘하는 군졸들은 굳이 지켜보지 않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도 잘 굴러갑니다. 장수들이 살펴야 되는 건 말귀를 좀 못 알아듣는 부류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나중에 이 고려를 이끌 사람들이니 잘 알아두세요.”
격구를 잘못하는 학생들을 모은 박술희가 일장연설을 했다.
박술희는 자기 지론대로 격구를 좀 하는 학생들은 알아서 두 패로 나뉘어 경기를 하게 시키고 그걸 보지도 않고 이쪽으로 온 것이다.
나도 상산에서 학문은 닦았어도 격구를 해본 적은 없어서 여기에 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격구 자체가 이 시대에나 인기 스포츠지 나는 하등 재미를 못 느낀다고.’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힐끗 옆쪽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김장명 역시 격구를 잘하지 못하는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학관 학생들 사이에 끼지를 못하니 설사 격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경기에 낄 수는 없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박술희는 직접 격구채를 들고 시범을 보였다.
“자 여러분들은 우선 제자리에 서서 이 공을 쳐서 구멍에 넣는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격구 규칙에 따라 이리저리 뛰는 것은 그 이후에 연습해야 합니다. 자 잘 보십시오.”
그러더니 박술희는 툭 격구채로 공을 쳤다. 그러자 공이 자연스럽게 굴러가 구멍에 들어갔다.
‘오늘날로 따지면 골프와 비슷하군. 간단해 보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술희가 워낙 쉽게 공을 쳐서 구멍에 넣기도 해서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젠장 현대의 골프채나 골프공과는 달리 이 시대 격구채는 너무 조악하게 만들어졌어. 내가 정확히 공을 쳐도 그래도 안 굴러간다고. 공도 나무로 만들어서 이상해. 현대인이라서 이런 조악한 기구에는 적응이 어려워. 그나마 공은 내가 안 주워와서 좋군. 귀족학교라서 하인들이 대신 공은 주워서 가져다주니.’
나는 내가 아무리 쳐도 구멍에 제대로 안 들어가는 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옆의 몇몇 학생은 운이 좋았는지 공을 구멍에 넣기도 했다.
내가 약간 초조해할 때 뒤에서 박술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을 제대로 못 넣는 학생은 내가 조만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저녁을 거하게 차려드리죠. 나는 군사훈련을 할 때도 진도를 제대로 못 따라잡은 군졸들을 혼내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다독이죠. 식사를 같이하며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 해결됩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허허허.”
박술희는 호탕하게 웃으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젠장, 박술희와 저녁식사?’
내 뇌리에 문득 곤충튀김을 열심히 먹던 박술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갖 것을 다 먹었다는 박술희에 관한 역사기록도 자연스럽게 함께 스쳐 지나갔다.
‘안 돼. 박술희와 저녁식사라니.’
나는 아예 이를 악물고 격구채를 단단히 쥐고 더 신중하게 공을 쳤으나 여전히 공은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김장명의 존재도 잊고 진지하게 격구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그때 나는 주변이 뭔가 어수선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슬쩍 돌아보니 박술희에게로 한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낯이 익은 한림원의 학사였다. 한림원령 최언위가 수업을 안 할 때 학관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아니 그런데 최언위만큼은 아니라도 저 사람도 한림원에서 지위가 꽤 높을 텐데 직접 달려온다고? 그리고 표정도 왠지.’
한림원 학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박술희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귓속말로 한참을 박술희와 수군거렸다.
어느새 나는 격구채에 지팡이처럼 기댄 채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박술희가 학생들과의 저녁 식사를 신경 못 쓸 수도.’
나는 그런 기대감을 갖고 박술희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내가 박술희와의 저녁식사에 당첨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는데 반전의 기미가 보이는 것이다.
한참 학사의 귓속말을 듣고 있던 박술희는 점점 흥분하는 기색이더니 마침내 외쳤다.
“이런 개 같은 놈들!”
박술희가 대뜸 험한 말을 내뱉었다. 박술희가 특유의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니 주변의 학생들이 모두 격구연습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험험, 연습은 중단하십시오.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박술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군졸들을 시켜 마상격구, 도보격구 시합을 즐기고 있는 학생들의 경기도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모았다.
“한창 좋았는데 왜 모이라고 하십니까?”
상기된 표정의 학생들이 땀냄새를 풍기면서 박술희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박술희가 입을 열었다.
“피치 못할 매우 중요한 사정이 생겨서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즉시 귀가하도록 하십시오. 내일은 학관에서 수업이 열리지 않을 예정이니 모두 집에 머무르도록 하세요.”
“어 갑자기 왜요? 그럼 내일모레는 나오나요?”
학관이 쉰다는 말에 학생들이 놀라서 물었다.
“음. 그건 아직 안 정해졌습니다. 학관이 더 쉬게 될지 아니면 다시 열지는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을 통해 전해지든지 아니면 학관에서 연통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모두 귀가하세요.”
박술희는 상당히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학생들의 부모들은 다 고려의 대신, 무장 아니면 호족들인데. 그들을 통해 소식이 전해질 수도 있다니. 학관이 쉬는 이유가 나랏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학관 학생들은 박술희의 지시에 따라 흩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격구를 끝낸 것도 아니고 하다 말아서 더 찜찜하네.”
투덜거리는 학생도 있었지만 박술희의 표정을 보고 학생들은 군말 없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상산저에 도착했다. 내 입장에서는 잘 되지도 않는 격구를 안 해서 좋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빨리 아버님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다만 이날은 아버지인 임희뿐만 아니라 오라버니인 임연객마저도 원래 오던 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나마 임희가 먼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지친 표정으로 상산저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