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9화 (1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화

19. 격구

“뭐 연우 너는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이번 일은 이쯤 해서 마무리 짓자꾸나. 단순히 많은 예물을 받았다고 거기에 혹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임희는 나를 보며 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조금의 서운함도 없습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는 황보가에서 준 예물의 양을 보고 마음을 완전히 풀었다.

‘비밀통로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은병을 그만큼이나 주다니. 한 번 더 들어가고 싶군.’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임희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리 말해주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구나. 뭐 충주나 황주 쪽에서도 한동안은 우리나 정윤 전하 쪽을 더 이상 압박하지 않을 거다. 지금은 나랏일이 더 급하니. 나 역시 지금 나랏일이 다급해서 일을 더 키우지 않고 이쯤에서 일을 수습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 고려가 전력을 다해 백제 도적들을 막아야 할 때다. 남쪽의 전황이 심상치 않구나. 우리 군사들이 사벌주에서 견훤에게 연이어 패하고 있다.”

임희는 그 말을 하며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그렇습니까?”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민이 많아 보이는 임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확실히 공산 전투 이후 몇 년간은 견훤이 연전연승하긴 하지.’

공산에서 고려의 5천 병력을 궤멸시킨 백제의 견훤은 그 이후에도 경상도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계속 승리한다.

‘어디 보자 지금도 견훤이 한창 고려군의 보급로를 습격하고 고려의 거점을 함락시키고 있겠군.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5천 병력을 잃었고 이후의 작은 전투에서의 손실까지 합치면 1만 가까운 사상자를 내긴 했겠군.’

당연히 임희나 고려의 귀족들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망하면 왕위계승다툼이고 뭐고 왕건과 그와 혼인동맹을 맺은 호족들은 몽땅 다 견훤 손에 쓸려 나갈 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내부갈등을 크게 키우지 않으려고 이번에 서로 양보한 것이다.

‘역시 미래 역사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마음이 편하군. 이걸 몰랐으면 나도 전전긍긍했을 수도.’

뭐 꼭 역사학도가 아니라 보통 중학생도 결국은 왕건이 고비를 넘기고 이겨서 삼한을 통일한다는 사실은 안다.

‘내가 백제 쪽 호족의 딸로 빙의했으면 근심이 많겠지만 고려 쪽 호족 딸이 됐으니 뭐. 나라의 큰일은 걱정할 필요 없이 결혼만 잘 피해가면 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잠시 머뭇거리던 임희가 나에게 물었다.

“연우 너는 앞으로의 정세를 어찌 내다보고 있느냐?”

“한 2~3년 힘든 고비를 넘기면 결국 우리 고려가 승기를 잡고 끝내 삼한을 통일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인 임희에게는 별다른 계산을 하지 않고 사실대로 내가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허허허, 뭐 내가 우둔했구나. 이 문제만큼은 너야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 그래 가서 쉬거라.”

그러자 임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리 대답했다.

임희의 처소를 나오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까지 내 예측이 계속 적중한 것을 본 아버님마저도 이번에는 내 말을 안 믿었다. 뭐 내가 아버님을 안심시키려고 허풍을 떤다고 여기는 기색이야. 하긴 이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견훤이 워낙 막강하니 내 말을 실감하지 못할 수도.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볼 방법이 없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처소의 침상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 * *

어마어마한 신례를 치른 나는 이틀 정도는 학관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학관에 다시 나가기로 했다.

‘그 엄청난 신례를 치러놓고 학관을 안 다니면 억울하지. 무엇보다 어쨌든 왕건이 왕명으로 학관에 다니라고 했으니 뭐 다녀야지. 거기에 문리가 트이도록 고전 공부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왕족, 호족들의 자제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인 만큼 정보도 모이고 뭘 해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임희에게 밝혔더니 임희는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학관에 돌아가긴 돌아가야 하지만 며칠 더 쉬어도 된다.”

“사실 신례 때도 어디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밤을 새워서 피로했을 뿐이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렇게 주장해서 내 뜻을 관철시켰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아침 수레를 타고 다시 학관으로 향했다. 오라버니인 임연객도 함께였다.

임희가 누이를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임연객을 함께 보낸 것이다.

임연객은 그래서인지 예전처럼 나와 수레에 함께 타지 않았다. 아예 군마 한필에 올라탄 채 갑옷을 입고 검까지 차고 나를 호위하는 자세를 취했다. 병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무예 솜씨가 있는 사람이긴 했다.

웅성웅성.

다만 개경 시내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임연객의 모습을 보고 행인들이 수군거렸다.

“오라버니. 꼭 그래야겠어?”

나는 왠지 쪽팔리는 것을 느끼고 임연객에게 말했다.

“내 누이가 죽을 뻔했는데 한번 위엄을 보여야지. 내가 무장을 한 채로 한번 학관에 들어가 경고를 해주려고. 내 누이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임연객은 말 위에서 허리에 찬 검을 두드리며 그리 외쳤다.

‘그러면 아예 왕따가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나는 겨우겨우 학관에 따라 들어오려는 임연객을 뜯어말렸다.

“지금 견훤 때문에 나라의 일이 급한데 병부의 관리인 오라버니가 내 일에 신경 써서 되겠어? 제발 병부 일을 좀 신경 써.”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겨우 임연객을 보낸 나는 한숨을 쉬며 학관에 들어갔다.

교실 안의 풍경은 역시나 정겨웠다. 딱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 풍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교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

침묵이 감돌았다. 정확히 말하면 교실 안의 여자아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당황한 남자애들도 순간 잠잠해진 것이다.

한쪽에 앉아 있던 황보인혜나 유설란도 내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흠칫하더니 그대로 내 시선을 피했다.

“크흠.”

나는 그 반응에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하며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배수현이 내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연우야, 몸은 괜찮니?”

“응, 그래. 사실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

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나한테 먼저 다가와 준 배수현이 고마워서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손을 내밀며 재빨리 대답했다.

“헉.”

그런데 내가 갑자기 일어나자 배수현도 흠칫 놀라더니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그래?”

그 반응에 황당해진 내가 묻자 배수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미안 연우야. 그날 네가 우물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네가 죽어서 원한을 갚으려고 나타난 줄 알았어. 네가 갑자기 일어서거나 눈을 치켜뜨면 계속 그 새벽의 모습이 연상돼서. 순간적으로 놀랐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흡.”

그러자 여기저기서 여자애들은 숨을 들이켜며 내 시선을 피하고 남자애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내 자리에 앉았다. 잠시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던 배수현도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돌았다.

‘이것 참. 여자 몸에 빙의해서 얻었던 유일한 장점마저도 퇴색해 버렸군.’

여자 몸에 빙의해서 내가 얻은 유일한 이득이라면 여자아이들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현대의 김선우였다면 말 한마디 못 붙여봤을 미녀들과도 터놓고 지낼 수 있었는데. 재암성의 정혜도 그렇고.’

그런데 졸지에 최소 학관의 여자애들은 지금 귀신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 계속 가진 않고 애들도 이걸 곧 잊겠지?’

나는 그런 미미한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탁.

그런데 한쪽에서 목탁소리가 들리다 말아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처럼 목탁을 들고 마구 후려치며 교실에 들어올 태세였던 한림원령 최언위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서 있었다.

“왜 이리 조용해? 흠흠, 지난 몇 년간의 교육의 성과가 있었던 것입니까? 역시나 성현들이 남기신 경전과 사서의 힘을 오늘 새삼 실감했습니다.”

대뜸 그리 중얼거리던 최언위는 기쁜 기색으로 책을 펴고 수업을 시작했다.

* * *

이 고려의 학관에서는 단순히 학문만 가르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은 구정까지 가서 격구수업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학관에서 내 유일한 친구라고 할만한 배수현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니 배수현뿐만이 아니었다.

배수현을 따르는 여자아이들 몇몇이 쭈뼛쭈뼛하면서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배현경처럼 그래도 정윤을 지지하는 장수와 대신들의 딸이군.’

이미 언급했지만 정윤 왕무의 세력이 왕위를 유지하기에 미약하다는 거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건의 직계 장수들이나 신하들은 상당수가 정윤 왕무를 지지하고 있었다. 배현경, 박술희, 최지몽 같은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왕무도 자기 처지를 알고 직접 장수로서 군영에 자주 나가고 있었다. 군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봤자 실질적인 지분이 있는 대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한계가 있어.’

왕건의 직계 장수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거느린 병력들이나 군량은 다 각지의 대호족들이 대고 있었다.

백제와 싸울 때야 대호족들이 군말 없이 군사들을 내주지만 왕위계승경쟁이 벌어질 때는 당연히 대호족의 군사들은 순순히 왕건 직계 장수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배현경만 해도 원래는 후삼국 시대의 신라의 일개 군졸이었다.

그러나 워낙 무예가 뛰어나고 군략에 밝아서 마침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고 대장군까지 됐다.

개인적인 능력은 매우 탁월한 사람이었으나 지역기반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배현경을 따르는 중앙 소속의 직할병력도 어느 정도 있지만 대호족들 사병 숫자에 비하면 수가 적어.’

역시 내가 아무리 미래 지식이 있어도 정윤 왕무 곁에 있으면 곤란해질 확률이 너무 높았다. 거기에 내가 정신적으로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윤파라서 내 곁에 와주는 배수현과 여자아이들과 어울리기가 좀 난감하기는 했다.

‘그런데 또 지금 왕따 비슷한 게 됐는데 배수현마저 밀어낼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는 오늘은 그래도 배수현과 그녀를 따르는 여자아이들과 함께 야외수업을 받기 위해 나섰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외수업이 이루어지는 구정은 학관에서 매우 가까웠다. 학관의 학생들은 저마다 격구채를 챙기고 신이 나서 구정으로 향했다.

“어휴. 매일 격구수업만 했으면 좋겠다. 한림원령 각하 얼굴은 좀 안 보면 좋겠어.”

“으, 그 시끄러운 목탁은 딱 질색이야.”

남자아이들이 그리 외치며 제일 흥분된 기색이었다.

나도 이미 오라버니인 임연객이 물려준 격구채가 있어서 그걸 들고 구정으로 향했다.

배수현도 야외수업을 좋아하는지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연우, 너는 격구 잘 쳐?”

“아니 난 그닥.”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난세라서 체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체력은 길러 왔지만 격구 같이 단체로 하는 운동은 질색이었다.

단체 운동을 싫어하기는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학생들이 구정에 들어서자 웬 관복을 입은 덩치 큰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

구정에 도착한 학생들은 차례대로 그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학생들에게 격구를 가르칠 선생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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