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6화 (1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6화

16. 진상

‘뭐 자기 증조할머니의 유골함과 비석을 찾았으니 감명이 깊기도 하겠지. 하긴 딴생각을 하지는 않을 테니 다행이군. 거기다가 석문을 여느라 기진맥진해 있으니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될 확률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뭔가가 더 남아 있을 텐데.’

왜 전설 속에서는 용으로 변해 용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작제건의 아내가 여기에 잠들어 있는지가 나는 매우 궁금했다.

역사학도로서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사방을 면밀하게 살폈다. 작제건이 수수께끼만 풀면 모든 비밀이 드러난다고 했다.

분명 어딘가에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줄 기록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저거다!’

비석과 유골함 곁에 있는 돌서탁 위에 상자 하나가 보였다. 나는 여전히 감격에 겨워 있는 왕무의 눈치를 슬쩍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딸각-

내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얇은 소책자가 하나 보였다.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내 짐작대로군.’

나는 소책자를 열었다. 그러나 곧 낭패감을 느꼈다.

‘하필 이두문으로 적혀 있군. 이두는 나도 읽기 어려운데.’

이두는 한자를 이용해 우리나라 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다. 그 표기법을 정확히 알아야 능숙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한문을 어느 정도 해석할 줄 아는 나는 이두문도 억지로 한참 들여다보면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도도 느리고 머리도 아팠다.

‘이두도 배워둘걸. 그럼 왕무에게 굳이 부탁을 해야 하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괜히 또 왕무와 얽히는 게 싫었다.

‘그러나 아마 여기에는 고려 왕실의 비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이 소책자가 밖으로 나간 후에는 내가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여기서 읽어야 알 수 있다.’

이놈의 호기심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왕무 쪽을 바라봤다. 정윤 왕무는 몸을 일으키고 비석 앞에 두 손을 모아 묵념을 하고 있었다.

“커흠, 정윤 전하. 이쪽에도 무슨 책자가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왕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내가 정윤인 것을 알고도 그대는 놀라지 않는군.”

‘비석 앞에서 왕무라고 했을 때 놀란 척을 했는데 그걸 못 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책자를 왕무에게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직 통성명을 하지 못했군.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 된 연유로 이 비밀통로에 온 것인가?”

“소녀는 상산백 각하의 딸, 임연우라고 합니다. 황주원 공주께서 학관에 새로 들어오실 때 신례를 이곳에서 치르라고 하셔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학관 신례를 이곳에서? 나 때문에 그대와 상산백이 많이 곤란해지는군.”

정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군.’

어느 정도 훈훈한 정도의 훈남이라면 울화가 터지고 질투도 하고 그럴 텐데 왕무의 외모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물이 들어오는 비밀통로에서 석문을 여느라고 왕무의 머리칼도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 와중에 약간은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장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현대에 있었다면 진짜 뭘해도 됐을 텐데. sns만 해도 먹고 살았을 것 같아. 왕무 같은 경우에는 지금 같은 시대에 사는 게 오히려 불행이군.’

잘생기고 힘이 세다는 등의 개인적 자질로 왕이 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짓는 것을 보면 왕무도 나와 상산 임씨가 혼사를 피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군.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나와 임희가 왕건을 구하고 혼사를 2년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다 퍼져 있었다.

이러면 누구나 다 내가 정윤과의 혼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무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 정윤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세에 한계가 있는 상산보다는 더 강력한 가문과 함께하시는 것이 전하께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녀와 상산백 각하의 충심을 믿어주십시오.”

나는 왕무에게 굽신거렸다.

‘정윤 왕무의 세력이 미약하다고는 해도 그건 왕이 되기에 미약하다는 거지 중견 호족 가문이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돼.’

어쨌거나 왕무는 수많은 호족들의 방해를 뚫고 2년간 왕위를 유지했다. 즉 내가 왕무와의 혼사를 피할 때도 왕무 쪽의 심기를 건드리는 식으로 파토를 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나는 왕무 앞에서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야밤에 왜 이 비밀통로에 있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나? 그대는 나에 대해 호기심이 없나 보군.”

왕무는 빙글빙글 뜻 모를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에 뭐 그거야. 정윤 전하께서 무슨 심오한 뜻이 있으실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적당히 대답을 했다.

‘너가 왜 들어왔는지 알 게 뭐야? 물론 타이밍을 맞춰 들어와서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나 역시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왔다. 혹여 물이 들어올 때 이 통로 안에 들어와 보면 비밀이 풀릴까 해서 일부러 물때를 노려 들어온 것이지.”

나는 납득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무야. 네 처지에서야 이런 걸 열심히 해봐야지. 여러 호족들이 세력을 앞세워 흔들어대는 판국에 정윤이 믿을 것은 정통성뿐. 왕실의 전승으로 내려오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시도다. 물이 들어올 때 들어와 본 좋은 접근법이긴 해. 물론 틀렸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무에게 말했다.

“의조 대왕께서 이 비밀통로를 남기신 연유가 그 소책자에 적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제가 잠깐 훑어보니 이두문으로 상당한 분량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서 이두문을 읽어달라는 신호였다. 왕무도 아마 작제건이 남긴 비밀이 궁금하긴 한 모양이다.

소책자를 열고 왕무는 차분히 소책자를 읽어내려갔다.

* * *

-본래 나는 내 아내의 신세 내력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함구할 작정이었다. 내 아들들이 제 어미의 행방을 알지 못해 나를 원망하더라도 감수할 각오였다. 아들들에게 이 사연을 이야기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아들들은 평생 갚을 수 없는 원한을 품게 될 뿐.

그러나 얄궂게도 생을 마무리하려고 절에 들어와 있는데 그토록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신라 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정의 수탈에 참다못한 농민 원종과 애노가 들고 일어난 이래 전국9주에서 신라에 맞서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과연 이번의 이 거병은 과거에 있었던 거병들과 다를 것인가? 지난날 김헌창도 장보고도 신라에 맞서 일어났으나 신라조정은 그 도전을 끝내 물리쳤다. 이번에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신라가 이 난리를 수습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만큼은 견디지 못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늙었고 이제는 생을 마감할 때가 다가왔다.

삶에 미련은 없지만 과연 아들들에게 제 어미의 신세내력을 알려줄지 말지는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신라가 무너져 내리면 아들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함구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래서 나는 기괴한 수수께끼의 형식으로 단서를 남기고 여기에 이리 글을 남긴다.

이 글을 읽는다면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뜻일 터. 누가 그 수수께끼를 풀었든 그 사람은 나를 잘 아는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내가 소싯적만 해도 바닷길은 풍랑을 만나지만 않으면 안전했다.

요즘에야 바닷길에 무역을 나서면 무조건 해적들과 싸울 각오를 하고 활을 들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나서야 한다. 그러나 정말 상인들이 마음 편하게 짐만 배에 싣고 다닐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 대인이 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에는 왜 어른들이 장 대인을 그리 칭송하고 편하게 바닷길을 오갈 수 있었던 때가 행복이라고 말했는지 몰랐다.

어쨌든 그때에는 청해진의 수군이 열심히 해적들을 토벌했다. 그러나 청해진은 남해에 있는 만큼 서해에서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송악과 인근 지역의 어른들은 서해 패강진에도 장 대인의 수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조정에도 청을 넣고 청해진에도 사람을 보내 마침내 서해 패강진에도 장 대인의 사람이 왔다.

그분이 바로 내 장인 되는 두은점 공이다. 오랫동안 장 대인을 보좌해 온 사람이라고 했다. 두은점 공이 패강진에 주둔한 날 인근의 어르신들은 모두 선물을 싸들고 부임을 축하했다.

그리고 그 연회장에서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두은점 공의 딸인 아내와 내가 혼인으로 연결되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어른들의 계산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든든한 장인, 아름다운 아내, 순조로운 상행. 나는 이 모든 것이 평생 계속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청해진의 장 대인이 그리 비참하게 신라 조정에 배신당해 살해당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 대인이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그 엄청난 수익을 내는 청해진을 조정이 파괴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리고 끝없는 강제 이주과 학살도. 조정의 손에 장 대인이 살해당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서 그와 연루된 사람은 차례차례로 제거당했다.

패강진에 주둔하고 있던 장인의 가문도 멸문했다. 나 또한 그에 연루되어 죽을 뻔했다.

서라벌 조정에 끈이 있다는 평주 박 대인이 보증을 서주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죽었을 것이다. 대신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바쳐야 하긴 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내도 살아남았다. 조상 대대로 집안의 당주에게만 내려오던 예성강까지 통하던 비밀통로 안에 나는 아내를 숨겼다.

여러모로 불편한 송악산에 대대로 터를 잡고 산 보람을 그때 나는 느꼈다. 이런 비밀통로가 있으면 정말 평생에 한 번 정도는 써먹을 기회가 오는 법이다.

또한 신라 조정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몰래 힘 닿는 대로 신라 조정의 탄압을 피해 달아나는 청해진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비밀통로를 통해 조금씩 당나라 신라방에 사람들을 빼돌렸다.

조정의 눈을 피해 비밀통로에 숨어 있는 사이 그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인지 온갖 조각이며 글씨들을 새겨놓았다. 원래 청해진 사람들 중에는 다재다능한 사람이 많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 위험을 감수했던 것은 지금 돌이켜 보면 객기였다.

아내는 오래 살지는 못했다. 햇살도 제대로 못 받고 숨어 있어야 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나는 청해진 사람들과 함께 아내가 신라방까지 가서 살기를 바랐으나 아내는 그것을 거절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 내 여생도 썩 좋지는 못했다. 장 대인과 청해진이 사라진 이후 정말 사방의 해로에서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해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그들과 아귀다툼하며 죽을 각오로 상행에 나서야 했다.

내 목숨을 건지느라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장 대인이 죽은 이후에는 과거와 같은 평화는 오지 않았다.

반평생을 싸우면서 나는 겨우겨우 가문을 건사했다. 이게 이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다. 나는 아내의 유골을 이곳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나는 뱃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거타지라는 사람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여우요괴도 나오고 서해용왕도 나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혼란한 시대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도 쉽게 믿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남겼다.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충분히 풀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가 왜 평생 어미의 신세내력을 숨겼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

아! 나는 말년에 나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장인이 정말 서해용왕이고 아내가 용녀였다면 그 얼마나 좋았을까? 아내가 그 긴 세월을 이 어두운 동굴에서 숨었던 것이 아니라 진짜 용이라서 자유롭게 바다를 돌아다녔다면!

여기까지 온 사람은 만약 바깥 사정이 그럴 만하면 아내의 유골이라도 수습해서 양지바른 곳에 묘를 마련해 주길.

이 수수께끼가 풀릴 때쯤엔 신라 조정도 더 이상은 추적하지 않을 것이다.

-작제건

‘과연 그랬군. 그래 이러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나는 작제건이 남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의문이 해소된 기분이었다.

‘젠장 이 소책자를 현대로 가져갈 수 있으면 진짜 얼마에 팔릴까? 이걸로 논문만 써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왕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리고 두 손으로 자기가 들고 있던 소책자를 저민의의 비석 곁에 놓은 왕무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절을 했다.

나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런 왕무를 따라서 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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