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5화 (15/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5화

15. 구사일생

그렇게 사람들이 발만 구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갔다. 어슴푸레 동이 터올까 말까 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비밀통로에 물이 빠졌을 것이다. 아이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야지.”

조수가 빠지는 시간을 아는 왕평달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우물가에 있던 시녀 하나가 약간 몸을 떨며 말했다.

“우물 아래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데 과연 시녀의 말이 맞았다.

철벅철벅.

우물 아래쪽으로부터 뭔가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왕평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물가로 다가가 보려 할 때였다. 새하얀 손 하나가 우물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이 순간 고령의 왕평달은 심장마비로 쓰러질 뻔했으나 젊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 겨우 버텨냈다.

그리고 하얀 손에 이어서 물에 젖은 여인의 긴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물 주변은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꺄아아악.

하얀 손에 산발을 한 형체는 비틀거리면서 우물 밖으로 나왔다. 그 걸음걸이가 매우 기괴했다.

“연우 옷이야! 연우가 입었던 옷이야!”

배수현이 한쪽에 서 있다가 외쳤다. 무장 가문 출신의 대담한 소녀도 이 광경을 보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느라 난리가 났다. 유설란과 황보인혜는 그 사이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산발을 한 형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설란은 선 채로 그대로 기절해서 쓰러졌다.

황보인혜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연, 연우야. 잘못했어. 진짜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제발 용서해 줘. 엄마아.”

그러더니 모친인 황주 왕후 쪽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졌다.

* * *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난리가 낸 우물가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기껏 죽을 위기에서 빠져나왔는데 왜 이래?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특히 나를 이런 위기로 몰아넣은 유설란과 황보인혜에게는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물론 공주이자 유력한 충주원, 황주원의 딸들이니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우 우물에서 빠져나왔는데 유설란과 황보인혜는 내가 나오자마자 쓰러지고 가관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몰라 내가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데 웬 노인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 고, 곧 해가 뜬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왜 난리가 났는지 깨달았다.

‘내가 귀신처럼 보였나 보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임연우입니다. 그리고 너무 춥고 허기가 지니 식사도 필요하고 뭔가 모포라도 좀.”

이건 내 진심이었다. 지난밤은 진짜 전생의 김선우의 삶까지 모두 통 털어서 내 생애 최대의 위기였다.

내 또렷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앞의 노인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 * *

후루룩.

나는 뜨끈한 고기국물을 정신없이 들이켰다. 이걸 좀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충주 왕후와 황주 왕후는 각자 기절한 자신의 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내가 갇혔다는 소식에 가장 유력한 두 왕후까지 직접 달려오고 소란이 대단하긴 했겠군.’

어쨌든 자기네들 딸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겪었는데 나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는 모습을 보고 괘씸했으나 어쩔 방법이 없긴 했다.

밤을 꼴딱 새운 학관의 학생들도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하나둘씩 귀가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꼭 얘기해 줘야 해.”

배수현은 나에게 그런 당부를 하고 물러났다.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을 전부 다 얘기 못 해주는데. 어쨌든 나도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침이 되면 상산 사람들이 나를 마중 나올 것이다. 그들과 함께 상산 저택으로 돌아가서 며칠은 쉴 작정이었다.

“커흠, 몸은 괜찮으냐?”

그런 내 곁에서 초조한 듯 헛기침을 하며 왕평달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오한이 일어납니다.”

나는 왕평달에게 짐짓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왕평달이 뭔가를 물어볼 기색이라서 일부러 아픈 척했다.

“오한이 일어도 대화는 나눌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 어찌 탈출한 것이냐? 설마 네가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정말로 풀어낸 것이냐?”

왕평달은 엄청난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풀긴 풀어냈지. 내 해답은 결국 맞았으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지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 * *

“제발 열리든지 뭐가 나타나든지 해!”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 12번째 돌횃대 아래의 벽을 걷어차고 밀고 별별 쇼를 다하고 있었다. 그 사이 물의 수위는 점점 높아서 내 허리 부근에 이르렀다.

“맙소사. 여기에 사람이 있다니?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그런 내 등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이 무슨!’

그 말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밤중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비밀동굴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또 다른 공포였다.

나는 벌벌 떨며 몸을 돌렸다.

내 등 뒤에는 웬 젊은 남자 하나가 횃불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무슨 연예인이야?’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가끔씩 드라마 제작팀이 학교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가 확실히 풍경이 그럴듯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드라마 찍는 모습을 구경했고 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진짜 연예인들의 외모는 보통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이 딱 그때와 똑같았다.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외모는 그 정도로 수려했다.

“예기치 않게 일이 꼬여서 여기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자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처음에는 무슨 초자연적인 존재나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남자의 용모와 옷차림을 살핀 나는 그것은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남자는 군데군데 방수가 되는 가죽을 덧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상어가죽인가? 무슨 가죽인지는 모르겠지만 옷차림을 보면 뭔가 의도를 가지고 이 동굴을 둘러보기 위해 온 것 같군.’

나는 남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선선히 내 처지를 털어놓았다.

“오늘은 어쨌든 사람을 먼저 구하고 봐야겠군. 그럼 수영은 할 줄 아나?”

남자는 약간은 난감한 듯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해보는 수밖에. 수위가 더 높아지면 내가 헤엄을 쳐서 동굴 밖 예성강까지 나갈 테니 나를 단단히 붙잡도록.”

남자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내 허리를 껴안으려고 했다. 나를 단단히 붙들고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혼자라면 몰라도 저까지 데리고 그 먼 거리를 헤엄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슬쩍 뒷걸음질 쳐서 그 손길을 피하며 그 점을 지적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어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부근을 함께 밀든가 해보면 뭔가 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나는 12번째 돌횃대 부근의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저 벽을 두드리고 차고 했던 것인가? 지금 계속 물이 들이차서 시간이 없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야 해.”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발.”

그러나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지금 계속 머릿속에 작제건이 남긴 비밀을 풀면 더 안전하게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예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것 참.”

내 표정을 보고 남자는 내 말을 한번 들어주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가볍게 혀를 차며 남자는 내가 서 있는 12번째 돌횃대 아래의 벽에 손을 올렸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함께 밀어요.”

나는 신호를 보내며 젖먹던 힘을 다해 벽을 밀었다. 남자 역시 힘을 쓰며 벽을 밀기 시작했다.

“이 벽에 대체 뭐가 있다고?”

힘을 쓰다가 남자는 어이가 없다고 느꼈는지 다시 중얼거렸다.

덜컥.

그런데 순간 벽이 움직이며 소리가 났다.

“움직인다!”

나는 그리 외치며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내며 벽을 밀었다. 투덜대던 남자도 소리가 난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힘을 썼다.

드르륵-

그리고 마침내 서서히 벽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커다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그 광경을 보며 남자는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나도 밀린 벽의 두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역시 내가 생각해낸 해답이 맞았어. 그나저나 무지막지한 두께야. 무게도 엄청나고. 설사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해도 장정 3명은 힘을 써야 이 석문을 밀 수 있겠군. 내가 전력을 다했다고는 하나 저 남자의 힘이 엄청나긴 해. 하여간 작제건이 막판에 힘이 있어야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 놔서 죽을 뻔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돌횃대 위에 올려놓았던 등롱을 들고 새로 드러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 통로 안에는 위쪽으로 계단이 나 있어요.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물을 피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는 등롱을 들고 성큼성큼 대강 다듬어진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 역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사실 이때쯤 돼서 나는 남자의 정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괜히 먼저 아는 척을 하면 어색할 것 같아서 말없이 돌계단을 올랐다.

그러면서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비밀통로 안에 조각과 글귀를 보면 그 비밀통로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어. 작제건은 왜 이 비밀통로를 관리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은 왜 비밀통로를 지나간 걸일까? 무슨 밀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무슨 일을 했던 거야. 뭔가 이런 공간이 또 필요했겠지.’

내가 비밀통로 안에서 작제건의 수수께끼를 풀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느낀 것도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고 힘을 쓴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당장이라도 앉아서 좀 쉬고 싶었지만 등롱을 든 채 꾸역꾸역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작제건이 여기에 숨겨놓은 비밀이 뭔지 알아내고 쉬어야지.’

그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오르니 또다시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거의 몇 사람이 생활해도 될 만한 크기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활한 흔적이 있었다. 반쯤 썩어가긴 해도 몇몇 가구들이 보였고 아예 돌을 깎아 만든 탁자 같은 것들도 보였다.

내가 찬찬히 그 공간을 둘러보는데 뒤따라오는 남자도 유심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쪽에서 마침내 글자가 적힌 뭔가를 발견했다. 비석 하나에 이리 적혀 있었다. 그 비석 옆에는 유골함으로 보이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애처 저민의지묘

부(父), 두은점

부(夫), 작제건

그 비석을 보자마자 남자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소손 왕무가 마침내 증조모님을 뵙습니다.”

‘참 요란스럽기도 하지.’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으나 정윤인 왕무가 자기 이름을 밝혔으니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전혀 놀라지 않았지만 놀란 시늉을 하며 나 역시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 내가 만난 남자가 정윤 왕무인 것이야 뻔한 거지.’

애초에 이 비밀통로 자체가 고려 왕실과 연관된 공간이라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나도 황보인혜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왔지. 즉 이 비밀통로 안에서 만난 사람은 고려 왕족, 그중에서도 직계가족일 확률이 높다는 것.’

이때 내가 빙의한 임연우의 나이가 17세였다. 정윤 왕무는 나보다 1살 어렸지만 거의 동년배라고 봐야 했다.

‘정윤 왕무가 왕건의 맏이이니 다른 태자들은 지금은 그보다 어리지.’

거기에 내가 깜짝 놀랄 정도의 외모는 임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아버님이 정윤 왕무가 엄청 잘생겼다고 평한 바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석문을 열 때 그 괴력.’

정윤 왕무는 사서를 보면 실제 전장에 나서서 태조 왕건의 전투를 도왔다. 전장에서 통할 만큼 힘이 셌다고 나와 있다.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해서 나는 한순간 이 미청년이 정윤 왕무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필 부담되게 정윤 왕무와 단둘이 이리 마주치게 되다니. 이 사람과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서 별별 쇼를 다 하고 있는데.’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감격에 겨워하는 정윤 왕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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