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4화
14. 주머니
이제 나에게 남은 길은 최대한 빨리 우물 쪽으로 걷는 것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을 부여잡고 걷는데 쏟아져 들어오는 물살이 상당히 거셌다.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였다.
“죽으면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마침내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리 중얼거렸다. 차가운 물이 치마를 적셔서 다리에서부터 오한이 올라왔다.
몸이 덜덜 떨리니 나는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돌횃대 위에서 너울거리는 불길도 매우 섬뜩해 보였다. 도깨비불처럼 음산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곧 단호하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 죽으면 말 그대로 죽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하지도 않은 현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포기할 순 없어.”
그래서 나는 억지로 우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내가 잠깐 생각을 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물의 수위는 더 높아져 있었다.
우물 방향으로 열심히 걷는다고 해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탈출하기 전에 물이 먼저 쏟아져 들어와 내 키보다 수위가 더 높아질 것이 뻔했다.
‘어떻게든 다른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무턱대고 걷는다고 답이 아니야.’
나는 초조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울거리는 돌횃대의 불꽃 주위로 수많은 조각들과 글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목숨이 위급해져서 그런가 내 머리가 보통 때보다 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비밀통로에 물이 막 들어올 무렵부터 계속 뭔가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돌횃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황보인혜가 나에게 들려준 작제건의 향가를 다시 읊조렸다.
“남의 옷을 빌려 평생을 살았는데
어찌 이리 내 옷처럼 잘 맞는가?
다만 옷 주머니 두 개가 더 터져 있구나.
아! 나는 본디 학문을 모른 채로 살다 가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물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기뻐서 펄쩍 뛰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져 나자빠질 뻔했다.
“풀었다. 풀었어. 그래! 역시 작제건은 출신을 봐서 너무 어렵거나 현학적인 수수께끼를 남길 사람이 아니야. 애초에 작제건 본인이 남의 이야기를 따와서 거짓말을 한 것을 자신의 향가에 고백하고 있어.”
남의 옷을 빌렸다는 향가의 구절은 작제건 본인이 여우요괴를 잡아서 용왕을 구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남의 이야기를 빌려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해석하면 딱 말이 들어맞았다.
이미 내가 작제건의 이야기는 거타지란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다만 작제건의 이야기 뒷부분은 거타지의 이야기와 달라. 거타지는 용왕의 딸과 결혼을 하고 끝나지만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결혼을 하고 두 가지 선물까지 받지.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그 선물이야. 작제건이 남긴 향가에서 옷 주머니 두 개가 더 터져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걸 가리키는 거야. 주머니 자체가 물건을 담는 용도기도 하고. 즉 작제건은 자신이 받아온 선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즉 버드나무 지팡이, 돼지 이 두 가지 단서에 집중하면 이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작제건이 마지막에 자신은 학문이 없다고 한 부분은 동굴벽의 조각이나 글귀에는 결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부분이고.”
나는 하나하나 풀려가는 단서에 흥분해서 부르짖었다. 다만 여기까지 와도 이 비밀통로 안에는 버드나무 지팡이도 없고 돼지도 없었다.
그 두 가지가 결정적 단서라는 것을 알아도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돌횃대 위에 불꽃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버드나무를 민간에서는 도깨비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드나무에 있는 틈새 안에 곤충 같은 것들이 들어와 죽으면 그 곤충 잔해들이 밤에 인광을 내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수께끼는 다 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제건 이야기 속의 버드나무 지팡이는 이 비밀통로 안의 돌횃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너울거리는 돌횃대의 불꽃이 도깨비불을 연상시켰다.
“이제 딱 하나 남은 단서인 돼지가 가리키는 것은 뻔하다. 비밀통로 안에는 여러 개의 돌횃대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어. 즉 돼지는 어느 돌횃대로 가야 하는지 알려줘야 하는 거지.”
이 수수께끼를 출제한 작제건의 교양을 따져보면 이 단서도 쉽게 풀 수 있었다. 작제건은 절대 복잡한 문제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돼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십이간지다. 십이간지는 이 시대 보통 평민들도 연도를 헤아릴 때 자주 썼어.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돼지는 십이간지 중 12번째 동물. 즉 작제건은 비밀통로 안의 12번째 돌횃대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나는 지난 몇시간 동안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고 비밀통로를 오락가락하며 돌횃대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첫 번째 돌횃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두 번째 돌횃대 주변에는 치성광여래의 조각이 있었다. 세 번째 돌횃대에는…….”
이런 식으로 기억을 더듬던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우물 쪽으로부터 10번째 돌횃대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2개의 돌횃대만 지나면 이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사실 작제건이 비밀통로에 뭔가를 남긴 것은 틀림없는데 그게 꼭 지금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 뭔가 작제건이 남긴 게 지금 나를 살려줄 수 있을 거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어. 머릿속에서 뭔가가 맴돌아.’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 볼만한 유일한 희망이 작제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었다.
나는 등롱을 치켜들고 12번째 돌횃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며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작제건이 남긴 이 간단한 수수께끼를 왜 그동안 고려왕실에서 못 풀었을까? 그래 아마 수수께끼를 남긴 작제건은 자기 손자가 설마 고려 국왕이 될 줄 몰랐겠지. 일개 해상무역상의 손자가 왕이 될 거라고 누가 짐작했겠어?’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결국 작제건이 남긴 이야기가 거타지가 주인공인 설화를 베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여러 사료들이 데이터베이스 되어 있는 현대와 달리 이 시대에는 작제건의 이야기와 유사한 설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설사 작제건의 이야기가 표절이라는 것을 간파한 학자가 있다고 해도 감히 누가 그것을 지적할 수 있었을까?’
작제건의 손자 왕건이 왕이 되면서 작제건의 이야기는 고려 왕조의 건국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걸 부정하면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여태 작제건이 남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어느덧 12번째 돌횃대 아래에 이르렀다.
나는 12번째 돌횃대에는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등롱의 불빛에 의지해서 그 주변을 살폈는데 별로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저 몇몇 조각이며 글귀들이 듬성듬성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작제건이 막판에 심오한 수수께끼를 숨겨놨을 리는 없다. 그냥 이 주변을 밀거나 당기면 뭔가가 드러날 거야.”
나는 그런 판단을 내리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12번째 돌횃대 주변의 벽을 밀고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단단한 돌벽을 미는 느낌이었다.
“설마 내가 틀렸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단서들이 그리 잘 맞아들어갔는데 아닐 리가?”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내 추리가 틀렸다면 진짜 나는 익사엔딩을 맞이할 판이었다.
그래서 더 힘을 줘서 돌벽을 밀기도 하고 돌횃대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발로 벽을 걷어 차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물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서 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이, 이럴 수가?”
이때쯤 와서는 나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 * *
연우가 들어간 우물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난리도 아니었다. 유설란이 보낸 소식을 듣고 놀란 충주 왕후가 직접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황보인혜의 어머니인 황주 왕후 역시 한밤중임에도 달려왔다.
“어찌 일을 이렇게까지 만드느냐?”
황주 왕후가 딸인 황보인혜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 저는 그냥 연우 걔에게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평소 때는 한 번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 왜 갑자기 물이 들어온 지 소녀는 모르겠어요.”
겁에 질린 황보인혜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 비밀통로는 예성강까지 이어져 있다. 다만 겨울이 되면 조수가 다른 때와는 달라서 만조가 되면 예성강의 수위가 높아져서 물이 들어오지.”
한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에 새하얀 수염의 노인이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왕숙.”
충주 왕후와 황주 왕후가 모두 노인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왕평달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숙부였다.
즉 지금 고려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이기도 했다. 같은 항렬의 다른 왕씨 일족은 모두 천수를 다했다.
“흥! 왕가의 신성한 비밀통로를 학관 꼬마들의 신례에 이용하다니! 아니 그냥 학관 꼬마들이 비밀통로를 견학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지난 수년간 아무리 풀려고 해도 풀지 못한 문제를 꼬마 하나에게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처사냐?”
왕평달은 코웃음을 치며 두 왕후와 유설란, 황보인혜를 노려보았다. 그런 왕평달의 꾸짖음을 듣던 충주 왕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상산백의 딸이 저 안에 갇혀 있어 위급한 상황입니다. 왕숙께서 오랜 세월 저 비밀통로에 대해 연구하셨으니 혹시 그 아이를 구할 방도가 있을까 해서 이 밤중에 결례를 무릅쓰고 모셔왔습니다.”
왕건의 숙부 왕평달은 고령인 만큼 정치나 군사 일선에서 이미 물러난 지 오래였다.
그 이후에는 왕씨 집안의 족보며 유물을 관리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었다. 특히 왕실의 전설과 관련된 용녀의 우물과 비밀통로에 관심이 많았다.
작제건이 남긴 수수께끼를 푸는 데도 왕평달은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충주 왕후는 혹여 왕평달에게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특별히 부른 것이다.
“지금 이 우물 쪽 통로 입구는 너무 좁아서 물이 들어차면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이미 사람이 비밀통로에 갇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미 예성강 쪽 통로 출구에 사람을 보냈다. 그나마 물이 좀 빠지면 그쪽으로는 서둘러 들어갈 수 있겠지. 그러나 갇혀 있는 꼬마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지금쯤 통로 안은 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 아이가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이 겨울에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왕평달은 비관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왕평달은 어쨌든 사람이 갇혀 있다니 최선을 다해보자는 의미로 나온 것이지 구조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충주왕후가 뭐라 더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왕평달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 아뢰는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어쨌든 갇혀 있는 아이의 생사가 확인되면 더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왕숙!”
충주 왕후가 애가 타서 외쳤으니 왕평달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왕건이 잠에서 일어날 텐데 이 일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심복인 임희의 딸이 이리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면 왕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 불과 얼마 전에 임희와 연우가 왕건을 구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는 소문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충주 왕후는 후폭풍이 클 거 같아서 왕숙인 왕평달을 앞세워 이 일을 알리려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왕평달이 그 속내를 눈치챈 것이다.
‘상산백은 딸의 원수를 갚으려고 정윤 쪽에 붙을 거고 연우가 죽으면 정윤은 또 다른 가문과 혼사를 맺어야 한다. 졸지에 정윤 쪽에 2개 가문의 세력이 더해질 판이다. 원래는 어느 정도 세력이 한정된 상산과 정윤의 혼사를 이루어지게 만들어서 불확실성을 없애려고 했건만.’
충주 왕후는 내심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