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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화 (1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3화

13. 비밀통로

나는 줄사다리를 타고 어찌어찌 우물 바닥에 닿았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나는 뻐근해진 팔을 주물렀다.

“등롱을 한 손에 들고 내려와야 해서 너무 거추장스러웠어.”

한참 팔을 휘젓고 하며 근육이 풀린 내가 등롱을 들어 사방의 우물벽을 살펴보니 한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큼 커다란 구멍이었다.

“이게 바로 황보인혜가 말했던 비밀통로인가 보군. 고려 왕가는 이 구멍으로 용녀가 용으로 변해서 들락날락했다고 믿는 건가?”

잠시 망설이던 나는 등롱을 들고 성큼성큼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단순히 정치적 목적보다 이 비밀통로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

물론 나는 진짜 용이 이 구멍으로 드나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해상무역에 종사했어. 아마 이 통로도 그와 관련해서 뭔가 이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미래의 역사학도로서 나름의 추측을 하며 나는 계속 나아갔다. 이 비밀통로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공간이 넓어졌다.

‘원래 자연적으로 있는 지하동굴을 절묘하게 우물과 연결시켰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걸이를 천천히 하며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황보인혜 등이 이 비밀통로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황보인혜가 이 비밀통로에 들어와 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확실히 내 짐작이 맞았던 거 같았다. 동굴 벽을 조악하게나마 깎아서 만든 돌횃대 위에 마른 장작들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면서 관리를 하나 보군. 하긴 고려 왕실의 시조와 관련된 장소니 관리를 해야겠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 어두운 밤에 혼자 이 지하동굴에 들어와 보니 무섭긴 무서웠다.

나는 등롱 안의 불씨를 이용해 돌횃대 위의 장작에 불을 붙였다. 통로 안이 상당히 환해졌다. 큰 불빛이 생기니 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계속 걸어가자 두 번째 돌횃대가 보였다. 나는 거기에도 역시 불을 붙였다.

주변의 동굴벽이 환해지자 나는 이 비밀통로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는 황보인혜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돌횃대 인근의 동굴벽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조각과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치성광여래의 조각상인데. 작제건이 여우 요괴를 물리쳐서 용왕을 구했을 때 그 여우 요괴가 치성광여래의 형상으로 둔갑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벽에 새겨진 부처 조각을 바라보았다. 잘 만든 조각은 아니었다.

구도나 형상이 좀 조악한 면이 많았다. 그래도 이 부처 조각에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나는 황보인혜가 나에게 들려준 향가를 떠올렸다.

“분명 그 향가에 옷을 빌려 입었다는 구절이 있었어. 주머니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처 조각의 옷 부분을 세심히 살피고 만져보기도 했다.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이 만져봐서 그런지 치성광여래의 옷 부분이 매끌매끌했다.

‘흐음, 모르겠다. 우선 계속 가보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전진하며 동굴 벽을 등롱으로 비춰서 살폈다. 또 보이는 돌횃대마다 불을 붙였다.

그러나 비밀통로가 환해질 때마다 나는 숨겨진 비밀을 풀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각이며 의미심장한 글귀가 너무 많군.”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맨 처음 본 치성광여래의 조각 외에도 약사여래의 조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불경이나 경전에서 따온 문구를 새겨놓기도 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 경구는 작제건이 남긴 향가의 마지막 부분과 한번 연결 지어 볼 수도 있을 거 같고.”

뭔가 해석해 볼 여지가 있는 단서가 너무 많았다. 혼자서는 동굴벽에 새겨진 조각이며 글귀를 다 파악해 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조각이며 글귀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만든 게 틀림없어. 글씨체도 글귀마다 다르고 조각도 너무 달라서. 작제건은 대체 무슨 의도로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는지.”

나는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돌횃대 아래 주저앉았다. 괜히 혼자서는 풀 수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느니 그냥 쉴 작정이었다.

“아버님이 날 찾으러 올 때까지 그냥 여기에서 버티고 있어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런데 이 지하동굴에 있으니 확실히 힘든 것이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시계가 없느니 진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갑갑하네. 무엇보다 무섭다.’

한창 동굴벽에 새겨진 조각이며 글귀를 보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때는 신경을 못 썼는데 이 괴괴한 동굴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공포감이 들긴 했다.

돌횃대 위에 너울거리는 불길도 혼자서 보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저 불을 끄면 달랑 이 등롱 하나에 의지해야 하니 더 무섭고. 에잇. 그냥 다시 작제건 이야기나 생각해 보자. 시간 때우기에 이만큼 좋은 수수께끼도 없지. 어차피 답은 안 나올 테지만.’

나는 몸에 돋는 닭살을 쓸어내리며 다시 비밀통로를 오락가락하며 거기에 새겨진 조각이며 글귀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 *

연우가 용녀의 우물로 들어가고 나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언니 어떻게 해요? 연우 걔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안 나오는데. 독하기도 하지. 웬만하면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올 텐데.”

연우를 거세게 몰아붙이던 황보인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님께서 연우 걔가 반드시 스스로를 정윤비로 인정하도록 만들라고 하셨는데. 이리 버틸 줄은.”

유설란 역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우물을 바라보았다.

두 공주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우물 바닥으로 내려간 연우가 나오지 않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는 연우의 아버지인 상산백 임희의 지위가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고 수준의 대호족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고 태조 왕건의 심복 중의 하나였다.

그 딸에게 외형상으로는 황보인혜가 상당히 가혹한 신례를 강요했는데 연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후폭풍이 거셀 것이다.

유설란은 겉으로는 연우를 위하는 척했으나 황보인혜의 동조자였다. 비밀통로로 홀로 들어간 연우가 감감무소식이니 유설란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누가 들어가서 연우를 불러와. 이미 지금까지 연우가 저 어두운 비밀통로 안에 들어가서 버틴 것만으로서 신례를 치른 것이나 다름없으니.”

유설란이 시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번 물러서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키가 큰 배수현이 선뜻 나서더니 말했다.

“궁에서만 일하는 시녀보다는 제가 더 빨리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있습니다.”

무장가문 출신답게 몸 쓰는 재간에 자신이 있는 배수현이 거침없이 줄사다리를 타고 우물 바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배수현은 오래지 않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올라왔다. 다시 땅 위로 올라온 배수현의 치맛자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공주 마마! 지금, 지금. 우물에 도로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뭐라고?”

당황한 유설란과 황보인혜가 당황해서 직접 등롱을 들고 우물바닥을 비춰보는데 과연 배수현의 말대로였다.

비밀통로 쪽 구멍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 지금 비밀통로 안에 들어 있는 연우가 어찌 되었을까에 생각이 미친 유설란이 주변의 시녀들에게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빨리, 빨리 충주원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

유설란은 이미 이 문제는 자기 수준에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 *

나는 비밀통로를 계속 오락가락하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더 나아가지 않고 이미 불을 밝혀둔 돌횃대들 사이를 오가며 조각들과 글귀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괜히 더 나아가기보다는 이미 본 조각과 글귀들을 반복해서 보며 뭔가 실마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역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사학과 석사인 내가 지금 작제건 정도가 낸 수수께끼를 못 맞추는 것이 말이 되나?”

너무 문제가 안 풀리자 나는 순간 흥분해서 발을 구르며 그리 외쳤다. 작제건이 왕건의 할아버지이기는 했지만 한창 활동할 때는 그냥 보통 호족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해적까지는 아니어도 해적들과 아귀다툼을 하는 무역상이 작제건이었는데. 엄청난 교양이 있을 턱이 없는데 이 비밀통로에 이만한 조각과 글귀를 남겨두고 나도 못 풀 수수께끼를 남겼다고?”

나는 시원스럽게 그리 외쳤다. 아마 밖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대역죄인 취급을 받을 테지만 이 안에는 나 혼자 있으니 이런 말을 마음껏 입밖에 내뱉을 수 있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역시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뭔가 처음부터 이상해. 애초에 작제건이 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거짓이거든. 여우요괴나 용왕이 나오는 것은 원래 거타지란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베껴온 거야. 끝부분만 약간 다르고. 용녀와 결혼해서 선물을 받아오고 우물을 훔쳐보고 하는 이야기만 독창성이 있지.”

현대의 역사학도인 나는 이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고대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 이야기도 자기 이야기처럼 가져다 쓰는 것이 당연했다.

현대에는 여러 가지 역사 자료들이 잘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어 손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 애초에 거짓말인 작제건 이야기를 가지고 이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해서는 안 돼. 차라리 작제건이 직접 남겼다는 향가를 바탕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나는 황보인혜가 말해준 향가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그 향가는 너무 짧고 뜬구름 잡는 소리라서 뭔가 전해주는 정보가 없었다.

나는 다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그러나 서서히 내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는 게 있었다.

‘뭐지? 내가 가진 현대지식 덕인가? 묘하게 걸리는 게 있어.’

철벅철벅.

나는 아예 눈을 감고 실마리를 잡기 위해 동굴 안을 거닐었다. 내가 걸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왜 이상한 소리가 나지? 발도 축축하고.’

내가 눈을 뜨는데 어느덧 동굴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비밀통로의 한쪽으로부터 끊임없이 물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맙소사! 설마 이 비밀통로가 예성강까지 연결되어 있는 건가?”

하긴 전설에 따르면 용녀가 이 우물을 통해 용궁까지 갔다니 강까지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젠장. 그런데 물이 안 들어오다가 왜 하필 지금? 계절이나 시기에 따라 조수의 영향으로 물이 들어오는 건가?”

나는 그리 중얼거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왜 물이 들어오는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비밀통로 안에서 익사할 판이었다.

나는 황급히 우물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여기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달리는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게 빨랐다.

얼마 못 갔는데 어느덧 물의 수위는 내 정강이에 이르렀다. 내 치맛자락은 물을 머금어 무거워졌다.

이 물을 뚫고 나가려니 뛰기는커녕 걷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고 나는 비밀통로에 상당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또한 나는 수영도 못했다.

“맙소사. 여기까지 와서 익사엔딩인가?”

나는 막막해져서 그런 장탄식을 했다. 그러다가 손에 들린 대나무 등롱을 보며 나는 반색을 했다. 등롱의 대나무 손잡이를 입에 가져가며 나는 외쳤다.

“최소 익사를 면하겠군. 손잡이가 대나무라서 이걸 이용해 숨을 쉴 수는 있겠어. 이걸 입에 물고 수면 밖의 공기를 들이마신다면 숨이 막혀 죽지는 않겠군.”

나는 그렇게 억지로 희망을 이었으나 곧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차오르기 시작하는 물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대나무를 이용해 숨을 억지로 쉬더라도 물이 이리 차가우면 오래 못 버티고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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