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0화 (10/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화

10. 한림원령

‘제대로 배울 수는 있을지.’

어쨌든 사방이 시끌벅적한 와중에 나는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 낄 수도 없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탕탕탕!

잠시 뒤 뭔가를 세게 두드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막는데 교실 안으로 웬 중년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목탁을 들고 세게 치면서 거침없이 들어왔다. 스님들이 치듯이 목탁을 치는 게 아니라 소음을 유발시킬 목적으로 마구 목탁을 치고 있었다.

“조용, 조용. 곧 수업을 시작할 테니. 모두 앉으십시오.”

목탁소리에 겨우 교실 안의 혼란이 진압되기 시작했다. 온갖 난리를 피우던 학생들이 후다닥 자신의 서탁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죽신을 뺏겨서 고통받던 키 작은 소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옷차림도 약간은 허름한 소년이었다.

“각하, 한경정이 제 신발을 뺏고 안 돌려줍니다.”

‘각하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진짜 목탁을 들고 온 남자가 정말 한림원령 최언위인가 보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최언위가 그쪽을 바라보자마자 가죽신을 가져간 소년이 즉시 그 신발을 돌려주었다.

대강 소란을 수습한 최언위는 목탁을 자신의 소매 속에 넣었다.

‘고대인데 너무 낯익어.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별별 기구를 다 가지고 다니던 선생님들이 떠오르는군. 자, 장구채, 단소 등등. 막대기 비슷한 것들을 다 가지고 다녔지.’

그사이 최언위가 몹시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자자 어제는 아마 삼국사 중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신라에 서신을 보내기 직전까지 진도를 나갔습니다. 어제 배운 부분을 짧게 복습하고 계속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주섬주섬 책을 꺼내서 펼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어제 대강 삼국사를 훑어보기는 했다. 거기에 현대의 역사학도로서 고대 역사의 흐름은 대강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최언위가 말한 부분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책을 펼친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최언위가 내 옆에 다가와서 서 있었다.

“오늘 처음 오시게 된 상산백의 따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각하.”

내가 예를 갖춰서 고개를 숙이자 최언위가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는 그냥 선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부분을 한번 아가씨께서 읽고 해석을 해보시겠습니까? 물론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부분이니 못 하시겠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해보겠습니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삼국사는 전체적으로 한문 문장이 어렵지는 않았다.

싸워서 몇 명이 죽고 누구에게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들이 많아서 이 부분들은 해석하기 쉬웠다.

다만 중간중간 예전에 진짜 나라들 사이에서 오갔던 외교문서들은 원문 그대로 실어놓았는데 이 부분은 굉장히 해석하기 어려웠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서신도 중국 사람이 써서 신라에 보낸 외교문서인 만큼 해석이 매우 어려웠다.

‘사실 지금 내 한문 실력으로는 해석이 무리인데. 내가 현대에서 설인귀가 신라에 보낸 서신을 읽은 적이 있어. 옆에 해석도 달려 있고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하는지도 배웠고.’

설인귀의 서신은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워낙 중요한 사료라서 나도 대학원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내 실력은 아니지만 나는 은근히 학문적 과시욕이 있는 사람이었다. 주저 없이 책을 든 나는 설인귀의 서신을 해석해 나갔다.

설인귀의 서신은 상당히 길어서 내가 한참 읽어내려가는데 주위가 문득 잠잠해졌다.

그리고 중간에 최언위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나를 제지했다.

“훌륭합니다. 몇몇 부분이 어색하긴 하나 물 흐르듯 잘 읽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만큼만 진도를 나갈 것이니 그만하십시오. 아가씨가 학문이 상당하다는 소문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허허.”

최언위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최언위가 만족한다고?’

내가 조금 당혹감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교실 안은 고요해져 있었다. 온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짝짝짝.

몇몇 학생은 최언위를 따라서 박수를 치다가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 관두었다.

“자 그럼 설인귀의 서신에 대해 침착하게 강론할 테니 들어보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던 최언위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 강의 내용을 들으며 나는 최언위가 나에게 감탄한 이유를 깨달았다.

‘흠, 확실히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 초라서 지금 내가 가진 실력도 통하는군.’

사실 지금 내 한문 실력은 고려중기 이후나 조선시대였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때는 지방의 양반들도 내 실력을 훨씬 능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였다면 나는 그냥 글을 약간 아는 상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려 초라서 한문을 구사하는 귀족들의 수가 많지 않거든. 물론 신라삼최 같은 실력자는 조선시대에 가도 초일류지만 나머지 진골귀족이나 호족들 중 학문을 그 정도로 깊이 연마한 사람이 드물다.’

거기다가 아직 삼한통일조차 못 시킨 고려 극초기라면 전쟁을 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유력 호족들도 출신성분이 다양했다.

지금 내 한문능력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갖는 것이다.

“아이고, 선생님. 너무 어렵습니다.”

최언위가 차분히 풀어서 강의를 해주는데도 교실 안에서 울상을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좀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학생들이 이 정도 실력이라면 굳이 최언위 같은 실력자가 나서서 가르칠 필요는 없는데.’

적당한 학사들이 나서서 가르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다만 많은 유력 호족들이 자기 자녀들이 최언위의 제자라는 간판을 얻기를 원하겠지.’

임희조차도 은근히 그런 기대감을 표했으니 다른 호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언위가 직접 나서서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다.

최언위는 반시진 좀 넘는 시간 동안 강의를 이어나갔다. 나는 정신없이 최언위의 강의 내용을 받아적었다.

어찌 보면 지금 애매한 내 수준에 딱 맞는 강의이기도 했다.

“자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다른 학사들이 가르칠 때도 좀 집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한림원에 오시면 됩니다. 한림원은 학관 바로 옆에 있습니다.”

강의를 마친 최언위는 그런 말을 남기고 걸어 나갔다. 몹시 바쁜 기색이었다.

공산의 충격적인 패배 직후라서 조정 대신들은 할 일이 많았다. 최언위도 업무가 많을 것이다.

유력한 호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면 최언위가 이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그리고 최언위가 나가자마자 수많은 학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상산백 각하의 딸이라고 했지? 이름이 뭐니?”

키가 큰 게 인상적인 여자아이 하나가 나에게 오더니 물었다.

“임연우라고 해.”

그러자 키 큰 여자애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배수현이야.”

그 성씨만 듣고도 나는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

“대장군 님의?”

배수현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수현에게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학관에 있을 배씨라면 고려 대장군 배현경의 자제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맞출 수 있었다.

배현경은 고려의 유력한 무장이며 개국공신이었다. 그래서 나도 각별히 예를 갖추었다.

“네가 이번에 공산에서 궁지에 몰린 폐하를 구하는데 꾀를 냈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런데 수만의 병력들이 대결하는 와중에 우리 같은 나이의 사람이 꾀를 냈다는데 믿어지지 않아서. 그게 사실이니?”

배수현이 물었다.

‘겸손하게 내가 한 게 없다고 할까? 자랑을 할까?’

약간 고민을 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작게나마 폐하께서 빠져나오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었어.”

나는 순간적으로 내 공로를 자랑하기로 했다. 역시나 지금은 난세라서 자기 능력을 감춰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오, 과연.”

“한림원령도 연우 얘기를 들었다고 했잖아.”

주변에 그런 웅성거림이 일었다. 내가 뿌듯함을 느낄 때였다.

“과연 네가 어떤 꾀를 낸 것인지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약간은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은색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비단옷을 걸친 한 소녀가 보였다.

나는 그 소녀를 보고 대단히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진짜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눈매며 입가에 띈 미묘한 미소까지 정말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성격이었다.

주변의 다른 호족 자제들도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보인혜 공주 마마셔.”

배수현이 재빨리 내 어깨를 눌러 예를 갖추게 하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말을 들은 나는 재빨리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왕건의 딸. 성을 보면 아마 황주 왕후 황보씨의 딸이겠군.’

이때 고려 왕실은 태자들은 왕씨 성을 사용하고 공주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그리고 이복 형제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이때는 고대고 진골끼리 결혼하던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던 시대라 어찌어찌 통용될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 황보 씨의 공주면 당연히 황주 왕후의 딸인 것이다. 황주 황보씨는 그 세력이 매우 막강한 호족 집안이었다.

황주 왕후면 대호족 황보제공의 딸이었다.

‘아버님이 각별히 부담을 느낀다고 거론했던 사람이 유긍달과 황보제공 두 사람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황보인혜 앞에서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인혜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말했다.

“내가 묻지 않았니? 과연 무슨 꾀를 이용해서 폐하를 구했는지 듣고 싶다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님을 구해준 은혜를 갚고 싶은데.”

‘내가 실수했다. 공을 자랑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입맛을 다시며 황보인혜에게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주 마마. 그 꾀의 구체적인 내용은 군기에 속하는 일이라 함부로 입 밖에 꺼내기 어렵습니다.”

내가 계란에 밀서를 숨겨서 왕건을 구했는데 지금 이 방법을 재암성주 선필이 계속 사용하며 몰래 사벌주와 개경 사이의 연락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지금 학관에서 입 밖에 내면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많은 호족 자제들이 기밀을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는 여기에 관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가 그렇게 네 공을 뽐내놓고 내용을 물으니 밝힐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네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니?”

황보인혜가 예리한 눈빛으로 그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배수현이 곁에 나서서 말했다.

“공주 마마. 사실 군중의 일은 함부로 입 밖에 꺼내는 법이…….”

그래도 무장 가문 출신인 배수현은 내 사정을 재빨리 이해하고 변명을 해주려고 했는데 황보인혜가 바라보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몹시 일이 꼬였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인혜가 압박을 가하는 것도 있고 내가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나를 은근히 거짓말쟁이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이것 참. 학관에 온 지 첫날부터 이러면 앞으로 생활이 고달파질 것 같은데. 첫인상이 거짓말쟁이가 되면.’

물론 내 속 알맹이야 현대 남성이니 학관 생활의 고달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학관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유력 호족 자제들이 모인 정치적 장소이기도 했다.

내가 잘못하면 상산 전체의 입지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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