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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9화 (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화

9. 학관

“자, 이 책은 「삼국사」고 이건 「한산기」. 개경학교에서는 우선 이 두 가지 책을 주로 교재로 사용하니까 받아둬라. 상산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개경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이야. 필사를 해서 새 책을 만들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러니 내가 쓰던 책을 물려받는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내가 낙서를 좀 하긴 했는데. 아 여기 「제왕연대력」과 「고승전」도 가끔은 부교재로 봐야 해.”

그러면서 임연객은 주섬주섬 자신의 처소에서 책들을 꺼내서 연우에게 건넸다.

덜덜덜.

임연객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손을 떨고 있었다. 임연객의 입에서 역사학도가 보기에는 전설적인 책들의 이름이 술술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감격에 찬 얼굴로 한산기를 집어 들었다. 한산기라고 적힌 겉장을 넘기니 첫 장에 이리 적혀 있었다.

-신라 한산주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이 짓다.

김대문은 신라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였다. 오늘날 삼국사기 같은 것은 김대문의 저서를 많이 인용해서 지었다. 다만 현대에는 전해지는 김대문의 저서가 하나도 없다.

‘이 한산기 한 권만 가지고 현대로 돌아가도 진짜 떼돈 번다.’

내 생각에는 한산기의 가치는 가히 수천억은 될 것 같았다.

물론 가치가 수천억 원이라고 해도 그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에 와서 이 책을 팔면 큰돈을 만질 것이다.

‘아니 아예 이 한산기를 분석해서 논문만 쓰면 교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일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 책을 가지고 현대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니 한스러웠다.

한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나를 보며 곁에서 임연객이 말했다.

“우리 고려가 한산주, 삭주, 명주 3개주를 점거하고 있는데 한산주가 가장 크고 중요하니 한산기를 교재로 쓰는 거야. 정말 재미없어. 시험 볼 때 한산주 지명을 달달 외워야 하는데. 제일 곤욕스러워.”

‘재미가 없다니? 그 귀한 것들을.’

순간 나는 발끈해서 뭐라 하려다가 참았다. 어쨌든 오빠인 임연객이 이 책들을 다 물려준 것은 사실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오빠인 임연객이 매우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마 학관에 들어가게 되면 신례를 치러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다.”

“신례라면?”

‘그게 이 시대에도 있었나? 조선시대에 신고식을 신례라 불렀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임연객이 말을 이었다.

“여러 호족의 자제들은 각자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지내다가 학관에 들어오게 되니 말을 좀 듣게 하기 위해 신례를 엄격하게 치른다. 곱게 자란 연우 네가 걱정이다.”

“오라버니한테는 뭘 시켰는데요?”

“술을 끊임없이 먹이고 노래를 시키더구나. 정말 분위기상 안 할 수도 없고.”

임연객이 짐짓 나에게 겁을 주듯 말했다.

‘내가 현대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 보고 왔는데 뭘. 군대도 다녀왔어. 좀 곤욕스럽긴 하지만 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잘 준비하겠어요. 오라버니.”

나는 새침하게 그리 대답하고 책들을 주섬주섬 껴안고 일어섰다. 형님도 아니고 오라버니 타령을 하려니 입에 잘 안 붙긴 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무겁지 않니? 하인들을 부르지.”

임연객의 권유를 듣고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가져갈 거예요.”

나는 이 귀한 책들을 껴안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를 흠뻑 들이키며 나는 처소로 돌아갔다.

“좋아. 간만에 양껏 책이나 읽어보자.”

그리고 나는 침상에 그대로 드러누워 삼국사를 펼쳐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잠시 뒤.

“음, 역시나 한문으로 된 역사서를 혼자 읽으려니 힘들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학과 대학원을 다닌 만큼 나는 빙의하기 전부터 한문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 빙의하면서 원래 연우의 기억도 흡수해서 웬만한 책은 스스로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한문을 해독하려면 상당히 집중을 해야 해서 머리도 아프고 생각 외로 재미가 없었다.

“에잇. 내일 학관에 가서 공부를 해야지.”

나는 책을 한쪽에 던져놓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려운 책을 들여다보다 누우니 잠이 잘 왔다.

* * *

다음 날 나는 오빠인 임연객과 함께 집을 나섰다.

“잘 다녀오너라. 연객이 너는 연우를 꼭 학관까지 데려다주도록 하거라.”

임희는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다. 공산 전투 이후 그 피해를 수습하느라고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났다. 임희도 고려의 고관으로 당연히 일이 많았다.

그래서 임연객에게 딸 연우를 맡긴 것이다.

수레에 올라 학관으로 향하는 나와 임연객 뒤를 2명의 군졸들이 따랐다. 개경은 안전한 곳이었지만 내가 학관으로 가는 첫날이니만큼 나름 신경을 쓴 경호를 해주는 것이다.

나와 함께 수레에 오른 임연객은 거드름을 피우며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사실 개경에서 길을 찾기는 쉽다. 왕궁 바로 아래 쪽에 있는 커다란 구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모든 중요한 관청들이 몰려 있다. 연우 네가 다니게 될 학관도 거기 있다. 물론 이 몸이 일하는 병부도 거기에 있지. 구정 근처를 한번 쭉 둘러보면 감이 잡힐 거야.”

‘나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구정이란 격구를 할 때 쓰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다. 격구는 이 시대의 인기 스포츠였다.

왕건도 이 격구를 엄청 좋아해서 아예 언덕 위에 자신의 왕궁을 짓고 그 바로 아래 커다란 평지에는 구정을 지어 놓았다.

왕건의 왕궁에서 내려오면 바로 구정이 나왔다.

‘격구는 말을 타고 하는 스포츠라 경기장이 커야 하지. 관객도 수만 명이 들어올 수 있을걸.’

이 구정에서 격구 경기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의 여러 행사와 군 열병식도 했다. 그래서 이 구정을 중심으로 모든 주요 건물이 있었다.

당연히 미래에서 온 역사학도인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한 책을 물려주기도 한 임연객을 생각해서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그렇군요. 개경에 처음 오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하하하. 모르는 게 있으면 더 물어봐라.”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니 임연객은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학관에 가면 아버님 말씀대로 정말 한림원령께서 우리들을 가르쳐주시나요? 그냥 학관을 관리만 하시고 가르치는 것은 그 밑의 학사들이 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시대 고려 한림원 장관이면 그 유명한 최언위인데.’

이 시대에는 소위 ‘신라삼최’라고 불리는 3명의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다.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모두 당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친 대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섬기다가 말년에 실종됐고 최승우는 아예 백제에 가서 견훤을 따르고 최언위는 지금 고려에 있다.’

그런 거물이 진짜 학관에서 사람들을 가르칠지 궁금했다.

“암, 정말 한림원령께서 직접 나와서 공부를 가르쳐주신다. 하하하. 따지고 보면 나도 한림원령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언위 같은 거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니. 후삼국 시대에 떨어진 보람이 있긴 하네. 결혼 문제만 아니면 오히려 좋을 수도.’

원래 현대에서는 사학과 대학원에 다닐 만큼 나는 공부를 좋아한 편이었다.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면 가장 중요한 공부가 한문공부였다.

‘어찌 됐든 학자가 되려면 원사료를 읽을 줄 알아야 되니.’

그래서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면 한문 서적들을 몇 년이고 읽는 공부를 해야 한다.

문리라고 불리는 것이 트여서 한문책을 슬슬 읽을 때까지 계속 읽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현대교육이 아무리 발전해도 한문을 공부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것은 조선시대 방법이야.’

조선시대 양반들은 한문을 읽는 것을 넘어 써서 중국인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가지려면 꾸역꾸역 한문서적을 몇 년이고 읽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몇 년 동안 공부를 하다가 못 견디고 나와서 문리가 트이다 말았어.’

사학과 공부 자체는 적성에 잘 맞았다. 한문서적을 읽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친구들도 다 취업하는 와중에 옛 고서를 끊임없이 읽어나가기에는 내 멘탈이 약했다.

‘아 또 그때 생각을 해버렸네.’

옛날 생각을 하던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나에게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아예 이 기회에 문리가 트이게 공부를 확실하게 하자. 한문 고서를 완벽하게 읽는 능력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지. 현대에서 못한 공부를 지금 하는 거지. 특히 그 최언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어.’

나는 그런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나를 보며 임연객이 말했다.

“혹시 학관에 들어가면 있을 신례가 걱정되는 것이냐? 오늘이 학관에 들어가는 첫날이니 신례를 할 것인데. 음, 그 문제는 나나 아버님도 도와주기 어렵구나. 신례는 당사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라.”

아마 옛날 생각을 하느라 씁쓸해진 내 표정을 보고 임연객이 오해한 모양이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다른 생각을 했어요.”

“음, 그래.”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거대한 구정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나는 학관 앞에 도착했다.

호족의 자제들뿐만 아니라 왕족들까지 와서 공부를 하는 곳이라 그런지 건물이 으리으리했다. 주변의 다른 관청들에 뒤지지 않았다.

학관 앞에서 으리으리하게 차려입은 소년, 소녀들이 말이나 수레에서 내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오늘 하루 잘 지내라. 나는 저쪽 병부에서 일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군졸을 보내고. 너희들은 아가씨를 잘 모셔라.”

임연객은 나와 호위군졸 2명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는 자기가 먼저 수레에서 내려 병부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나를 태운 수레는 학관 앞에 이르렀다. 나 역시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아가씨, 그럼 저희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를 호위하는 상산군졸 2명이 그리 말했다. 학관 담장을 따라 호족 자제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사람들을 위한 건물들도 지어져 있었다.

“알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학관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황색 관복을 입은 한 관리가 오더니 물었다.

“오늘 오시기로 되어 있는 상산백의 따님이십니까?”

“그렇다.”

나는 품속에서 내 신분을 상징하는 패를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오늘은 삼국사로 첫 수업을 할 것입니다. 책이 있으십니까?”

“예.”

이 시대에는 미리 시간표를 전달한다든가 하지를 않아서 임연객이 준 책을 다 가져온 나였다.

관리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나를 한쪽에 있는 건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안내를 받아 건물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우하하하, 야 받아.”

개구쟁이처럼 생긴 한 소년이 가죽신 한쪽을 반대편에 서 있는 자기 친구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웬 키가 작은 소년 하나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건 양반이고 몇몇 소년, 소녀들은 아예 길쭉한 격구채를 쥐고 칼싸움을 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사방이 떠들어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너무 낯이 익는데.’

내가 데자뷰를 느끼며 멍하니 있는데 황색 관복의 관리는 익숙한 지 그 사이를 헤쳐가며 서탁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넓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탁 위에는 붓, 벼루, 연적, 먹이 이미 놓여 있었다.

“이곳이 아가씨의 자리입니다.”

황색 관복의 관리는 그리고 나서 난장판인 교실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나는 삼국사를 서탁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대학교를 기대했는데 이거 완전히 고등학교였군.”

나는 소매로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닦아냈다. 하긴 지금은 고려가 건국된 지 10년도 안 된 시기였다.

거기에 백제와의 전쟁에 전 국력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역사를 보면 고려가 제대로 국학을 정비하고 교육과정을 정비한 것은 왕건의 손자인 고려 성종 때였다.

‘구색 맞추기 식으로 학관을 어찌어찌 지어 놓기는 했지만 호족 자제들이 다닌다고 해도 고급 교육을 시킬 여건은 아니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내가 고등학생 때와 똑같은지.’

하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나이가 딱 현대의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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