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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화 (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화

8. 개경

‘직접 와서 보니 확실히 충주의 유긍달은 적으로 돌리면 상대하기 곤란해. 괜히 외손자들을 왕으로 만든 게 아니야.’

배 위에서 강물의 흐름을 느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신라는 삼한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뉘었다. 이 중 대강 살펴보았을 때 고려가 3개주, 백제가 3개주를 차지하고 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남은 3개 주만 형식적으로 신라 땅으로 남아 있는데 현실은 선필과 같은 호족들이 각 성에서 독립해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려나 백제나 이기려면 남아 있는 신라의 3개 주를 차지해야 했다. 그러면 6개 주를 차지해서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충주 땅이 엄청 중요해진다는 거지.’

이때 충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소백산맥을 넘어서 신라땅으로 들어가려면 여러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이게 충주에 있었다.

또한 지금 내가 배를 타고 편하게 개경까지 가는 것처럼 남한강을 통해 개경의 군사와 물자를 손쉽게 나를 수도 있었다.

‘고려군이 신라땅으로 들어가려면 유긍달과 충주 세력들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말이지. 개경에서 배를 타고 물자와 군사들이 우선 충주에 내려야 하고 소백산맥을 넘는 길도 충주 사람들이 내줘야 하고. 정윤과 혼사가 이루어지면 상산의 힘으로 이런 유긍달에게 맞서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든 정윤과의 혼사를 무마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이 여행으로 더 강해졌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내 뒤에서 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잡찬 어르신께서 너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어느새 뱃전에 기대 있는 내 뒤에 임희와 유긍달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상념에 잠겨서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한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즉시 유긍달을 향해 나는 절을 했다. 딱딱한 배 갑판 위에 엎드린 내가 말했다.

“잡찬 어른을 뵙습니다.”

얼떨결에 절을 받게 된 유긍달은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유긍달은 그대로 내 절을 받았다.

그리고 임희는 곁에서 적지 않게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긍달이 옆에 있는데 굳이 절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임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유긍달은 내 절을 받고 난 뒤 임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산백의 따님이 폐하를 구할 계책을 냈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과연 따님이 총명하십니다. 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겠습니다. 허허.”

그러더니 유긍달은 임희를 향해 짧게 묵례를 하더니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유긍달이 가는 것을 보고 나는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털었다. 임희 역시 나를 도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말했다.

“아니 왜 잡찬을 보고 대뜸 절까지 한 것이냐? 솔직히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도 그렇게까진 안 하더니. 대체 무슨 연유냐?”

임희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유긍달은 제가 정윤비가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아버님.”

“네 말이 옳다. 정말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구나. 내 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정윤 전하의 장인이 되더라도 감당할 만하다는 것이 유긍달 등의 생각이다. 혼사가 미루어지다가 덜컥 다른 대호족이 정윤 전하와 힘을 합치면 곤란해지니.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상산과 정윤 전하의 혼사를 마무리 지으려는 게 저들의 속셈이지. ……아 이제야 알겠구나!”

나와 대화를 나누던 임희는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임희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아버님. 유긍달은 이번에 혼사가 2년 미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일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은근슬쩍 저를 치켜세우며 정윤비로 취급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대뜸 절을 하고 유긍달이 그 절을 받아버렸으니 저를 정윤비로 대우하기도 그래서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내 지위가 정윤비라면 아무리 유긍달이라고 해도 그 절을 받을 수 없었다.

유긍달이 아무리 왕의 장인이고 대호족이라고 해도 정윤비 역시 존귀한 지위였다. 서로 간에 예를 표하는 것이 맞았다.

‘유긍달이 그 상황에서 나를 정윤비로 대우하려면 역시 절을 하며 같은 예를 취해야 했을 텐데 차마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었겠지.’

나는 나름대로 그런 분석을 했다. 어쨌든 이 일로 유긍달 역시 아직까지는 내가 정윤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내 곁에서 임희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네 학문이 요새 들어 놀랍게 진일보했구나. 이런 수싸움을 순간적으로 해내다니. 확실히 2년 전에 그 구덩이에 빠지고 나서 아예 사람이 변한 것처럼 똑똑해졌다.”

“다치고 나서 회복할 때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 이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예리한 임희의 말에 나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2년 전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군.’

그래서 그렇게 둘러대는데 임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어렸을 때는 공부를 많이 하면 실력이 확확 는다. 나이를 먹고 나서는 책을 읽어도 들어오는 게 없어. 어쨌든 폐하의 배려로 이번에 개경학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거기서도 학문을 더 닦도록 해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개경까지 향하는 여행은 별 탈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끝났다. 하긴 고려 땅 안을 고려국왕인 왕건과 함께 가는 건데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서 마침내 일행은 한산주 한양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서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개경까지 가자. 이제 겨울이라 짧은 거리라도 바다 항해를 하기는 힘들다.”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그 명에 따라 일행은 모두 한양군에 상륙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이 한양군에 이르자 수많은 고려국 중신들이 속속 여기에 합류했다. 개경까지는 지척이니 아예 왕을 마중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일행 사이에 껴서 그대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입성했다.

* * *

유력한 호족 중 하나인 상산백 임희는 수도인 개경과 상산을 오락가락하며 지내고 있었다.

당연히 개경에도 저택이 있었다. 임희가 없을 때는 임희의 아들이 개경의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즉 내 오라버니라는 거. 이거 졸지에 형도 아니고 오빠가 생겼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개경의 상산저택으로 향했다.

“이곳들이 바로 기인들의 저택이 몰린 거리다. 기인들이 모여서 사는 만큼 개경의 가장 번화가지. 우리 상산저도 이곳에 있다. 길을 잘 익혀두거라.”

수레에 올라탄 임희는 개경에 처음 나를 위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었다.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때는 사방에 유력한 호족들이 군사들을 거느리며 웅거하고 있었다.

왕건 입장에서도 안전장치로 호족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들을 기인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유력 호족들의 자제가 모여 사니 하인들이며 시녀들의 숫자도 엄청 많고 수많은 장사꾼들이 근처에 몰려들어 시장을 펼쳤다.

따지고 보면 나나 상산저에 머물러 있는 오라버니도 기인으로서 개경에 있는 셈이었다.

‘물론 아버님께 기인이 일종의 인질이라고 말씀드리면 화를 엄청 내시겠지? 현대의 역사학도 입장에서는 무조건 인질인데.’

임희는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왕건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인들도 인질이라기보다는 왕건이 지방의 호족 자제들에게 개경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인제도에 관해서는 임희와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수레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참 아직 웅장하지는 않지만 활력이 넘치는 도시군.’

나는 개경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때는 고려가 건국된 지 9년밖에 안 된 시기였다.

수도인 개경의 여러 건물들도 완비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여전히 공사를 하는 사람도 오가고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한순간 임희가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가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왕궁이다. 네가 한 달에 일주일은 머물러야 하는 나주 왕후의 처소도 저 안에 있지.”

나는 임희의 안내에 따라 언덕 위에 지어진 왕궁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건국된 지 오래 안 되고 전쟁 중이라 궁궐도 완벽하게 지을 수는 없었다.

품격은 갖췄으나 웅장한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딘지 정돈되지 못한 느낌도 있었다. 언덕에다가 궁궐을 지어놨으니 건물 배치를 반듯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좀 평지에 궁궐을 지었으면 편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 임희가 입을 열었다.

“연우 너처럼 말하는 대신들도 많았다. 그러나 저 언덕이 폐하께서 태어나신 집이 있었던 곳이다. 폐하께서 저기에 궁을 짓기를 원하신 데다가 저기 풍수가 그리 좋다고 하구나.”

“그렇습니까?”

풍수 같은 것은 안 믿는 나는 약간은 시큰둥하게 말하는데 임희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선 대사가 예전에 매우 좋은 풍수라고 했고 폐하의 탄생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런 자리에 폐하의 왕궁 말고 다른 건물을 세울 수 있겠느냐? 도선 대사께서는 입적하셨지만 개경에는 도선대사의 제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중에 내가 너도 데려가서 그 고승들을 만나게 해주마.”

“하하하. 고맙습니다. 아버님.”

나는 웃으면서 임희의 말을 얼버무렸다.

‘참 유능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아버님이 풍수를 저리 믿는다는 게 신기하군.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아실 텐데. 하긴 이 시대 사람들은 다 풍수를 믿었지.’

그리 부녀 간에 잡담을 나누는 사이 수레는 상산저 앞에 이르렀다.

상산저 앞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미리 나와 임희가 온다는 전갈을 보내놨기 때문이다.

“아버님 오래간만입니다. 연우야 너도 정말 오래간만이다. 우리 상산 군사들이 이번에 폐하를 구하는 데 상당한 공을 세웠다는 소문을 저도 들었습니다.”

한 건장한 청년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임희와 나를 맞이했다. 바로 임희의 장남 임연객이었다.

이미 개경에서 병부의 관직을 얻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 개경의 저택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

임희는 웃으면서 아들과 껴안았다.

“오랜 여정에 피곤하실 것 같아서 처소를 미리 다 마련해 놨습니다.”

“고맙다.”

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산저 안에 들어섰다. 그 뒤를 따르는 나에게 임연객이 어깨를 두드리며 정감 있게 말을 걸었다.

“연우야. 개경에 너도 활약했다는 소문이 약간 돌고 있어. 오라비로서 자랑스럽구나. 흐흐.”

임연객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시대에 빙의한다면 차라리 임연객의 몸에 빙의했다면 참 편했을 것을.’

빙의한 지 2년밖에 안 됐고 임연객은 계속 개경에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임연객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상산저에서 행장을 푼 나와 임희는 쉬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 다시 모였다.

“폐하께서 연우 너에게 명하신 것은 개경 학관에 입학해 공부를 하는 것과 한 달에 일주일은 나주 왕후 마마의 처소에서 지내라는 것이었다. 우선 나주 왕후 처소에 가는 일은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준비가 필요하고. 개경의 학관에는 바로 들어가거라. 연객아! 네가 연우가 개경의 학관에 들어가는 일을 좀 챙겨라.”

임희가 그렇게 말했다. 임연객 역시 한때 개경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다가 병부에 관직을 얻은 것이다.

학교에 대해서는 임연객이 잘 알았다.

“알겠습니다.”

“연우야. 개경의 학교는 한림원령이 직접 나와서 가르친다. 당나라에서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한림원령의 가르침을 받으면 네 학문 역시 더욱 진일보할 것이다. 허허허.”

임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문득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참 오래간만에 학교란 공간에 돌아가는군. 나도 여유만 있었으면 현대에서도 대학원에 계속 머물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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