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화
7. 계책
“선필 공이 일러주신 길을 따라 소신의 상산 군사 100명과 폐하를 따라온 군사 50명이 나아가면 이틀이면 이 사벌주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희는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암성에 머물 때 선필과 탈출로에 대해서도 깊이 논의를 한 임희였다.
“그럼 이 일에 관해서는 상산백만 믿고 맡기겠네. 그리고 선필 공, 민망하지만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왕건이 입을 열었다.
“하문하십시오.”
“이 몸이 견훤 그 도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했으니 그 일대의 호족들은 모두 견훤에게 붙을 것입니다. 내가 신라 왕실이나 이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려 해도 전할 길이 없습니다.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시일이 지나면 이 근방이 모두 견훤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선필 공께서 연락책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선필 공의 재주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이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 중책을 한번 맡아보겠습니다. 소신이 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상산백의 따님이 낸 계책에 따라 소식을 전하면 견훤을 속여가며 연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상보.”
왕건이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날의 논의는 끝났다. 내일 밤부터 강행군을 해서 고려 본토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푹 쉬기 위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나는 임희의 뒤를 따라 걸어 나오는데 임희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폐하의 큰 계책에 빠진 것 같구나.”
그러더니 임희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해서 내가 묻자 임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주 왕후 마마의 처소에 한달 중 1주일은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 그러면 연우 네가 자연스레 정윤 전하와 자주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게 걱정이다.”
“그게 왜 걱정되십니까?”
“너는 그러고 보니 10살 이후로 정윤 전하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봤구나. 폐하도 젊은 시절 미남자로 이름을 떨치셨다. 그런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정윤 전하의 용모가 폐하보다 더 수려하시다. 네가 자주 나주 왕후 마마의 처소에 지내다 보면 결국 정윤 전하께 빠질 수밖에 없다. 폐하께서도 그것을 노리고 계신 것이다.”
임희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이 없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힌 감정을 참고 대답했다.
‘난 알맹이는 남자라고. 그런 걱정은 전혀 없지. 하긴 아버님은 그걸 모르지만.’
“네가 총명하긴 하나 막상 정윤 전하를 보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임희는 여전히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심려 놓으십시오.”
나는 연거푸 그런 말을 했다. 다만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긴 했다.
‘아니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건지.’
* * *
다음 날 밤, 왕건과 휘하 군사들은 모두 재암성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도 옷차림을 단단히 하고 말 위에 올랐다. 강행군을 해서 순식간에 고려 본토를 돌아갈 거라는 경고를 받은 나였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재암성주 선필과 딸 정혜가 마중을 나왔다.
“상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보중하십시오. 만에 하나 견훤이 상보께서 우리 고려와 연결된 것을 눈치채면 공격할 것입니다. 한동안은 우리 고려가 군사를 내기 힘드니 조심하십시오.”
왕건이 선필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선필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럼.”
왕건은 말 위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희, 나를 비롯한 150명의 군사들이 왕건을 호위하며 재암성을 떠났다.
선필과 정혜는 그런 고려군사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헉헉. 아이고.”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강행군을 하니 입에서 진짜 죽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물론 내 몸의 진짜 주인 연우도 어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단련을 해서 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라서 상산백 임희는 딸에게도 유사시에 대비한 재주를 익히게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 평생을 산 왕건, 임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선필이 알려준 샛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는 있어도 상당히 험준하긴 했다.
그나마 나는 말이라도 타고 가지만 걸어서 따라오는 보병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쉬자.”
행군 경험이 많은 왕건은 재빨리 그런 명을 내렸다. 나와 군사들은 반색을 하며 자리를 펴고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상산백, 그리고 연우야. 여기 와서 쉬자꾸나.”
한쪽에 앉은 왕건이 자기 옆자리를 치며 말했다.
“예, 폐하.”
임희는 고개를 숙이며 왕건의 곁으로 갔다.
‘참 왕건이 왕임에도 권위의식이 없고 소탈한 것은 인정해야겠군.’
내가 왕건을 만난 지 며칠 안 됐지만 이 점 하나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임희 뿐만 아니라 다른 군졸들에게도 왕건은 격의 없이 대했다.
그래도 나는 왕건 앞에서 정중히 예를 갖추며 자리에 앉았다. 왕건은 나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연우 네가 고생이 많구나. 부족한 나를 구하느라고 이곳까지 오고.”
“황송합니다. 폐하.”
‘그래도 절대 당신 며느리가 될 생각은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왕건이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니 나는 감격해서 고개를 숙였다.
“음, 그래 네가 상산백과 재암성에 한동안 머물렀다고 들었다. 얼마나 머물렀지?”
“거의 20일은 머물렀습니다.”
“그래, 그래. 네가 내 누이 정혜와 비슷한 나이니 꽤 친하게 지냈겠구나?”
왕건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뭔가 조짐이 이상한데?’
내가 이야기의 흐름에 슬슬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데 왕건이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재암성의 내 누이는 그래 취미가 무엇이냐?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허허허.”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합니다…….”
“오호. 그건 참 유용한 정보다.”
왕건은 매우 반색으로 하며 더욱 세밀하게 캐물었다. 딱 보니 왕건은 정혜에게 매우 관심이 많아서 나를 부른 것이다.
왕이 물으니까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어서 내가 대답을 해주는 사이 한쪽에서 임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아버님도 왕건의 부인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을 알겠군. 그럼 정윤을 둘러싼 왕위 계승 구도는 더 복잡해지고.’
* * *
어쨌든 밤에는 강행군을 하고 낮에는 쉬면서 왕건 일행은 이틀 만에 상주 접경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충주가 멀지 않습니다. 충주에 전령을 보내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라고 해야겠습니다.”
임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충주까지 왔으니 앞으로는 좀 편하게 개경까지 가겠군.”
왕건 역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충주는 확실하게 고려의 본토였고 배치된 군사들도 많았다.
왕건 입장에서는 공산에서 패한 후 백제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이제야 확실히 안전지대에 도달한 셈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잠시 시간이 지나자 수천 명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건을 호위하기 위해 충주에서 마중 나온 병력들이었다.
그 선두에는 깔끔한 인상의 중년인이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잡찬이 직접 여기까지 왔군.”
왕건은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군사를 이끌고 온 중년인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실종되셨다는 소식에 개경에서 딸아이의 근심이 끝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리 달려왔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무사하시니 큰 복입니다.”
그사이 나는 임희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임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분이 바로 잡찬 유긍달 공이시다. 충주 왕후 마마의 부친이기도 하지.”
‘진짜 거물을 드디어 만나는군.’
나 역시 유긍달의 이름을 듣고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내 아버지 임희 역시 명망 높은 호족이었지만 유긍달은 진짜 삼한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대호족이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이 유긍달의 딸과 혼인을 해서 세력을 다졌다.
애초에 충주 자체가 보통 도시가 아니었다. 신라 시대에는 5소경이 있었다.
전국의 주요 도시 5개를 선정해 부수도로 만든 건데 충주는 그중 중원경이라고 불렸다. 그 정도로 이 시대에는 대도시였다.
‘아버님이 정윤 왕무와의 혼사를 꺼리는 것은 7할은 이 유긍달 때문이지.’
이미 왕건과 충주 왕후의 사이에서는 아들이 2명이나 태어났다. 그리고 유긍달은 자신의 외손자들을 고려왕으로 만들기 위해 정윤 왕무를 열심히 흔들어 젖히고 있었다.
상산 임씨가 정윤과 혼사를 맺게 되면 이 유긍달과 정면 대결을 해야 할 판인데 임희는 유긍달을 몹시 꺼리고 있었다.
‘결국 유긍달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자신의 외손자 2명이 차례대로 정종, 광종이 되며 고려국왕이 되니.’
미래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나는 어떻게든 이 복잡한 상황에서 잘 빠져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곁에 있던 임희도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왕건과 유긍달의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아마 왕건이 없는 사이 개경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의논하는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왕건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겠군. 잡찬이 이미 충주에 배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쉬지 말고 바로 배에 타서 개경에 가자.”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왕이 한동안 실종 상태로 있었으니 개경 조정의 상황이 확실히 심상치 않기는 한 것 같았다.
충주에 하루도 머물지 않고 바로 출발할 태세였다.
“예.”
사람들은 왕건의 명에 따라 충주 나루터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루터에는 과연 크고 작은 배 수십 척이 도열해 있었다.
충주 옆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가면 오늘날의 서울까지 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육로로 개경까지 가는 것도 매우 가깝고 계속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 잠깐만 가도 개경까지 갈 수 있었다.
확실히 앞으로의 여정은 편해질 것이다.
유긍달은 왕건이 타라고 특별히 건조한 크고 좋은 배 1척을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잡찬, 상산백은 나와 동승하는 것이 좋겠소. 배 안에서도 긴히 논의할 일이 많으니. 아 그리고 연우도 같이 타거라. 작은 배에 타면 흔들림이 심하니. 뭐 늙은이들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끼면 지루하겠지만 멀미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왕건이 그리 말하며 배에 올랐다. 다만 왕건이 나를 바라보며 한 말에 유긍달 역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황공합니다. 폐하.”
그런 유긍달의 시선에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왕건을 만날 때보다 유긍달을 볼 때가 더 긴장되냐?’
나는 내심 그리 생각하며 임희의 뒤를 따라 왕건의 배에 올랐다. 그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선단은 시간을 끌지 않고 개경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 * *
배 위에 오르자마자 왕건은 유긍달과 임희만 데리고 선실에 들어갔다. 의논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엄청 궁금하네.’
현대에서 역사학도였던 만큼 나는 정치며 이 시대 정세 이야기에 관심이 컸다.
먹고 살기가 힘들 것 같아 대학원을 때려치운 것이지 역사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함부로 저런 거물을 사이에 끼기 힘들었다.
여태까지 내가 은근슬쩍 저런 논의 자리에 낀 것은 부친인 임희의 빽과 공산전투 이후 어수선한 상황 덕을 본 바가 컸다.
지금은 그런 요소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배 갑판 위에서 남한강물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